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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O

생체 신호로
마음을 진단하다

옴니씨앤에스 김용훈 대표

 

멘탈 헬스케어 분야의 기업을 창립하게 된 계기가 무엇인가요?

보통 ‘스트레스받는다’는 말 많이 하잖아요.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스트레스를 인지하는 데 그쳐요. 정신 질환이 아닌 이상 병원에 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이죠. 그리고 정신 건강을 위해 심리 상담을 받으러 가면 심리 상태를 진단하는 데 설문지를 가장 많이 이용해요. 설문지는 내담자가 선택한 항목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객관적인 진단이나 치료가 어려워요. 하지만 멘탈 헬스케어와 ICT 기술을 결합하면 생체 신호를 바탕으로 좀 더 객관적인 진단이 가능하고, 평소에도 정신 건강을 체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창업을 결심했어요.

의료기기를 제작하기까지의 과정이 궁금해요.

멘탈 헬스케어 기기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의료기기 제작 회사로부터 조언을 먼저 구하고, 기술 연구 쪽을 맡아줄 파트너를 찾았어요. 생체 신호 측정 결과를 분석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전문적인 진단을 위해 정신과 의학 선생님들, 심리 상담가분들께 자문을 구했고요. 처음 멘탈 헬스케어와 ICT 기술을 결합하겠다는 아이디어를 기획한 후 4, 5년간은 10가지 이상의 모델을 만드는 데 집중했어요. 새로운 모델을 만들 때마다 정신과 전문의, 심리 상담가, 엔지니어들에게 계속해서 자문을 구하며 아이디어 수정을 거듭해 지금의 멘탈 헬스케어 기기를 만들게 됐죠.

기업을 운영할 때 중요한 점이 있다면요?

타이밍, 비용, 인간관계 이렇게 세 가지요. 그중에서도 마음에 맞는 사람들을 만나는 게 가장 중요해요. 같이 일할 사람들에게 사업과 비전을 설명하고, 설득해야 회사를 운영할 수 있으니까요. 자금 조달도 매우 중요한 점 중 하나죠. 자금 계획을 제대로 잡지 않으면 회사가 금세 무너질 수 있거든요. 창업을 하거나 제품을 출시할 타이밍도 잘 잡아야 해요. 개인 의지도 중요하지만 사회, 주변 분위기도 잘 맞아야 해요. 자금, 인력, 론칭하는 기간 등을 운영하는 게 항상 계획대로 되지 않기 때문에 가장 어려운 부분이기도 하죠.

창업에 도움이 된 전공, 경험이 있을까요?

멘탈 헬스케어를 다루는 기업이기 때문에 의료, 상담 등의 분야도 알아야 하지만, ICT 기술이 기반이되는 사업이다 보니 전자기기에 관련된 기본 지식이 필요해요. 제 경우에는 전자공학과 학·석사를 했고, 옴니텔이라는 기업의 창업 멤버로 참여해 정보통신 관련 기업에서 20년 넘는 경력이 있어요. 따라서 하드웨어, 소프트웨어, ICT 관련 분야에 계신 분들과 의사소통이 수월한 편이에요. 이 외에도 오랜 회사생활을 통해 사람들과 협업하는 방법, 문제해결 능력을 기른 것이 회사 운영에 도움이 됐죠.

회사를 운영하면서 보람찬 순간은 언제인가요?

기기의 성능보다 생생한 고객 반응을 보면서 만족감을 느껴요. 한번은 시니어분들을 대상으로 옴니핏 메디케어 체험을 진행한 적이 있어요. 측정 결과를 보고 “스트레스가 많으신가 봐요. 요즘 고민 있으신가요?”라고 여쭤봤더니 바로 고민거리를 말씀하시더라고요. 데이터의 정확성보다 마음의 공감을 받고 싶으셨던 거예요. 또 우울증으로 치료받고 있는 분이 VR을 이용한 후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며 우는 경우도 있었어요. 뿐만 아니라 집중하는 습관을 기르고 싶어 하는 친구들이 옴니핏 브레인 기기를 쓰고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고 있다는 후기를 볼 때도 뿌듯하죠.

“신체검사를 하듯 멘탈 헬스도 꾸준히 관리할 수 있도록 하는 게 목표예요.

4차 산업혁명을 통해 AI가 많은 부분을 대체할 거라는 전망이 있지만,
인간의 감정은 AI가 대체할 수 없는 부분이라는 점에서 앞으로도 유망한 분야라고 할 수 있죠.”

 

멘탈 헬스케어 산업의 전망은 어떤가요?

멘탈 헬스케어 산업은 ICT 기술, 정신과 전문의, 심리 상담사, 앱 개발자 등 여러 분야의 전문가가 협업하는 산업이에요. 즉 헬스케어 기기, 콘텐츠 제작 등 여러 분야를 융합할 수 있는 산업이죠. 그리고 뇌는 100% 중 1%도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영역이에요. 뇌와 관련해 개척할 수 있는 분야가 많다고 생각해요. 최근에는 4차 산업혁명을 통해 AI가 많은 부분을 대체할 거라는 전망이 있지만, 인간의 감정은 AI가 대체할 수 없는 부분이라는 점에서 앞으로도 유망한 분야라고 할 수 있죠.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해요.

학생들이 교내에 있는 심리상담센터에서 수시로 자신의 멘탈 헬스를 점검하고 스트레스를 관리하는 환경을 조성하는 게 목표예요. 신입생 때 신체검사를 하듯 멘탈 헬스도 측정을 통해 꾸준히 관리할 수 있도록 하는 거죠. 그리고 지금보다 풍성한 힐링 콘텐츠를 제공하는 데에도 힘을 쏟을 계획이에요.

마지막으로 창업을 꿈꾸는 청소년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려요.

아이디어가 있으면, 실행에 옮기는 게 가장 중요해요. 관련 분야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면서 아이디어를 구체화하고, 먼저 그 분야에 진출한 사람들을 만나보세요. 기업이나 정부에서도 스타트업 지원 프로그램이 많으니 그런 분들을 찾아가보는 것도 도움이 될 거예요. 기업에서 하는 프로그램에 많이 참가하고 멘토도 많이 만난 후에 창업을 결심해도 늦지 않아요.

글 김현홍 ●사진 최성열, 옴니씨앤에스

 

 

크리에이터의 숨은 조력자 MCN의 모든 것

미디어브릿지 장익호 이사

글 전정아 ● 사진 오계옥

 

MCN에 대해 설명해주세요.

MCN은 아주 간단히 말하면 인터넷 스타들을 관리하는 기획사예요. 유튜브가 공식 허가한 MCN으로는 ‘다이아TV’와 ‘샌드박스 네트워크’, ‘트레져 헌터’, ‘콜랩 코리아’가 있죠. 초반에는 유튜브 크리에이터들의 인기가 높아지고, 수익을 내는 채널이 많이 생겨서 이들을 관리하는 차원에서 생겼어요. 하지만 이제는 ‘트위치’나 ‘아프리카 TV’ 등에서 라이브 방송을 진행하는 스트리머와 BJ는 물론 인스타그램 인플루언서(인스타그램, 블로그 등에서 유명해져 영향력 있는 개인)도 MCN에 소속될 수 있죠.

 

1인 미디어와 관련된 크리에이터를 모두 관리하는군요.

맞아요. 유튜브 크리에이터들은 연예인이나 다름없어요. 그래서 요즘은 엔터테인먼트 회사나 방송국도 MCN에 뛰어드는 추세죠.

 

인터넷 스타의 기획사라고 했는데, 담당 업무가 어떻게 구분되나요?

MCN 내부에서의 업무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소속 크리에이터를 관리하는 업무와 광고주를 만나는 업무로 크게 나눌 수 있어요. 크리에이터 매니저는 회사와 크리에이터의 연결 고리죠. 커뮤니케이션 매니저라고 부르기도 해요. 그리고 크리에이터의 영상을 편집하는 편집 PD, 광고를 유치하는 영업 및 마케팅 담당자가 있어요.

 

가장 궁금한 게 크리에이터 매니저의 일인데, 먼저 크리에이터는 어떤 식으로 발굴하나요?

