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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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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전정아 ● 사진 위키미디어커먼즈

액션캠은 수영, 자전거, 카레이싱 등 아웃도어 활동을 할 때 옷이나 헬멧, 운동기기에 부착해서 영상을 촬영하는 미니 캠코더를 말한다. 액션캠으로 찍으면 카메라 앵글이 촬영자 시점과 함께 움직이기 때문에 시청자가 직접 익스트림 스포츠를 체험하는 것처럼 생생하게 영상을 감상할 수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현재는 샤오미 등 많은 회사가 액션캠을 제조하고 있지만 그전에는 ‘고프로(GoPro)’라는 브랜드의 ‘히어로(Hero)’가 액션캠의 대명사로 불렸다. 히어로 출시 이후1시간당 1000대가 팔리고, 매년 2배 이상의 판매를 기록할 만큼 기염을 토한 고프로. 그 성공 비결은 무엇일까?

 

열정을 따라가니 성공이 따라오다

 

액션캠 브랜드 고프로의 CEO 닉 우드먼은 고등학교 재학 시절, 서핑의 매력에 푹 빠졌다. 커다란 파도를 넘는 짜릿한 쾌감이 좋았다. 그는 다른 취미 없이 오로지 서핑에만 몰두했다. 캘리포니아 주립대샌디에이고 캠퍼스에 진학한 것도 미국에서 가장 서핑을 즐기기 좋은 지역인 샌디에이고에서 생활하기 위해서였다. 두 차례나 사업에 실패했던 우드먼에게 재기의 기회를 준 것도 서핑이었다. 그는 재충전을 하기 위해 호주와 인도네시아로 서핑 여행을 떠났다. 우드먼은 자신이 서핑하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고 싶었다. 그래서 고무 밴드로 35mm 카메라를 손바닥에 고정시켜 촬영했지만 마음에 드는 장면을 담는 것이 쉽지 않았다. 너무 무거운 데다 초점을 잡기가 어려웠다. 우드먼은 불편함을 최소화하는 과정에서 아예 브랜드를 만들어 창업하기로 마음먹었다.

여행에서 돌아온 우드먼은 부모님에게 빌린 자금과 틈틈이 모은 돈으로 사업을 위한 아이템 준비에 들어갔다. 그는 가장 먼저 카메라를 연결하는 벨트를 만들 작정이었다. 하지만 카메라 자체가 너무 크고 무겁다는 사실을 깨닫고 더 작고 가벼운, ‘입을 수 있는’ 카메라를 만드는 것으로 아이템을 선회했다.

고프로가 시장에 출시한 첫 카메라는 필름을 사용한 아날로그 카메라였지만 점차 와이파이를 사용하고, 저장 공간까지 확보된 원격조종 방수 카메라로 진화해갔다. 판매고는 매년 두 배씩 증가했다. 특히 2009년 출시한 대표 모델 ‘히어로 HD’는 스마트폰 카메라를 사용하는 데 익숙한 소비자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어안렌즈를 사용해서 170도 각도의 넓은 화면을 촬영할 수 있으면서 초점까지 잘 맞췄다. 게다가 풀 HD 해상도의 영상도 담아냈다. 폭발적인 판매에 힘입어 우드먼은 2013년 미국의 억만장자 중 가장 어린 자수성가형 창업자로 이름을 올리게 됐다.

 

실패에 대한 공포를 성공을 향한 절실함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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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고프로의 신제품 ‘히어로 6’는 기존 액션캠에 비해 두 배 더 많은 프레임을 녹화할 수 있어서 빠른 움직임을 부드럽게 담아낼 수 있다.(위)  ② 고프로의 ‘히어로 3’로 촬영한닉 우드먼이 서핑하는 모습.(아래)

 

고프로를 창업하기 전, 닉 우드먼은 이미 두 번의 사업에 실패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시작한 첫 번째 회사는 2달러 이하의 전자제품을 판매하는 ‘임파워올닷컴’이었다. 하지만 창업 자금 부족과 유통망 확보를 못해서 제대로 시작하기도 전에 문을 닫았다. 두 번째로 차린 게임 및 마케팅 플랫폼 ‘펀버그’ 역시 닷컴 버블(1995년부터 2000년에 걸친 인터넷 관련 분야의 거품경제 현상)이 붕괴하자 이용자가 급감해 결국 서비스를 중단했다. 그래서 더 신중하고 완벽하게 세 번째 창업을 준비했다.

