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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고싶었어요

글 전정아 ● 사진 최성열, 정제희

어린 시절 환상을 좇아 꿈의 나라이란으로!

 

한 온라인 콘텐츠를 통해 여자 이란어 통번역가로서 이름을 알렸다. 그런데 의외로 알려진 게 많지 않다.

그동안 인터뷰를 거절해왔다. ‘나를 왜 인터뷰하지’라는 생각이 컸기 때문이다. 내 이야기가 읽는 사람, 듣는 사람에게 도움이 될까 의아했다. 무엇보다 딱히 나를 특이한 케이스라고 여긴 적도 없고. 그러다 모교,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진로 탐색을 주제로 한 강연에 초청받은 적이 있다. 강연을 한 뒤 내 후배들, 어린 친구들에게 큰 도움이 됐다는 연락을 받고서 생각이 달라졌다. 다들 외국과 외국어를 좋아하는 열정 넘치고 똑똑한 친구들인데 그 열정을 어디에 쏟을지 방법을 몰랐던 모양이다. 그러다 내 강연을 듣고 정해진 길, 그러니까 무역회사 입사나 외교관이 되는 것 이외의 진로가 보였다는 의견이 많았다. 지금은 취지가 좋은 인터뷰나 대외 행사에는 조금씩 응하고 있다.

 

애니메이션 영화 <알라딘>을 보고 중동 문화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들었다. 어린 시절 정제희는 중동 문화의 어떤 점에 마음을 뺏겼나?

아버지가 외항선을 타고 해외, 특히 중동을 자주 다니셨기 때문에 가져오는 기념품들이 남달랐다. 히잡부터 대추야자까지, 남들보다 중동 문화를 훨씬 빨리 접했다. 기념품 상자 뒷면의 아랍어를 보면서 막연하게 ‘중동은 신비롭고 환상적인 나라구나’라고 생각했다. <알라딘>의 주인공인 ‘자스민 공주’도 중동에 대한 호감을 갖는 데에일조했다. 드레스를 입은 여느 디즈니 공주들과는 달리 자스민은 배꼽이 드러나는 상의에 통 넓은 바지를 입고 있다. 그 패션이 멋져 보였다.(웃음)

 

해외를 오가는 직업에 대한 선망은 어릴 때부터 가졌나?

다리 수술을 받은 경험이 더 확실한 계기가 됐다. 초등학교 4학년때 큰 수술을 치르고 치료와 요양을 목적으로 거의 1년을 꼬박 갇혀 지냈다. 학교도 못 가고 뛰어놀지도 못했다. 거기다 완치가 안 되는병이라 부모님의 걱정으로 인한 과잉보호까지. 나에게 좁은 병실, 좁은 집을 벗어날 수 있는 탈출구는 책과 다큐멘터리 영상뿐이었다. 그때부터 적극적이고 자유로운 것, 머나먼 해외에 대한 환상이 생겼다. 그러고 보면 중동 중에서도 이란은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나라다.

 

왜 이란어를 선택했나?

사람은 결국 자기 안에 있는 경험을 탐색하고, 그 경험을 토대로 선택하는 것 같다. 고등학교 3학년 때까지도 터키어와 아랍어, 이란어사이에서 뭘 전공할지 고민을 많이 했다. 그런데 내가 뭘 좋아하는지 깊이 생각해보니 어린 시절 나를 매혹시킨 <천일야화>의 배경인 페르시아·이란 지역이 가장 마음에 남더라. 우리나라에서 이란어를 배울 수 있는 곳은 한국외국어대학교밖에 없어서 한국외대 이란어학과를 선택했다.

 

적성에 맞는 전공을 선택했으니 정말 열심히 공부했겠다.

그렇지도 않았다. 막상 입학하니 나만큼 이란어 자체에 열의를 가진 사람이 별로 없었다. 아랍어만 해도 수능시험 제2외국어 영역으로 있지 않나. 그런데 이란어는 나라의 위상 때문인지 특수어 중에서도 특수어다. 이란어학과 학생들은 미리부터 전과를 준비하거나 경영 학이나 경제학을 공부해 회사에 입사하려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나마저 편입 생각이 들 만큼 침체된 학과 분위기가 처음에는 적응하기 힘들었다. 학점은 당연히 좋지 않았고, 많이 방황했다. 2년은 그냥 놀았다.(웃음)

 

그래도 10여 년 전이면 취업하기 어렵지 않았을 것 같은데.