연예인 캐스팅 매니저와 비슷해요. 다양한 분야의 재능과 끼가 보이는 분들에게 연락하는 거예요. 유튜브 크리에이터일 경우에는 구독자가 1000명 정도 되고 조회수가 꽤 나오면 메일이나 다이렉트 메시지를 보내고 등록을 권유하는 식이죠. 그래서 지금은 가능한 한 많은 크리에이터를 등록해서 소속 인원을 늘리는 중이에요. 얼마나 많은 크리에이터가 소속된 MCN인지가 광고 시장에서 중요한 편이거든요. 반대로 크리에이터 쪽에서 역으로 제안해올 때도 있어요. 우리 회사 소속 크리에이터인 ‘퓨어디’는 먼저 회사 측으로 파트너계약을 제안해왔죠.

 

이 콘텐츠는 인기를 얻을 것 같다고 느낌이 드는 크리에이터도 있나요?

잘될 친구들을 스타로 만드는 게 우리 일이에요. 그러다 보니 사람을보는 안목이 필요한데요, 우리는 매력만큼 스스로 노력하는 열정 넘치는 친구들에게 더 지원해주는 편이에요. 얼굴이 예쁘고 잘생긴 것보다도 성실하고 인성이 좋은 분들을 영입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크리에이터 지원과 관리도 MCN이 맡고 있죠?

그렇죠. 엔터테인먼트 회사의 업무와 거의 똑같아요.(웃음) 성장 가능성이 있는 크리에이터를 더 큰 스타로 만들기 위해 키우는 거죠. 예를 들어 라이브 방송을 하는 친구들에게는 장비를 지원해주기도하고, 방송 중에는 원격으로 관리하기도 해요. 우리 회사는 크리에이터를 양성하는 중에는 기본 급여를 제공하고요. 또 양질의 콘텐츠를 만들기 위해 스피치, 댄스나 운동, 스피치 관련 학원에도 보내고 있습니다.(웃음)

 

MCN에서 촬영 장비를 지원해주는 줄은 몰랐어요.

조명부터 마이크, 프로그램 설치까지 도와주기도 해요. 또 방송은 하고 싶은데 집에서 못하는 경우에는 회사 스튜디오에서 방송하도록 자리를 제공하기도 하죠. 이 외에도 아프리카 TV와 트위치 등 라이브 방송 플랫폼과 크리에이터가 협의해야 할 문제가 생기면 MCN 측도 함께 협상하러 갑니다. 더 좋은 조건으로 협상하도록 돕는 거죠. 협찬이나 광고가 들어오면 바로 영상에 활용할 수 있도록하고요. 반대로 크리에이터에게 논란이 생길 경우 보도 자료를 빠르
게 배포해 문제를 해결해요. 냉정하게 득실을 계산하는 판단력이 필요할 때죠.

 

발굴부터 양성, 지원에 문제 해결까지… MCN 측이 담당하는 일이정말 많네요.

맞아요. 1인 미디어라고는 해도 온전히 혼자 모든 일을 하려면 하나부터 열까지 쉬운 게 없어요. 그래서 시작하고 6개월에서 1년 안에 포기하는 친구들이 많아요. 그 때문에 MCN이 필요한 거고요. 크리에이터 관리가 가장 중요한 일인 만큼 그들이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일할 수 있도록 돕고 있어요.

 

모든 소속 크리에이터들에게 지원을 똑같이 제공하나요?

마음으로는 그러고 싶은데, 연예인이랑 달리 MCN은 소속 크리에이터와 전속 계약을 맺는 게 아니거든요. 그러다 보니 사업자 입장에서 는 모든 크리에이터에게 전폭적인 지원과 투자를 할 수가 없어요. 아무래도 더 노력하고 회사 측과 더 신뢰를 쌓은 분들에게 관리가 집중 되기는 해요. 많은 MCN이 비슷한 상황이죠. 소속 크리에이터가 하도 많다 보니 모두를 관리하기는 힘들어요. 등록만 해두고 아무 지원도 안 하는 식인 거죠. 그래도 우리 회사는 광고가 들어올 경우 소속 크리에이터에게 동등하게 알려주고 기회를 제공하려고 해요.

 

크리에이터를 관리하는 커뮤니케이션 매니저가 가장 보람을 느낄 땐 언제인가요?

내가 관리하는 크리에이터가 스타가 되어가는 모습을 볼 때 일하는게 재밌어지죠. 예를 들어 퓨어디가 방송에 나가고, 인기 크리에이터와 컬래버레이션을 진행하는 걸 보면 일을 하고 있구나, 하는 기분이 들어요. 크리에이터의 성장이 곧 MCN의 성장이기도 하니까요. 그렇게 애정을 쏟아서 그런지 크리에이터가 이 일을 포기하려고 할 때 가장 힘들어요. 시간 낭비를 했다는 기분도 들지만 그 친구의 가능성이 꺾이는 걸 보면 안타까워요.

 

미디어브릿지에서는 왕홍(중국 인터넷 스타)이나 인플루언서도 양성한다고 들었어요. 크리에이터 담당 업무와는 차이점이 있나요?

크리에이터와 달리 인플루언서는 보이는 이미지만 만들면 돼요. 요우쿠나 웨이보 등 중국 인터넷 플랫폼에서 유명해진다면 한국인도 왕홍이 될 수 있고요. 그런데 크리에이터는 콘텐츠를 고민해야 한다는 점이 달라요. 트렌드에 맞춰 더 짧고 재밌는 영상을 만들어야 살아남을 수 있어요. 앞으로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 유튜브 스타들의 경계는 점차 허물어질 거예요. SNS 스타가 크리에이터로 업무 반경을 넓힐 수도 있을 거고, 유명해진 크리에이터는 이미 인플루언서로서 충분히 기능하니까요. 특히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 스타로 시작했다면 유튜브 크리에이터가 됐을 때 어느 정도 팬층은 갖고 시작하게 된다는 것도 장점이죠. 그리고 우리는 팬층이 확보된 점을 살려서 아예 지상파에서 활동할 수 있는 걸 그룹을 데뷔시키려고 준비 중이에요.

 

1인 크리에이터들이 모여 걸 그룹으로 데뷔하는 경우는 처음 본 것같아요.

아프리카 TV BJ와 인플루언서들은 데뷔 전부터 고정 팬이 있다는 점이 달라요. 데뷔와 앨범 제작 방식도 크라우드 펀딩(후원, 기부,투자를 목적으로 웹, 모바일 네트워크를 통해 다수의 개인으로부터 자금을 모으는 것)으로 선택했어요. 하지만 무엇보다 데뷔 전부터 준비 과정, 무대 이야기까지 모두 팬들과 소통할 수 있으니 멤버와 팬의 유대감이 남다를 거라고 자부합니다.

 

MCN은 어떻게 수익을 창출하나요? 유튜브 크리에이터와 마찬가지로 유튜브를 통해 수입이 나기도 하나요?

 

※ MODU 지면을 통해 ‘크리에이터 매니저’의 상세 직업 정보를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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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격을 내릴수록 기업은 성장한다
코스트코 설립자 짐 시네갈

글 김현홍 ● 사진 위키미디어커먼즈



코스트코는 전자제품, 식료품, 생활용품 등의 제품을 판매하는 창고형 대형 할인점이다. 쿠키, 치즈케이크, 연어 등 푸짐한 양은 물론 높은 품질과 저렴한 가격으로 전 세계적으로 소비자들에게 인기가 많다. 우리나라에서 대형 할인 마트들이 줄줄이 폐점하는 동안에도 코스트코만은 고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특히 코스트코 양재점은 전 세계 매장 중 매출 1위(2012년도)를 차지할 정도였다.
세계적으로 유통업이 위기를 맞고 있는 지금, 코스트코의 매출은 해마다 증가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거기에는 최소한의 이익을 추구하더라도 소비자들에게 질 좋은 제품을 낮은 가격에 제공하고자 했던 짐 시네갈의 경영 철학이 있다.