우드먼은 먼저 개인 생활은 모두 포기하고 하루 종일 시제품을 만드는 데 시간을 보냈다. 제품 기본 설계에 몰두한 나머지 몇 시간 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은 적이 부지기수다. 게다가 그는 CAD(Computer Aided Design, 컴퓨터 자동설계 프로그램)를 다룰 줄몰라 제품 샘플을 직접 손으로 만들었다. 중국 공장에서 만든 시제품이 기준에 맞지 않으면 자신이 납득할 수 있는 품질이 될 때까지 몇번이고 반품을 거듭했다. 창업한 후에도 한동안 운송부터 영업, 제품디자인, 고객 지원까지 우드먼 혼자 도맡았다. 심지어 물을 마시러 부엌으로 가는 시간까지 줄이려고 물통을 넣어두는 가방을 따로 마련했다고 한다.

우드먼은 “고프로가 이전의 사업처럼 실패하거나 공중분해될까 봐 너무나 두려웠다”고 회고했다. “또다시 실패했다면 세상을 등졌을것”이라고도 털어놓았다. 하루 18~20시간씩 4년간 쉬지 않고 일한 배경에는 실패하면 더 이상 돌아갈 곳이 없다는 공포가 있었던 셈이다. 취미에서 시작한 사업 아이디어였던 고프로, 하지만 이를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시킨 데에는 창업가의 고통과 노력이 있었음을 닉 우드먼이 증명하고 있다.

고객의 취향입니다

존중해주세요

츠타야 서점 CEO 마스다 무네아키

글 전정아 ● 사진 위키미디어커먼즈, T-SITE 공식 홈페이지

 

일본의 최대 서점 ‘츠타야’는 전국에 1500곳이 넘는 매장과 일본 인구의 절반인 6000만 명의 회원을 확보해 국민 브랜드로 불린다. 츠타야는 단순한 서점이 아니다. 창업 초기에는 서적과 음반, DVD 등을 대여하고 판매했지만 이후 각종 문구와 소품, 전자제품 등 다양한 생활용품을 취급해 범위를 확장했다. 이제는 라이프스타일까지 제안하는 ‘문화 기획사’ 츠타야. 여기에는 고객의 입장을 대변하기 위해 묵묵히 발로 뛴 츠타야의 지주회사 ‘컬처 컨비니언스 클럽(CCC)’ CEO 마스다 무네아키의 기획력이 있었다.

 

고객의 입장에서, 고객의 기분으로,고객이 원하는 매장을 만들다

 

1983년 오사카 히라가타 역에서 첫 개장한 츠타야는 마스다 무네아키의 관찰에서 시작됐다. 당시 히라가타 시에 음반 대여점이 없고,역 주변에도 밤늦게까지 영업하는 서점이 없다는 점에서 사업 아이템을 찾은 것이다. 대여업 운영 노하우는 없었지만 고객의 요구 사항을 매장에 반영하면 분명 성공할 것이라는 믿음은 있었다. 그렇게 서점과 음반 대여를 함께 하는 복합 매장 츠타야가 탄생했다.결과는 성공적이었다. 근처 고교생과 쇼핑객이 몰려들었고, 그 인기에 힘입어 이후 타 지역에 매장을 확장했다. 마스다의 기획은 ‘고객의 취향’을 파악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했다. 예를 들어 서점의 책을 카페에서 무료로 읽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반영해 북 카페를 만들었다. 고객에게 라이프스타일을 제안하기로 사업 방향을 정한

뒤에는 하나의 주제가 정해지면 그 주제에 관련된 제품을 인접한 곳에 진열했다. 요리책 진열대 주변에 요리 도구와 요리 프로그램 수강권을 진열하는 식이다. 고객을 대하는 마스다의 자세가 가장 잘 드러난 매장은 2011년 도쿄 다이칸야마에 개점한 복합 상업 공간 ‘티사이트(T-SITE)’다. 그는 60세 이상의 노인이 계속해서 증가하는 일본 사회를 꿰뚫어보고, 노인들의 주목을 끌 수 있는 공간을 기획했다. 먼저 노년층의 아침이 일찍 시작된다는 사실에 착안해 서점과 카페 오픈 시간을 아침 7시로 정했다. 노인들은 자가용 대신 택시를 자주 이용한다는 점을 생각해 택시 승강장도 만들었다. 이 외에도 뷰티와 반려동물에 관심이 많은 실버 세대 여성들을 위해 에스테틱 살롱과 동물병원을 건물에 입점시켰다. 서적도 건강과 종교, 철학, 여행 등 노년층의 관심사와 관련된 것들로 구비해서 고객의 만족감을 높였다. 츠타야가 단순한 서점을 넘어 음식, 주거, 패션 등 라이프스타일을 기획하고 제안하는