졸업하는 해, 그러니까 2008, 2009년부터 취업난이 심해졌다. 그제야 마음이 조급해져 남들이 하는 건 다 해봤다. 학과 공부도 열심히 했다. 맨 뒷자리에서 강의를 듣던 학생이 교수님 바로 앞자리에서 공부하게 된 거다. 그리고 대기업 취업, 은행 입사, 아나운서 준비까지…. 이란어 전공자를 선발하는 해외 영업직에는 몇 군데나 지원했지만 전부 떨어졌다. 중동 지역 부서는 여성 지원자를 잘 뽑지않아서였다. 그래도 졸업 후 3개월간 직장 생활을 하기는 했지만 얼마 못 버티고 그만뒀다. 그리고 바로 이란으로 어학연수를 떠났다.

 

고민하고 방황한 시간이 아깝지는 않았나?

그 시간이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 내가 좋아하는 일이 뭔지 확신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거니까.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마음에 남아 있었다면 내 결정에 자꾸만 변명거리를 던져줬을 것이다. 그렇다고 무작정 좋아하는 것을 향해 내달렸다면 아주 지쳤을 테고. 무엇보다 이 일을 시작한 지 7년 차에 접어들지만 여전히 업계에서는 어린 나이에 속하는 편이다.

 

취업 시장에서 이란어 전공 여성이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다면 완전히 다른 분야를 선택할 수도 있었을 텐데.

어쩌나, 그래도 여전히 이란이라는 나라가 좋은데.

 

그래서 실제로 가본 이란은 어땠나?

난 ‘진짜’ 이란어, ‘진짜’ 이란을 제대로 알고 싶었다. 그런데 막상 이란에 가보니 이란인들이 한국에서 배운 이란어와 너무 다른 말을 사용하는 거다. 언어를 배운다는 건 언어를 학문적으로 연구하거나 언어의 기술을 익히거나, 둘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난 언어의 기술을배우고 싶었고, 이란인 사이에 섞여 들어가고 싶었다. 그래서 어학연수를 마친 뒤 테헤란 대학교에서 석사학위 과정까지 밟았다. 그렇게 이란에서 총 5년을 지냈다. 테헤란대에서는 국제관계학과를 전공했다. 우리나라 대학의 정치외교학과와 비슷한 학문이다. 원래는 ‘이슬람 여성학(Islamic Feminism, 이슬람 문화에서 발달된 남녀의차이에 기반을 둔 여성학)을 공부하고 싶었는데 외국인 학생은 받지 않더라.

 

독기와 오기를 나만의 무기로

 

탁월한 이란어 실력뿐만 아니라 이란의 문화 자체를 이해한 통번역가로도 유명하다. 이란의 문화는 막연히 우리나라와 다를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맞나?

틀렸다.(웃음) 이란은 지역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동양과 서양의 중간 지점이다. 쉽게 말하면 하드웨어는 백인, 아리아인의 모습인데 소프트웨어, 즉 사고방식은 동양인에 가깝다. 우리나라 1980~90년대 사회 분위기라고 하면 될 것 같다. 보수적이고 가족 중심적인 사회에 무슬림 문화가 조금 섞인 느낌이라고 할까. 그래서 이란인들이 한국의 전통문화를 좋아한다. 예를 들어 노인 공경이나 예의범절을 중요하게 여기는 풍습 말이다. 그리고 매일 더울 것 같지만 우리 나라처럼 사계절이 있다.

 

이슬람 국가여서 굉장히 보수적이고 성차별이 심할 줄 알았는데.

그게 바로 편견이다. 이란 사람들은 참 다정하다. 물론 동양인에 대한 신기함과 궁금함에서 오는 지나친 관심과 무차별적인 폭언, 성차별도 겪기는 했다. 기본적으로 이슬람 국가는 남녀의 지위가 다른 나라다. 여성을 보호 대상, 남성의 소유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대다수니까.

 

5년간 이란에서 살면서 실생활 이란어를 익혔을 텐데, 언어를 배우는 자신만의 비법이 있나?