아르바이트로 시작한 곳에서 29년간 일하다

 
짐 시네갈은 1936년 미국 펜실베이니아주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을 혼자 키울 형편이 되지 않아 시네갈을 보육원에 보냈다. 그래서 그는 11살 때까지 그곳에서 자랐다. 이후에는 어머니와 살았지만 경제적 지원을 받기 어려워 어릴 때부터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 다.
대학에 진학한 후에도 아르바이트를 계속하던 짐 시네갈은 친구의 부탁으로 우연히 미국 최초의 창고형 마트인 ‘페드 마트’에서 매트리스 하역 일을 하게 된다. 이때 짐 시네갈은 처음으로 대형 할인 매장 일을 접하고, 이 일이 자신에게 맞는다는 생각이 들어 페드 마트에 정식 입사한다. 이를 시작으로 25년간 페드 마트의 CEO였던 솔 프라이스의 밑에서 일하며 수석 부사장 자리까지 오른다.
하지만 페드 마트의 사업주가 바뀌고 멘토 같은 존재였던 솔 프라이스가 회사를 떠나자, 짐 시네갈도 퇴사를 결심한다. 그리고 솔 프라이스가 새롭게 설립한 ‘프라이스 클럽’으로 직장을 옮긴다. 하지만 짐 시네갈은 언젠가 독립된 회사를 꾸리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29 년간 함께 일한 솔 프라이스를 떠났고, 그의 나이 49세에 창업을 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리고 자신의 경력을 살려 대형 유통 할인매장 코스트코를 창립한다.

최저 가격, 최대 만족의 원칙을 고수하다

 
짐 시네갈은 ‘가치를 창출하고 직원과 고객을 섬김으로써 주주들에 게 보답하라’고 했던 솔 프라이스의 영향을 받아 ‘최상의 제품과 서비스를 최저 가격에 제공하는 것’을 코스트코의 사명으로 삼았다. 이러한 경영 철학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마진율 15% 규칙’이다. 이 규칙으로 고객에게 상품과 서비스를 최저가에 제공하고, 기업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이익을 확보하겠다는 것이다. 보통 유통업계가 20~30%, 백화점이 50%까지 마진을 내는 것에 비해 그 절반에도 못 미치는 수준을 유지하겠다고 한 것은 매우 파격적인 정책이었다.
대신 코스트코는 저렴한 제품을 ‘많이’ 파는 것으로 승부를 봤다. 일례로 스타벅스의 CEO 하워드 슐츠는 짐 시네갈의 끈질긴 설득 끝에 코스트코에서만큼은 싼 가격에 다량의 제품을 판매할 정도다. 꾸준히 고객의 선택을 받기 위해서는 저렴한 가격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제품의 품질이 보장돼야 한다. 그래서 짐 시네갈은 소수의 엄선된 제품만 판매하는 전략을 폈다. 실제로 코스트코에서 판매하는 품목은 4000여 가지로, 경쟁사인 월마트가 10만 가지 넘는 품목을 판매하는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적은 품목만 취급한다. 이로써 물품을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게 됐을 뿐만 아니라 관리 비용을 줄여 제품 가격을 더욱 절감시키는 효과를 냈고, 이는 곧 코스트코의 정체성이자 경쟁력이 됐다.
 

코스트코 매장 내부. 적은 품목을 대량으로 판매하는 짐 시네갈의 경영 방식이 엿보인다.

코스트코의 지속적인 성장 동력

 
기업은 이윤 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집단이다. 하지만 짐 시네갈이 코스트코를 경영하는 방식은 이와는 거리가 먼 것처럼 보인다. 보통의 기업은 이윤을 최대화하기 위해 고민하지만, 짐 시네갈은 이윤을 많이 내면 낼수록 더욱 저렴한 가격을 만들기 위해 힘썼기 때문이다. 그의 이러한 경영 방식은 ‘마진율 15% 규칙’을 만들어냈고, 2008 년 금융 위기 때에도 제품 공급업체를 설득해가며 이 비율을 지켜 고객의 신뢰가 무너지지 않게 했다. 이런 노력으로 코스트코는 창업한 지 30년이 되기도 전에 매출액 148조 원에 이르는 세계적인 할인매장이 될 수 있었다.
지금도 코스트코는 740여 개의 매장에 9000만 명이 넘는 회원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 중 90%는 매년 재가입할 정도로 높은 만족도를 자랑한다. 현재 짐 시네갈은 CEO 자리에서 물러났지만 코스트코는 창업 당시의 규칙을 지키며 꾸준히 성장하는 대형 할인매장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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뻔하게? 아니
Fun하게!

버진그룹 CEO 리처드 브랜슨

글 김현홍 ● 사진 위키미디어커먼즈

버진그룹은 영국에서 가장 사랑받는 브랜드 3위에 오른 기업이다. 항공, 통신, 호텔 등 전 세계에 350여 개의 계열사를 보유한 다국적 기업이 사람들의 큰 관심과 애정을 받는 이유는 바로 리처드 브랜슨의 경영 철학 때문이다. 버진그룹의 CEO 리처드 브랜슨의 경영 철학은 ‘즐거움’이다.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고 있는 비즈니스와는 다소 거리가 있어 보인다고? 절대 그렇지 않다. 리처드 브랜슨은 즐거움과열정으로 성공할 수 있음을 몸소 증명해 보였다. 열기구로 대서양을 횡단하고, 스튜어디스로 변장해 직접 서비스를 제공하는가 하면, 경쟁사인 코카콜라의 전광판에 콜라 대포를 쏘기도 했다. 이런 괴짜 같은 행동으로 목숨을 잃을 뻔하고 다른 기업 CEO의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그는 자신이 즐거워할 수 있는 일에 끊임없이 도전하고 실패를 통해 배우면서 지금의 버진그룹을 만들었다.

난독증 환자가 잡지를 만들었다고?

 

리처드 브랜슨은 1950년 7월 영국 런던에서 태어났다. 교육열이 높은 부모님 덕분에 등록금이 비싼 사립학교에 다녔지만 난독증으로 성적은 항상 하위권을 맴돌았다. 대신 그는 운동감각이 뛰어났다. 그러나 그마저도 부상 때문에 그만두게 되었다. 난독증을 극복하기 위해 계속해서 노력했지만 여전히 수업을 따라가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15세에 학교를 그만둔다. 하지만 리처드 브랜슨은 실의에 빠져있기보다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것을 택했다.

당시 리처드 브랜슨의 꿈은 기자가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학생들을 위한 잡지 <스튜던트>를 창간했다. <스튜던트>는 학교에서 느낀 불합리한 일들을 고발하는 잡지로, 인기는 꽤 높았지만 많은 수익을 내지는 못했다. 그러던 중 그는 학생들이 비싼 돈을 주고 음반을 구입한다는 것을 었고, 우편으로 음반을 저렴한 가격에 판매하는 사업을 시작한다. 17세 때 시작한 레코드 사업이 몇 년에 걸쳐 수익이 나기 시작하자 리처든 브랜슨은 20세 때 본격적으로 ‘버진레코드’를 설립했다. 당시 음반 제작 사업에 참여한 사람들 모두 초보자였기 때문에 ‘최초’라는 의미의 ‘버진(Virgin)’을 붙였다. 버진 레코드는 당시 무명이던 영국의 음악가 마이크 올드 필드의 음반을 직접 제작해 흥행에 성공했다. 그 후 롤링 스톤스, 필 콜린스, 재닛 잭슨 등 여러 음악가와 계약을 하면서 세계적인 음반사로 거듭났다.

실패를 마주하는 자세가 성공을 좌우한다

 

버진 레코드로 사업을 키워나가는 중, 리처드 브랜슨이 타려던 비행기가 결항해 승객들과 돈을 모아 전세기를 빌린 일이 있었다. 그는 이 경험을 통해 전세기 대여비가 생각보다 저렴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자신이 더 나은 항공사를 만들어보고 싶다고 생각한다. 리처드브랜슨이 항공사를 설립한다고 했을 때 음반 회사인 버진 레코드가 어떻게 항공 사업을 하느냐며 주변 사람 모두가 반대했지만 그는 사람들을 설득해 끝내 ‘버진 애틀랜틱’을 설립한다. 어렵게 마련한 비행기 한 대로 사업을 구상한 지 3개월 뒤, 드디어 첫 비행에 성공한다. 버진 애틀랜틱은 차별화된 서비스를 위해 이코노미 클래스 최초로 전 좌석에 모니터를 설치했다. 또한 비즈니스 가격으로 고급 서비스를 선보이는 ‘어퍼 클래스(Upper Class)’ 좌석을 만들어 목욕, 미용, 마사지 서비스까지 제공했다. 그 결과, 반대를 무릅쓰고 만들어진 버진 애틀랜틱이 영국 2위 항공사로 급성장했다. 리처드 브랜슨은 버진 애틀랜틱을 버팀목 삼아 사업을 공격적으로 확장해나가기 시작했다. 음료, 금융, 의료, 웨딩, 항공, 출판 등의 분야로 진출했고, 현재 350여 개 이상의 회사를 가진 다국적기업 버진그룹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그의 사업이 매번 성공했던 것은 아니다. 버진 애틀랜틱, 버진 웨딩 등은 사업 부진을 겪기도 했다. 그럼에도 리처드 브랜슨은 좌절하지 않았다. 이것이 훗날 다른 사업의 초석이 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리처드 브랜슨은 아무리 철저하게 조사하고 확실하게 검증한 아이디어라도 실패할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실패를 대하는 태도가 변화를 만든다고 생각한다. 실패를 배움의 기회로 여기고, 이를 통해 나아갈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2016년 버진 갤럭틱이 만든 우주여행용 우주선 ‘VSS 유니티(VSS Unity)’가 모하비 사막에서 첫 번째 글라이더 비행에 성공했다.