‘문화 기획사’로 불리게 된 것은 이때부터였다. 그는 고객의 입장에 서기 위해 같은 매장이라도 아침, 점심, 저녁에 둘러본다고 한다. 때로는 출근하는 회사원의 마음으로, 또 다른 때는 20대 여성의 마음으로 매장을 찾아 고객의 취향을 헤아렸다. 그들의 요구를 실현하면 고객은 스스로 찾아오기 마련이라는 것을 이미 알았기 때문이다.

 

실패는 성공의 자산, 절망은 희망의 거름

 

오사카 히라가타 역 앞에 위치한 츠타야 본점(위)과 티사이트 다이칸야마점(아래).

오사카 히라가타 역 앞에 위치한 츠타야 본점(위)과 티사이트 다이칸야마점(아래).

 

마스다 무네아키는 어릴 적 내성적이고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아이였다. 교통사고로 생긴 얼굴의 큰 흉터 때문에 초·중학교 시절 내내 집단 따돌림을 당하기도 했다. 거기다 부모님의 사업이 실패하면서 가세도 기울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마스다를 바라지하는 데에 여념이 없었다. 마스다는 그런 어머니를 위해서라도 돈을 많이 벌어야겠다는 야심을 품었다. 그때부터 그는 연약한 자신을 바꾸기 위해 고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레슬링부에 가입해 몸을 단련했다. 체력이 생기자 점점 자신감이 붙어 따돌림을 주도한 친구들에게 당당히 맞설 수 있었다. 이때 마스다는 ‘자기 의지로 주어진 환경을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패션 회사에 들어간 뒤에는 그 의지를 발판으로 배경지식이 전혀 없는 건축개발 분야에서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마스다는 회사를 그만둔 뒤 츠타야를 설립해 승승장구했지만 그렇다고 그가 손댄 모든 사업이 늘 성공했던 것은 아니다. 츠타야 2호점을 열었을 때는 1호점의 성공 방식에만 기대어 똑같은 전략을 사용했다가 실패만 맛보고 문을 닫았다. 미국의 다채널 위성방송을 도입한 ‘다이렉트 TV’ 사업에도 뛰어들었다가 끝내 철수하고 말았다. 당시에는 재산과 신용은 물론 사업 자신감까지 모두 잃었지만 마스다는 “모든 실패가 성공의 기반이 됐다”고 말한다. 무모한 도전으로 사원들의경험과 지식이 늘었고, 서툴러도 진지하게 임한 것이 회사의 재산이 됐다는 것이다. 능력 이상의 일에 도전하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다는 마스다 무네아키. 그는 오늘도 고객의 입장으로 거리를 걷는다.

 

커피 한 잔에 문화를 팝니다

스타벅스 CEO 하워드 슐츠

미국 시애틀에서 원두를 로스팅해 유통하던 작은 스타벅스를 세계 굴지의 커피 프랜차이즈 브랜드로 만들어낸 사람이 있다. 기호 식품에 불과했던 커피를 하나의 문화로 만든 인물, 스타벅스 CEO 하워드 슐츠다.

글 전정아·사진 위키미디어커먼즈

끝없는 모험과 도전으로 기회를 잡다

빈민가 출신이었던 하워드 슐츠는 어릴 때부터 주류 사회에 들어가고 싶어 대학 진학을 꿈꿨다. 슐츠는 전액 장학금을 지원받고 대학에 진학할 수 있는 방법으로 미식축구를 선택했고 특기생으로 노던미시간대학에 들어갈 수 있었다. 대학을 졸업한 뒤에는 복사기 판매업체인 ‘제록스’에서 영업사원으로 일하며 영업 능력을 쌓아 3년 뒤 ‘하마플라스트’라는 가정용품 업체에 부사장으로 스카우트됐다.

하워드 슐츠가 돌연 ‘커피’라는 새로운 사업에 뛰어든 계기는 바로 시애틀에 있는 원두커피 유통회사 스타벅스에서 우연히 마신 커피 한 잔 때문이었다. 그는 커피의 풍부하고 깊은 맛과 스타벅스 창립자들의 커피에 대한 지식과 열정에 반해 스타벅스 마케팅 책임자로 입사했다. 당시 스타벅스는 매장이 불과 4곳밖에 없던 작은 회사였다.