대학 과정에서 읽기는 어느 정도 익혔기 때문에 말하기와 듣기 실력을 높이는 데 가장 힘썼다. 이란어는 문어와 구어가 다르다. 존댓말도 따로 있다. 그래서 매일 5시간 이상 이란 방송과 읽을거리를 챙겨 봤다. 방송은 드라마와 뉴스를 반반씩, 읽을거리는 시사 잡지부터 소설까지 닥치는 대로 읽었다. 그리고 난 현지인의 억양까지 배우고 싶어서 이란인 가족 집에서 3년간 홈스테이를 했다. 할머니부터 내 또래 손자까지 함께 사는 대가족이었다. 학교와 편도로 1시간 30분 거리에 있는 집이었지만, 전 연령층의 이란어를 들을 수 있어서 큰 도움이 됐다. 기숙사 생활이나 자취, 가끔 만나는 현지인 친구로는 절대로 원어민만큼 언어를 습득할 수 없다. 실력이 늘수록 보이고 들리는 게 달라지니 신나더라.

 

이렇게 들으면 순탄하게 타지 생활을 한 것 같다. 어려운 순간은 없었나?

왜 없었겠나. 일단 대기오염도 심하고 교통이 몹시 불편해서 어딜가든 두 시간은 걸린다. 영화, 쇼핑, 술 등 스트레스를 풀 만한 ‘엔터테인먼트’도 없었다. 놀 거리가 없어서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지니 생각도 깊어지고, 성격도 내향적으로 바뀌었다. 처음에는 낯선 곳에서 공부하고 지적 호기심을 채우는 시간이 그저 즐겁고 재밌었지만 나중에는 만나는 사람들마저 비슷해서 자연히 우울해지더라. 게다가 이란 정부와 대학의 텃세도 심했고.

 

정부와 대학의 텃세라니?

오랫동안 비자를 못 받았다.(웃음) 대학에도 학생으로 등록은 돼 있는데 학생증 발급을 안 해줬다. 어떤 수업에서는 교수가 “넌 우리 학교 학생이 아니니 나가라”고도 했다. 그렇게 학교와 싸우고, 신분을 증명해줄 학생증이 없으니 경찰과도 싸우고, 비자가 없으니 공항에서 싸우고. 정말 다툼의 연속이었다. 더 화가 나는 건 푸대접을 받는 명확한 이유가 없다는 거였다. 진짜 힘들었다. ‘왜 나한테만 이런 일이 생기지’라는 생각을 참 많이 했다. 결국 전부 포기하고 한국으로 들어오려고 짐을 싸기도 했다. 이 악물고 버틸 수 있었던 데에는 홈스테이했던 집의 이란인 가족들의 힘이 컸다. 이란 아빠, 이란 엄마라고 부를 정도로 친밀하게 지냈다. 벌써 1년 넘게 이란 가족들을 못 봤지만 지금도 거의 매일 통화한다.

 

※ ‘이란아토즈’ 정제희 CEO의 인터뷰 전문은 <MODU> 9월 67호 지면에서 확인 가능합니다.

페미니즘에 대한 가장 흔한 편견은 여성 우월주의를 주도한다는 시선일 것이다. 편견을 거두기 위해서는 자세히 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남학생들과 매일 만나는 최승범 선생님은 페미니즘에 대해 편견이있거나 여성이 쓴 페미니즘 책은 읽고 싶지 않다는 10~30대 남성을 위해 페미니즘 책을 썼다. 크라우드 펀딩으로 시작된 책은 벌써 3쇄를 찍었다. 책에서 저자는 남자니까, 잘모르기 때문에 페미니즘을 더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페미니즘을 통해 자유를 얻었다고 덧붙인다. 어머니와 아내, 그리고 두 달 전에 태어난 딸과 함께 존엄한 개인으로 살아가기 위해 오늘도 고군분투하는 최승범 선생님을 만났다.

 

페미니즘을 만나고 자유를 경험하다

 

<저는 남자고, 페미니스트입니다>3(521일 기준)를 찍었어요. 주변 반응은 어떤가요?