리처드 브랜슨이 상상하는 것은 현실이 된다

 

리처드 브랜슨은 지금까지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최근 그는 우주여행에 손을 뻗었다. 우주비행사만 우주에 갈 수 있다는 편견을 깨고 민간인의 우주여행을 위한 ‘버진 갤럭틱’을 설립한 것이다. 버진 갤럭틱은 1인당 25만 달러(약 2억 7000만원)에 우주여행을 할 수 있도록 계속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또한 리처드 브랜슨은 일론 머스크의 하이퍼루프 사업에 투자했다. 하이퍼루프(Hyperloop)란 지하에 긴 관을 따라 시속 약 1200km로 움직이는 교통수단이다. 이는 소리보다 빠른 속도로 운행되기 때문에 미래형 교통수단으로 기대를 모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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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5·18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식 때 문재인 대통령의 뒷모습이 찍힌 사진이 화제에 오른 적이 있다. 무릎을 꿇고 참배하는 문 대통령의 구두 때문이었다. 그 구두를 얼마나 오래 신었는지 닳고 찢어진 구두의 밑바닥으로 알 수 있었다. 당시 ‘문템’ 구두가 청각장애인들이 만든 수제화라는 것이 알려졌고, 그 구두를 만들던 사회적 기업이 경영난으로 폐업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며 많은 이들의 안타까움을 샀다. 구두 브랜드 ‘아지오(AGIO)’를 만드는 ‘구두만드는풍경’이 사람들의 관심 속에서 다시 시작된 배경이다. 구두만드는풍경의 유석영 대표에게 ‘아지오 스토리’를 들었다.

※ 이번  ‘만나고 싶었어요’는 장애인들이 직접 기자로 참여하는 ‘성남시 한마음복지관 한마음기자단’(www.woorimaum.org)과 함께했습니다.

글 박성조 ●사진 성남시 한마음복지관, 구두만드는풍경

대통령 덕분에 다시 태어난 ‘아지오’

 

‘대통령 구두’로 알려졌다. 문 대통령과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됐나.

2010년에 처음 청각장애인들과 구두 공장을 열었다. 막상 열기는 했는데 팔 길이 없으니 보따리를 들고 다니며 사방으로 팔러 다녔다. 청와대, 국회, 서울역 등 안 돌아다닌 곳이 없다. 그렇게 팔아서 월세를 내고 급여도 주고 그랬다. 문 대통령은 그때 만난 ‘고객’이다. 2012년에 국회에 가서 구두를 팔았는데, 당시 문재인 대통령 후보가 오셔서 구두를 구입했다. ‘잘 만들었다, 어려움은 없냐’며 묻기도 하셨다. 그때 문 대통령뿐 아니라 추미애 전 대표를 비롯해 많은 분이 구두를 사갔다.

처음 청각장애인과 함께 구두를 만들기 시작한 계기는?

우연한 기회로 시작한 CBS 방송 일을 11년간 했다. 아무래도 시각장애인이다 보니 장애인 관련 취재를 했는데, 그때 알게 된 것이 있었다. 1990년대까지는 청각장애인들이 구두를 많이 만들었다는 것이다. 손이 빠르고 집중력이 좋아서 구두 일에 잘 맞았던 거다. 당시 우리나라 구두 생산직 종사자의 40% 이상은 청각장애인이었다. 이후 외국에서 제품을 생산해 들여오기 시작하면서 그들이 일자리를 잃었다. 파주시 장애인 종합 복지관장을 하면서 장애인들의 ‘밥벌이’의 중요성을 크게 느꼈고, 청각장애인들에게 ‘직업’을 주겠다는 생각 하나로 덜컥 사업을 시작했다. 경기도 파주시에 있는 공장 건물에서 청각장애인 6명과 함께 만든 회사였다. 40년 경력의 구두 제조 전문가도 초빙했다. 2009년에 사업을 구상해 2010년 1월에 첫 출근을 했다.

문 대통령이 선의로만 5년이나 같은 구두를 신은 건 아니었을 것 같다. 분명 품질이 그만큼 뛰어났을 텐데 왜 폐업하게 됐나.

품질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었다. 당시엔 매장도 없었고, 자본도 없었다. 새로운 디자인을 뽑을 재투자 능력도 없었다. 2013년에 어쩔 수 없이 문을 닫으면서 눈물이 났다. 직원들과 함께 울기도 했고, 미안한 마음에 혼자서도 울었다.
그 구두가 뒤늦게 사람들의 관심을 받았고, 다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멈췄던 브랜드를 다시 들어 올리는 과정도 순탄치는 않았을 것 같다. 지난해에 문 대통령 취임 후 일주일쯤 됐을 때 청와대에서 전화가 왔다. 우리 구두를 대통령이 맞추고 싶어 하니 청와대로 들어와달라는 것이었다. 무거운 마음으로 답할 수밖에 없었다. “갈 수 없습니다. 이미 문을 닫았습니다. 틀도 사람들도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아서 못 합니다.” 이렇게 말하고 나서 펑펑 울었다. 오늘까지만 공장이 살아 있었으면 소위 ‘문템’이 되는 거였는데 우리가 버티질 못했다는 아쉬움에 속이 상했다. 그렇게 끝나나 했는데 5·18 기념식 영상에 구두 사진이 나왔다. 그 구두가 ‘아지오’라는 소문이 나면서 그때 일하던 사무실 전화기에 불이 났다. 연락이 폭주해서 업무가 마비될 지경이었다. 그렇지만 바로 다시 공장을 열 수는 없었다. 다시 만들 것인지를 묻는 질문에도 “아직 잘 모르겠다”라고만 답했다. ‘투자하겠다’, ‘구두를 사고 싶다’ 같은 문의가 정말 많았다.이름만 빌려주면 구두를 만들겠다는 곳도 있었다. 그 거품이 걷힐 때까지 기다렸다. 방송 인터뷰로 현재 회사가 아무것도 없다는 것도 알렸다. 회사가 실체가 없다, 현재는 아지오를 살 수도 만들 수도 없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화제가 됐을 때 바로 다시 문을 열지 않은 이유는?

내가 청각장애인들에게 상처를 줬다고 생각했다. 처음에 환경이 어렵고 배고프니까 구두 공장을 함께 만들어서 부자가 되어보자고 그들에게 약속했는데, 그 약속을 어긴 거니까. 사람들이 얘기한다고 쉽게 결정할 수는 없었다.
지나가는 바람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고민하다가 결국 ‘시즌2’를 시작했다. 사람들 문의가 너무 많아서 주변에 조언을 구했다. 유시민 작가를 찾아가서 의논했는데 “청각장애인 일자리라면 만들어보자”고 하더라. 이를 악물게 됐다. 아지오 시즌2를 만들고, 구두를 만들고, 청각장애인들이 기쁘게 일할 수 있는 곳을 만드는 일을 다시 시작하겠다고 마음먹었다.

유시민 작가와 가수 유희열 씨가 흔쾌히 아지오의 홍보 모델로 나섰다. 이후 가수 이효리, 이상순 부부가 모델로 합류해 더 유명세를 탔다.

유시민 작가가 어떤 조언을 해주었나.