스타벅스에 입사하고 1년 뒤인 1983년, 슐츠는 이탈리아 밀라노 출장 중에 새로운 사업 아이템을 발견한다. 길가에 있는 바에 편히 앉아 에스프레소를 즐기는 이탈리아 사람들의 카페 문화를 미국에 들여오는 것이었다. 하지만 당시 스타벅스 경영진은 사업 규모를 키우고자 하는 슐츠의 의견에 반대했다. 결국 슐츠는 1985년 스타벅스에서 나와 자신만의 커피 프랜차이즈 사업을 시작하기로 결심한다.그는 영업사원 시절의 경험을 살려 242명의 투자자들을 만나 자금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미국 최초로 에스프레소 바 ‘일지오날레’를 열었다.

일 지오날레의 세 번째 매장을 캐나다 밴쿠버에 오픈한 직후, 하워드 슐츠의 귀에 스타벅스 경영진이 스타벅스 브랜드를 팔 거라는소문이 들렸다. 슐츠는 지금이 아니면 스타벅스를 인수하지 못할 거라고 판단했다. 결국 그는 다시 투자자를 물색해 380만달러의 자금을 유치했고 1987년, 스타벅스의 CEO가 된다.

직원의 행복이 우선인 기업

스타벅스가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직원을 중시하는 슐츠 회장의 경영 철학 덕분이다. 스타벅스는 모든 직원을 ‘종업원(Employee)’이 아닌 ‘파트너(Partner)’라고 부른다. 경영진이 직원들을 동반자로 대우해야 직원들 역시 고객 서비스에 최선을 다하는 선순환이이 뤄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특히 스타벅스는 차별화된 직원 복지를 펼치고 있다. 시간제 직원을 포함한 전 직원이 회사로부터 의료보험 혜택을 받는다. 뿐만 아니라 미국 본사 직원에게는 스톡옵션 (기업이 임직원에게 일정 수량의 자기 회사 주식을 일정한 가격으로 매수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는 제도)을 부여하고, 학업에 뜻이 있는 직원에게는 학비도 제공한다. 한국 스타벅스는 한발 더 나아가 전 직원을 정규직으로 채용하는 게 원칙이다. 여느 커피 브랜드 기업의 이직률은 연간 평균 150~400%에 달하지만 스타벅스는60~70% 수준이다. 이렇듯 기업 문화가 만든 직원들의 강한 충성도는 스타벅스의 또 다른 경쟁력이다.

눈앞의 이익이 아닌 미래를 보는 넓은 안목

지난 2000년 슐츠는 커피에 대한 열정이 예전과 같지 않다는 이유로 CEO 자리에서 물러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슐츠가 물러나자마자 스타벅스에는 큰 위기가 닥쳤다. 방문 고객 증가율이 사상 최저치로 떨어졌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금융 위기까지 맞물려 주가는 반 토막 났다.

회사가 추락하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던 슐츠는 8년만에 경영 일선으로 복귀했다. 슐츠는 ‘파트너와 커피, 고객과 함께하는 가치를 실행한다’는 스타벅스의 핵심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600여 개의 매장을 폐쇄하고 전 직원의 재교육을 실시했다. 약 600만 달러(70억 원)의 피해를 감수한 결정이었다. 이에 그치지 않고 1만여 명의 매장 관리자들을 뉴올리언스로 불러 모아 리더십 재점검 콘퍼런스를 열어 스타벅스가 다시 지역사회 일원으로서 충실하겠다는의지를 보였다. 슐츠가 복귀한 지 2년 만인 2010년, 스타벅스는 11조원이라는 사상 최대의 매출을 기록하며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

슐츠는 올 4월 CEO 자리에서 또다시 물러나기로 했다. 그의 두 번째 퇴임인 것이다. 이후에는 스타벅스 커피를 고급화한 매장 ‘스타벅스 리저브 로스터리 앤드 테이스팅 룸’을 강화하는 데 전념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스타벅스의 고급화 전략에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지만 슐츠가 10년 이상을 구상하여 꾸민 시애틀 매장에 대한찬사가 대단하다. 커피를 향한 그의 끝없는 열정과 도전이 또 어떤새로운 커피 문화를 탄생시킬지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