경제학도라서 하지 말라고 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긍정적인 응원을 받았다. ‘대통령이 다 만들었는데 한번 해보자’는 거였다. ‘구두만드는풍경’은 협동조합으로, 유 작가도 우리 조합원이다. 조합 회의 때마다 빠지지 않고 참석하
고 있다. 직원들에게 밥도 사고 책도 나눠줄 정도로 애착이 크다.아지오 시즌1과 시즌2의 다른 점이 있다면 무엇인가. 그때는 외로운 싸움이었다. 구두 브랜드들과 경쟁하며 어렵게 사업을 이어갔다. 하지만 이번엔 주변에서 굉장히
많은 응원을 보내주고 있다. 조직의 성격도 협동조합이라 많은 이들이 함께 참여하고 있다. 유시민 작가나 유희열씨 등 유명인들도 자청해서 홍보 모델로 나섰다. 또 초기 자본금을 마련하려 시도했던 ‘아지오 펀드’에 참여하며 설립을 도와준 수많은 시민들이 있다. 과거보다는 훨씬 좋은 상황이다.

‘아지오 펀드’라니?

아지오라는 이름만 기억될 뿐 정말 아무것도 없던 상황이니 모든 걸 새롭게 준비해야 했다. 공장을 세우고, 인력을 확보하려면 초기 자본금이 필요했다. 이걸 시민들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펀드 형태로 마련했다. 2018년 10월
31일에 은행 보통예금 금리를 적용해 상환할 것을 약속했다. 유시민 작가가 직접 글을 써서 펀드의 의미를 알렸다.

 

선입견을 넘어 ‘좋은 구두’로

 

‘대통령 구두’라고 알려지면서 장애인이 만든 구두라는 점이 사람들에게 더 인상 깊게 남았다. 청각장애인들이 구두를 만들 때 어떤 장단점이 있나.

우리는 회사를 만든 다음, 장점이 있어서 청각장애인을 고용한 것이 아니라 ‘청각장애인 일자리’라는 목표를 가지고 회사를 만든 거다. 처음부터 청각장애인들의 자리였다. 청각장애인들은 몰입도가 굉장히 높고, 눈썰미가 상당히 좋다. 다만 소통이 다소 어렵기 때문에 회의를 할 때 시간이 많이 걸린다. 비장애인 직원들과 함께 일하기 때문에 더 원활하게 소통하려고 매일 수화를 하나씩 배우고 있다. 단점이 장점으로 더 크게 발휘될 것이다.

재단과 디자인은 어떻게 하고 있나.

지금은 외부에서 도움을 받고 있지만 공간이 넓어지면 청각장애인이 하게 할 것이다. 공간이 좁아서 다 하기 힘든 상황이다. 구두 디자인에는 크게 특허라는 것이 없다. 그래서 조금 변형해서 사용하고 있다. 청각장애인 중에서 디자인하는 분들이 있다. 그런 분들과 함께할 수 있으면 좋겠다. 농아인 미술인도 많은데, 재정이 허락된다면 그런 분들을 기용하고 싶다. 그렇게 투자해서 이익금이 생기면 사회 공헌을 위해 사용하고 싶다.

다른 장애 유형도 있는데 청각장애인 일자리를 먼저 생각한 계기가 있을 것 같다.

경기도에 지금도 청각장애 복지관이 없다. 서울에는 있는데 경기도에는 없다. 그래서 파주에 있을 때 청각장애 시범사업을 했다. 학습 지원을 했는데 잘 안 오더라.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당장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이 안 되니 그들에게는 일자리가 더 중요했던 거다. 청각장애인들은 소통이 어려워서 취업을 해도 유지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그들에게 보람을 느끼면서 열심히 일할 수 있는 직장을 꼭 만들어주고 싶었다.

수제화 만드는 기술을 배우고 싶은 장애인들을 위한 훈련 프로그램이 있나.

우리나라는 구두와 관련된 자격증이 없다. 그래서 한국보건복지개발원, 고용개발원 등과 양해 각서(MOU)를 맺고 준비하고 있다. 배우고 싶은 사람들에게 길을 열어주자는 의도다. 나중에는 구두만드는풍경과 협업 시스템을 만들어갈 것이다. 훈련도 3개월 과정으로 준비하고 있다. 실습과 이론 교육을 함께 진행하려 한다. 민간 자격증이라도 줄 예정이다. 이를 바탕으로 일본이 가업을 이어가는 것처럼 계승 산업을 만들어가고자한다. 청각장애인 후배들에게 물려줄 생각이다.

아지오의 경쟁력은 무엇일까.

우리나라에는 직접 구두를 만드는 브랜드가 없다. 자기 공장이 없고 전부 외주를 주고 있다. 우리는 직접 발 모양을 재고, 직접 생산을 하고 있으니 충분히 경쟁력이 있다고 본다.

장애인 생산품이라고 하면 아직까지 선입견을 가지는 사람들도 있다.

그것이 현실이기 때문에 우리는 더 철저하게 품질로 보여줘야한다. 디자인도 마찬가지다. 세련되게 뽑아야 한다. 그래서 정말 작심하고 직접 발을 재는 수제화를 내세우는 거다. 너무 원시적이라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다. 고객을 대하는 스킨십과 실측 사이즈, 좋은 가죽 등으로 제품을 만들어 좋은 브랜드가 되겠다. 장애인 생산품에 대한 선입견은 대통령 구두 사진으로 많이 깨진 것 같다. 시즌1 시기에는 그런 편견 때문에 어려움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신어본 사람들은 칭찬을 했다. 7년째 신는 사람도 있고, 그렇게 신다가 수선을 해서 더 신겠다는 사람도 있다. 이미 유명한 사람들이 많이 신고 있고, 대통령도 5년을 신었으니 이런 것들로 대중의 선입견이 많이 깨지고 있다고 본다.

 

아지오는 청각장애인들이 만드는 수제 구두다. 장애인에 대한 편견 때문에 경영이 어려워져 폐업을 했다가 약 4년 만에 ‘시즌2’로 돌아왔다.

 

선입견 때문에 어려웠던 점이 있었나.

예전 아지오를 할 때 여기저기 직접 팔러 다녔다고 했는데, 그때 이런 일도 있었다. 식당에 사람들이 많아서 거기있는 사람들에게 구두를 소개하려고 들어갔다. 그랬더니 어느 분이 구두를 꺼내기도 전에 돈을 주는 거다. 아마
1000원짜리였던 것 같다. ‘그냥 이거 들고 가시라’고 하더라. 구걸하는 걸로 알았던 거다.

대통령의 구두라는 이미지는 정말 큰 자산이다.

대통령 구두 사진으로 좋은 브랜드 이미지를 얻었기 때문에 품질경영, 신용경영으로 그것을 유지하면서 더 발전시키는 것이 우선적인 목표다. 장애인들이 일하는 회사라고 해서 저렴하고 상황이 어려운 이미지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좋은 시설에서 좋은 제품을 만드는 것이 장애인들에게도 자부심을 갖게 한다. 장애인 직원들에게 대우도 많이 해주려 한다. 리스크가 있지만 그것이 우리의 목적에 맞다.

‘장애인 구두’가 아닌 ‘고급 구두 브랜드’를 지향한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지속 가능한 회사가 되려면 그래야 한다. 그래서 불편하다는 불만이 나오면 책임지고 편하게 맞을 때까지 수선을 한다. 소비자들이 ‘장애인이 만들었으니 감안하고 사야지’라고 이해해주길 바라는 건 잘못된 생각이다. 소비자들을 만만히 봐서는 안 된다. 시장은 냉정하다. 시장에서 승부하려면 품질, 가격, 디자인 중 한 가지라도 뛰어나야 한다. 장애인 제품에 꼭 ‘장애인’이라는 말을 안 붙여도 된다. 오히려 시장조사 하고 계속 아이디어를 내야 한다. 우리 생각만 가지고 ‘내 마음 알아주세요’라고 읍소해서는 안 된다. 업무 배치를 할 때 과학적이고 체계적으로 하면 장애인들과 함께 일하면서도 품질 향상이 가능하다.

기존에 장애인들의 직업 환경을 보던 일반적인 시선과 상당히 다르다.

장애인들은 이제껏 소위 ‘버리는 산업’에 종사해왔다. 기업들이 비용적인 측면이나 고용의 어려움으로 포기한 일을 해왔다. 그러니 급여가 낮을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 직업 재활시설 700여 곳에 장애인 약 2만 명이 종사한다. 대다수는 최저임금 절반 수준의 급여를 받는다. 이런 상황은 복지 측면에서도, 비즈니스 측면에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장애인이 만드는 상품이라는 데에만 초점을 맞추지 말고 비즈니스로 접근해야 한다. 일반인들도 쉽게 접하고 살 수 있도록 해야 복지와 직업 환경이 연결될 수 있다.

구두만드는풍경과 아지오의 향후 계획은?

크게는 ‘온 국민이 아지오를 신는 그날까지’를 목표로 삼고 있다. ‘악마는 프라다를 신고, 천사는 아지오를 신는다’는 이미지로 만들어가고 싶다. 지금도 우리 제품이 대중의 70% 이상에게는 호감을 준다고 생각한다. 대통령의 구두에서 시민의 구두로, 시민의 구두에서 친구들보다 좋은 구두로 가고자 한다. 구체적인 목표는 30명 정도의 청각장애인이 폼 나게 살 수 있게 브랜드를 꾸려나가는 것이다.

사회적 이슈에 관심이 높은 청소년도 많고, 그 방향으로 진로를 생각하는 친구들도 있다. 선배로서 조언한다면?

처음에 이 회사를 만들 때 사업성을 따지고 만든 게 아니다. 청각장애인 일자리를 만들어주겠다는 목표가 있었을 뿐이다. 청소년들도 어떤 목표를 확실히 세우면 좋겠다. 갈팡질팡하기보다 자신이 세운 목표를 갖고, 가슴에 꿈으로 품길 바란다. 그렇게 목표를 따라 꿈을 키우다 보면 언젠가 그 일을 해나가고 있을 것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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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현홍 ● 사진 위키미디어커먼즈

텐센트는 중국의 인터넷, 모바일 서비스, 게임 전문 기업으로 올해 구글, 애플, 아마존, 마이크로소프트, 페이스북 등과 함께 세계에서 가장 가치 있는 10대 브랜드에 이름을 올렸다. 1998년에 마화텅이 설립한 텐센트는 메신저 업계의 후발 주자였다. 많은 사람이 이미 다른 메신저를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텐센트는 설립 초기에 이목을 끌지 못했다. 하지만 마화텅은 텐센트 설립 13년 만에 전 세계 9억명 이상이 사용하는 모바일 메신저 ‘위챗’을 만들고 세계적인 모바일 서비스, 게임 전문 기업으로 거듭났다. 올해로 20년을 맞는 텐센트는 업계에 뒤늦게 뛰어들었음에도 어떻게 세계적인 기업이 될 수 있었을까?

 

인터넷에서 미래를 본 마화텅

마화텅의 어린 시절 꿈은 천문학자였다. 하지만 대학에서 천문학을 전공한 사람들이 천문학과는 거리가 먼 직업을 택하는 현실을 보고 컴퓨터공학과에 진학했고, 대학 졸업 후에는 유명 무선호출업계 회사에 취직한다. 그는 회사에서 요구하는 일을 묵묵히 처리해내는 유능하고 성실한 회사원이었다. 하지만 빠른 속도로 커지는 인터넷 시장을 보고 무선호출기의 미래가 밝지 않다고 판단해 5년간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창업을 결심한다.

마화텅은 1998년 11월, 엔지니어 네 명을 모아 ‘텐센트’라는 이름으로 사업자 등록을 해 이듬해 2월 ‘ICQ’를 그대로 모방한 ‘OICQ’라는 메신저를 출시한다. ICQ는 누구든 ICQ 번호만 있으면 메시지를 주고받을 수 있는 1세대 인터넷 메신저로, 당시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마화텅이 OICQ를 출시할 당시 중국 내에는 이미 ICQ와 비슷한 메신저가 많았기 때문에 사용자들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마화텅은 OICQ를 더 나은 메신저로 만들기 위해 기존의 메신저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ICQ는 오프라인 상태인 친구와는 대화를 할 수 없고 컴퓨터를 바꾸면 이미 등록된 친구 목록이 사라진다는 단점을 발견한다. 마화텅은 이를 개선해 OICQ에 오프라인 상태인 친구와도 대화를 할 수 있는 기능과 임의로 대화 상대를 정할 수 있는 기능을 추가한다. 사람들은 ICQ보다 편리한 OICQ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OICQ는 3년 만에 9000만 명의 사용자를 확보한다.

 

위기가 기회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OICQ를 이용하는 것에 위기를 느낀 ICQ는 지적재산권 문제로 텐센트를 소송했다. 텐센트는 이 소송에서 패배해 도메인을 ICQ가 소속된 AOL에 이전해야 했다. 더는 저작권 문제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던 마화텅은 OICQ의 상호명을 ‘QQ’로 바꾸기로 한다. 사용자들은 OICQ를 이미 QQ로 줄여서 부르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변화를 거의 눈치채지 못했고 QQ 사용자는 꾸준히 늘어났다. 하지만 사용자가 늘어나는 만큼 서버를 운영하는 비용도점점 증가했다. 텐센트는 많은 사용자를 확보하고 있지만 이에 비해 안정적으로 수익을 내지 못했다. 서버 관리 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워진 마화텅은 텐센트를 매각하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당시 인터넷 기업이 우후죽순 생기는 중이었으므로 마화텅이 생각한 것만큼 텐센트의 가치를 높게 평가해주는 투자자를 찾기 어려웠다. 여러 투자자를 찾아다닌 끝에 벤처 캐피털 ‘IDG’의 투자를 받게 된 마화텅은 QQ로 어떻게 수익을 낼지 고민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싸이월드 ‘아바타’에서 돌파구를 찾는다. 싸이월드의 아바타를 모방한 ‘QQ쇼’를 만든 것이다. 다만 싸이월드 아바타와는 달리 의류 브랜드와 협업해 실제 상품과 똑같이 디자인된 옷을 아바타에게 입힐 수 있도록 했다. 이는 사용자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으며 의류업체들이 앞다퉈 QQ쇼에 홍보를 제안하면서 막대한 수익을 창출한다.

시대의 흐름을 꽉 잡아라

텐센트는 QQ를 통해 사용자 수를 확보했고 이를 기반으로 전자상거래, 이메일, 검색엔진 등으로 사업을 확장한다. 그리고 2004년 마화텅은 ‘아워게임’, ‘킹소프트’ 등 온라인게임 업체들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것을 보고 본격적으로 게임 사업에 뛰어든다. 이미 수억 명의 사용자를 확보하고 있는 QQ를 활용한다면 온라인게임 시장을 선점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텐센트 게임은 별도의 가입없이 QQ 아이디만으로 게임을 즐길 수 있었고,‘Q머니’를 쓸 수 있어 편리했다. 결국 텐센트는 중국 내 게임 산업의 강자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일각에서는 마화텅이 모방으로 성공했다고 비판하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마화텅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끊임없이 사업 영역을 확장했고 뒤늦게 사업에 뛰어들더라도 기존의 것보다 더 나은 제품으로 업계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 기존의 것을 단순 복제하는 것이 아니라 사용자 편의를 1순위에 둔 상품을 만들어냈기 때문에 사용자들의 선택을 받은 것이다. 지금도 마화텅은 웹, 모바일, 게임, 엔터테인먼트 등으로 사용자를 만족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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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전정아 ● 사진 위키미디어커먼즈

액션캠은 수영, 자전거, 카레이싱 등 아웃도어 활동을 할 때 옷이나 헬멧, 운동기기에 부착해서 영상을 촬영하는 미니 캠코더를 말한다. 액션캠으로 찍으면 카메라 앵글이 촬영자 시점과 함께 움직이기 때문에 시청자가 직접 익스트림 스포츠를 체험하는 것처럼 생생하게 영상을 감상할 수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현재는 샤오미 등 많은 회사가 액션캠을 제조하고 있지만 그전에는 ‘고프로(GoPro)’라는 브랜드의 ‘히어로(Hero)’가 액션캠의 대명사로 불렸다. 히어로 출시 이후1시간당 1000대가 팔리고, 매년 2배 이상의 판매를 기록할 만큼 기염을 토한 고프로. 그 성공 비결은 무엇일까?

 

열정을 따라가니 성공이 따라오다

 

액션캠 브랜드 고프로의 CEO 닉 우드먼은 고등학교 재학 시절, 서핑의 매력에 푹 빠졌다. 커다란 파도를 넘는 짜릿한 쾌감이 좋았다. 그는 다른 취미 없이 오로지 서핑에만 몰두했다. 캘리포니아 주립대샌디에이고 캠퍼스에 진학한 것도 미국에서 가장 서핑을 즐기기 좋은 지역인 샌디에이고에서 생활하기 위해서였다. 두 차례나 사업에 실패했던 우드먼에게 재기의 기회를 준 것도 서핑이었다. 그는 재충전을 하기 위해 호주와 인도네시아로 서핑 여행을 떠났다. 우드먼은 자신이 서핑하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고 싶었다. 그래서 고무 밴드로 35mm 카메라를 손바닥에 고정시켜 촬영했지만 마음에 드는 장면을 담는 것이 쉽지 않았다. 너무 무거운 데다 초점을 잡기가 어려웠다. 우드먼은 불편함을 최소화하는 과정에서 아예 브랜드를 만들어 창업하기로 마음먹었다.

여행에서 돌아온 우드먼은 부모님에게 빌린 자금과 틈틈이 모은 돈으로 사업을 위한 아이템 준비에 들어갔다. 그는 가장 먼저 카메라를 연결하는 벨트를 만들 작정이었다. 하지만 카메라 자체가 너무 크고 무겁다는 사실을 깨닫고 더 작고 가벼운, ‘입을 수 있는’ 카메라를 만드는 것으로 아이템을 선회했다.

고프로가 시장에 출시한 첫 카메라는 필름을 사용한 아날로그 카메라였지만 점차 와이파이를 사용하고, 저장 공간까지 확보된 원격조종 방수 카메라로 진화해갔다. 판매고는 매년 두 배씩 증가했다. 특히 2009년 출시한 대표 모델 ‘히어로 HD’는 스마트폰 카메라를 사용하는 데 익숙한 소비자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어안렌즈를 사용해서 170도 각도의 넓은 화면을 촬영할 수 있으면서 초점까지 잘 맞췄다. 게다가 풀 HD 해상도의 영상도 담아냈다. 폭발적인 판매에 힘입어 우드먼은 2013년 미국의 억만장자 중 가장 어린 자수성가형 창업자로 이름을 올리게 됐다.

 

실패에 대한 공포를 성공을 향한 절실함으로

 

글로벌롤모델_홈페이지게시용 2

① 고프로의 신제품 ‘히어로 6’는 기존 액션캠에 비해 두 배 더 많은 프레임을 녹화할 수 있어서 빠른 움직임을 부드럽게 담아낼 수 있다.(위)  ② 고프로의 ‘히어로 3’로 촬영한닉 우드먼이 서핑하는 모습.(아래)

 

고프로를 창업하기 전, 닉 우드먼은 이미 두 번의 사업에 실패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시작한 첫 번째 회사는 2달러 이하의 전자제품을 판매하는 ‘임파워올닷컴’이었다. 하지만 창업 자금 부족과 유통망 확보를 못해서 제대로 시작하기도 전에 문을 닫았다. 두 번째로 차린 게임 및 마케팅 플랫폼 ‘펀버그’ 역시 닷컴 버블(1995년부터 2000년에 걸친 인터넷 관련 분야의 거품경제 현상)이 붕괴하자 이용자가 급감해 결국 서비스를 중단했다. 그래서 더 신중하고 완벽하게 세 번째 창업을 준비했다.

우드먼은 먼저 개인 생활은 모두 포기하고 하루 종일 시제품을 만드는 데 시간을 보냈다. 제품 기본 설계에 몰두한 나머지 몇 시간 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은 적이 부지기수다. 게다가 그는 CAD(Computer Aided Design, 컴퓨터 자동설계 프로그램)를 다룰 줄몰라 제품 샘플을 직접 손으로 만들었다. 중국 공장에서 만든 시제품이 기준에 맞지 않으면 자신이 납득할 수 있는 품질이 될 때까지 몇번이고 반품을 거듭했다. 창업한 후에도 한동안 운송부터 영업, 제품디자인, 고객 지원까지 우드먼 혼자 도맡았다. 심지어 물을 마시러 부엌으로 가는 시간까지 줄이려고 물통을 넣어두는 가방을 따로 마련했다고 한다.

우드먼은 “고프로가 이전의 사업처럼 실패하거나 공중분해될까 봐 너무나 두려웠다”고 회고했다. “또다시 실패했다면 세상을 등졌을것”이라고도 털어놓았다. 하루 18~20시간씩 4년간 쉬지 않고 일한 배경에는 실패하면 더 이상 돌아갈 곳이 없다는 공포가 있었던 셈이다. 취미에서 시작한 사업 아이디어였던 고프로, 하지만 이를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시킨 데에는 창업가의 고통과 노력이 있었음을 닉 우드먼이 증명하고 있다.

고객의 취향입니다

존중해주세요

츠타야 서점 CEO 마스다 무네아키

글 전정아 ● 사진 위키미디어커먼즈, T-SITE 공식 홈페이지

 

일본의 최대 서점 ‘츠타야’는 전국에 1500곳이 넘는 매장과 일본 인구의 절반인 6000만 명의 회원을 확보해 국민 브랜드로 불린다. 츠타야는 단순한 서점이 아니다. 창업 초기에는 서적과 음반, DVD 등을 대여하고 판매했지만 이후 각종 문구와 소품, 전자제품 등 다양한 생활용품을 취급해 범위를 확장했다. 이제는 라이프스타일까지 제안하는 ‘문화 기획사’ 츠타야. 여기에는 고객의 입장을 대변하기 위해 묵묵히 발로 뛴 츠타야의 지주회사 ‘컬처 컨비니언스 클럽(CCC)’ CEO 마스다 무네아키의 기획력이 있었다.

 

고객의 입장에서, 고객의 기분으로,고객이 원하는 매장을 만들다

 

1983년 오사카 히라가타 역에서 첫 개장한 츠타야는 마스다 무네아키의 관찰에서 시작됐다. 당시 히라가타 시에 음반 대여점이 없고,역 주변에도 밤늦게까지 영업하는 서점이 없다는 점에서 사업 아이템을 찾은 것이다. 대여업 운영 노하우는 없었지만 고객의 요구 사항을 매장에 반영하면 분명 성공할 것이라는 믿음은 있었다. 그렇게 서점과 음반 대여를 함께 하는 복합 매장 츠타야가 탄생했다.결과는 성공적이었다. 근처 고교생과 쇼핑객이 몰려들었고, 그 인기에 힘입어 이후 타 지역에 매장을 확장했다. 마스다의 기획은 ‘고객의 취향’을 파악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했다. 예를 들어 서점의 책을 카페에서 무료로 읽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반영해 북 카페를 만들었다. 고객에게 라이프스타일을 제안하기로 사업 방향을 정한

뒤에는 하나의 주제가 정해지면 그 주제에 관련된 제품을 인접한 곳에 진열했다. 요리책 진열대 주변에 요리 도구와 요리 프로그램 수강권을 진열하는 식이다. 고객을 대하는 마스다의 자세가 가장 잘 드러난 매장은 2011년 도쿄 다이칸야마에 개점한 복합 상업 공간 ‘티사이트(T-SITE)’다. 그는 60세 이상의 노인이 계속해서 증가하는 일본 사회를 꿰뚫어보고, 노인들의 주목을 끌 수 있는 공간을 기획했다. 먼저 노년층의 아침이 일찍 시작된다는 사실에 착안해 서점과 카페 오픈 시간을 아침 7시로 정했다. 노인들은 자가용 대신 택시를 자주 이용한다는 점을 생각해 택시 승강장도 만들었다. 이 외에도 뷰티와 반려동물에 관심이 많은 실버 세대 여성들을 위해 에스테틱 살롱과 동물병원을 건물에 입점시켰다. 서적도 건강과 종교, 철학, 여행 등 노년층의 관심사와 관련된 것들로 구비해서 고객의 만족감을 높였다. 츠타야가 단순한 서점을 넘어 음식, 주거, 패션 등 라이프스타일을 기획하고 제안하는

‘문화 기획사’로 불리게 된 것은 이때부터였다. 그는 고객의 입장에 서기 위해 같은 매장이라도 아침, 점심, 저녁에 둘러본다고 한다. 때로는 출근하는 회사원의 마음으로, 또 다른 때는 20대 여성의 마음으로 매장을 찾아 고객의 취향을 헤아렸다. 그들의 요구를 실현하면 고객은 스스로 찾아오기 마련이라는 것을 이미 알았기 때문이다.

 

실패는 성공의 자산, 절망은 희망의 거름

 

오사카 히라가타 역 앞에 위치한 츠타야 본점(위)과 티사이트 다이칸야마점(아래).

오사카 히라가타 역 앞에 위치한 츠타야 본점(위)과 티사이트 다이칸야마점(아래).

 

마스다 무네아키는 어릴 적 내성적이고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아이였다. 교통사고로 생긴 얼굴의 큰 흉터 때문에 초·중학교 시절 내내 집단 따돌림을 당하기도 했다. 거기다 부모님의 사업이 실패하면서 가세도 기울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마스다를 바라지하는 데에 여념이 없었다. 마스다는 그런 어머니를 위해서라도 돈을 많이 벌어야겠다는 야심을 품었다. 그때부터 그는 연약한 자신을 바꾸기 위해 고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레슬링부에 가입해 몸을 단련했다. 체력이 생기자 점점 자신감이 붙어 따돌림을 주도한 친구들에게 당당히 맞설 수 있었다. 이때 마스다는 ‘자기 의지로 주어진 환경을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패션 회사에 들어간 뒤에는 그 의지를 발판으로 배경지식이 전혀 없는 건축개발 분야에서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마스다는 회사를 그만둔 뒤 츠타야를 설립해 승승장구했지만 그렇다고 그가 손댄 모든 사업이 늘 성공했던 것은 아니다. 츠타야 2호점을 열었을 때는 1호점의 성공 방식에만 기대어 똑같은 전략을 사용했다가 실패만 맛보고 문을 닫았다. 미국의 다채널 위성방송을 도입한 ‘다이렉트 TV’ 사업에도 뛰어들었다가 끝내 철수하고 말았다. 당시에는 재산과 신용은 물론 사업 자신감까지 모두 잃었지만 마스다는 “모든 실패가 성공의 기반이 됐다”고 말한다. 무모한 도전으로 사원들의경험과 지식이 늘었고, 서툴러도 진지하게 임한 것이 회사의 재산이 됐다는 것이다. 능력 이상의 일에 도전하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다는 마스다 무네아키. 그는 오늘도 고객의 입장으로 거리를 걷는다.

 

커피 한 잔에 문화를 팝니다

스타벅스 CEO 하워드 슐츠

미국 시애틀에서 원두를 로스팅해 유통하던 작은 스타벅스를 세계 굴지의 커피 프랜차이즈 브랜드로 만들어낸 사람이 있다. 기호 식품에 불과했던 커피를 하나의 문화로 만든 인물, 스타벅스 CEO 하워드 슐츠다.

글 전정아·사진 위키미디어커먼즈

끝없는 모험과 도전으로 기회를 잡다

빈민가 출신이었던 하워드 슐츠는 어릴 때부터 주류 사회에 들어가고 싶어 대학 진학을 꿈꿨다. 슐츠는 전액 장학금을 지원받고 대학에 진학할 수 있는 방법으로 미식축구를 선택했고 특기생으로 노던미시간대학에 들어갈 수 있었다. 대학을 졸업한 뒤에는 복사기 판매업체인 ‘제록스’에서 영업사원으로 일하며 영업 능력을 쌓아 3년 뒤 ‘하마플라스트’라는 가정용품 업체에 부사장으로 스카우트됐다.

하워드 슐츠가 돌연 ‘커피’라는 새로운 사업에 뛰어든 계기는 바로 시애틀에 있는 원두커피 유통회사 스타벅스에서 우연히 마신 커피 한 잔 때문이었다. 그는 커피의 풍부하고 깊은 맛과 스타벅스 창립자들의 커피에 대한 지식과 열정에 반해 스타벅스 마케팅 책임자로 입사했다. 당시 스타벅스는 매장이 불과 4곳밖에 없던 작은 회사였다.

스타벅스에 입사하고 1년 뒤인 1983년, 슐츠는 이탈리아 밀라노 출장 중에 새로운 사업 아이템을 발견한다. 길가에 있는 바에 편히 앉아 에스프레소를 즐기는 이탈리아 사람들의 카페 문화를 미국에 들여오는 것이었다. 하지만 당시 스타벅스 경영진은 사업 규모를 키우고자 하는 슐츠의 의견에 반대했다. 결국 슐츠는 1985년 스타벅스에서 나와 자신만의 커피 프랜차이즈 사업을 시작하기로 결심한다.그는 영업사원 시절의 경험을 살려 242명의 투자자들을 만나 자금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미국 최초로 에스프레소 바 ‘일지오날레’를 열었다.

일 지오날레의 세 번째 매장을 캐나다 밴쿠버에 오픈한 직후, 하워드 슐츠의 귀에 스타벅스 경영진이 스타벅스 브랜드를 팔 거라는소문이 들렸다. 슐츠는 지금이 아니면 스타벅스를 인수하지 못할 거라고 판단했다. 결국 그는 다시 투자자를 물색해 380만달러의 자금을 유치했고 1987년, 스타벅스의 CEO가 된다.

직원의 행복이 우선인 기업

스타벅스가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직원을 중시하는 슐츠 회장의 경영 철학 덕분이다. 스타벅스는 모든 직원을 ‘종업원(Employee)’이 아닌 ‘파트너(Partner)’라고 부른다. 경영진이 직원들을 동반자로 대우해야 직원들 역시 고객 서비스에 최선을 다하는 선순환이이 뤄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특히 스타벅스는 차별화된 직원 복지를 펼치고 있다. 시간제 직원을 포함한 전 직원이 회사로부터 의료보험 혜택을 받는다. 뿐만 아니라 미국 본사 직원에게는 스톡옵션 (기업이 임직원에게 일정 수량의 자기 회사 주식을 일정한 가격으로 매수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는 제도)을 부여하고, 학업에 뜻이 있는 직원에게는 학비도 제공한다. 한국 스타벅스는 한발 더 나아가 전 직원을 정규직으로 채용하는 게 원칙이다. 여느 커피 브랜드 기업의 이직률은 연간 평균 150~400%에 달하지만 스타벅스는60~70% 수준이다. 이렇듯 기업 문화가 만든 직원들의 강한 충성도는 스타벅스의 또 다른 경쟁력이다.

눈앞의 이익이 아닌 미래를 보는 넓은 안목

지난 2000년 슐츠는 커피에 대한 열정이 예전과 같지 않다는 이유로 CEO 자리에서 물러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슐츠가 물러나자마자 스타벅스에는 큰 위기가 닥쳤다. 방문 고객 증가율이 사상 최저치로 떨어졌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금융 위기까지 맞물려 주가는 반 토막 났다.

회사가 추락하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던 슐츠는 8년만에 경영 일선으로 복귀했다. 슐츠는 ‘파트너와 커피, 고객과 함께하는 가치를 실행한다’는 스타벅스의 핵심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600여 개의 매장을 폐쇄하고 전 직원의 재교육을 실시했다. 약 600만 달러(70억 원)의 피해를 감수한 결정이었다. 이에 그치지 않고 1만여 명의 매장 관리자들을 뉴올리언스로 불러 모아 리더십 재점검 콘퍼런스를 열어 스타벅스가 다시 지역사회 일원으로서 충실하겠다는의지를 보였다. 슐츠가 복귀한 지 2년 만인 2010년, 스타벅스는 11조원이라는 사상 최대의 매출을 기록하며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

슐츠는 올 4월 CEO 자리에서 또다시 물러나기로 했다. 그의 두 번째 퇴임인 것이다. 이후에는 스타벅스 커피를 고급화한 매장 ‘스타벅스 리저브 로스터리 앤드 테이스팅 룸’을 강화하는 데 전념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스타벅스의 고급화 전략에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지만 슐츠가 10년 이상을 구상하여 꾸민 시애틀 매장에 대한찬사가 대단하다. 커피를 향한 그의 끝없는 열정과 도전이 또 어떤새로운 커피 문화를 탄생시킬지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