 

예상보다 판매량이 높아서 놀랐어요. 책을 구입하는 주 독자층이 20대 여성이라고 들었는데 남자친구나 남동생, 오빠에게 주고 싶어서 샀다고 하더라고요. 여성이 쓴 페미니즘 책은 읽지 않으려 해서 남성 저자의 책을 선물한다는데, 여성의 현실이 그만큼 절박하다는게 느껴졌어요. 현재는 미투 운동을 계기로 새로운 남성성을 고민하는 목소리가 높아진 시기라, 처음 쓸 때도 10~30대 남성을 예상 독자로 선정하고 진행하긴 했어요. 이 책은 아내와 함께 썼다고 생각해요. 아내는 평소에도 제게 고민거리나 글감을 주는 친구이자 동지거든요. 최초의 독자가 되어 피드백을 주기도 했고요. 그리고 어머니 삶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다 보니 아버지가 나쁜 사람처럼 그려졌는데, 죄송스러운 마음이 있어요. 우리 아버지 정도면 그 나이대에서는 훌륭한 남편이긴 하거든요. 동료 교사들의 반응은 세대에 따라 조금 다른데, 젊은 선생님들은 응원해주는 편이에요.

 

책을 통해 공개적으로 페미니스트라고 밝힌 건데, 책을 쓰기 전과 후 달라진 점이 있나요?

 

공론장에 제 주장과 이야기를 던졌으니 더 조심하고 성찰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말과 글과 삶이 불일치하는 사람을 싫어하는데, 제가 그런 사람이 되면 안 되니까요. 한국에서 남자로 살면서 실수하고 실언하는 일은 너무 쉽게 일어나요.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아야죠. 인터뷰나 강연 요청도 많이 들어오고 다음 책을 내자고 제안하는 출판사도 있지만, 대부분 고사하고 있어요. 페미니즘은 여성인권 운동인데, 제 목소리가 너무 커지면 안 되니까요. 그렇지 않아도 남자 쪽으로 기울어진 사회인데 페미니즘에서까지 남성의 발화권력이 커지는 건 온당하지 못하다고 생각해요.

 

페미니즘 이야기를 공개적으로 꺼내는 분들이 공통적으로 겪는 일 같은데, 페미니즘에 대한 거부감 때문에 이야기를 꺼낸 당사자에게 모욕적인 말을 퍼붓는 일이 있더라고요. 선생님은 어떤가요?

 

저도 여러 차례 있었습니다. 언론사 인터뷰를 하거나 외부에 글을 기고하면 예외 없이 학교에 민원이 들어와요. 학교가 난색을 표하는 것도 이해가 가요. 소명서는 제가 쓴다고 해도 장학사 응대나 외부항의 전화는 결국 교장·교감 선생님의 몫이니까요. 아마 대부분의 학교나 교사가 변화를 반가워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학교는 워낙 보수적인 면이 있는 조직이니까요.

 

책에서 페미니즘은 남자에게도 이롭다고 이야기했어요. 선생님이 겪은 가장 좋은 점 한 가지만 꼽아주세요.

 

사람 관계 안에서 더 자유로워졌어요. 아주 오래전부터 남자 집단에서 어떤 불편함을 느꼈어요. 이른바 ‘센 척’이나 ‘있는 척’하는 사람들이 싫었죠. 꼭 한마디 꼬집어서 이야기해야 속 시원하기도 했고요. 그래서 남자 집단에서 적응하기가 어려웠는데, 한때는 이런 내가 이상한 사람이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어요. 페미니즘을 공부하면서 ‘식민지 남성성(한국 남성의 위치는 한국 여성과의 관계에서가 아니라 미국, 일본 등의 남성과의 관계에서 설정된다는 시각으로, 여성의 역할을 남성이 글로벌 경쟁의 우위에 설 수 있도록 돕는 존재로 생각하는 시각)’ 개념을 알게 됐는데, 한국 사례에 꼭 맞는 거예요. 상대적으로 약하다고 생각하는 대상을 무시하거나 혐오하는 문화의 원인을 근본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어요. 그 뒤부터 마음이 편해졌어요. 원하는 대로 살아도 된다는 걸 깨달았죠.

 

현재 페미니즘 공부는 어떻게 하고 있나요?

 

페미니즘을 처음 접한 뒤에 여성학·평화학 연구자인 정희진 선생님께 정말 많은 영향을 받았어요. <페미니즘의 도전>은 제 인생 책이기도 하고요. 그 외의 다른 저서들과 언론 기고문도 전부 읽었어요. 마음속 스승이라고 생각하고 제 지식과 경험으로 판단하기 어려운 페미니즘 이슈가 터지면 정희진 선생님께서 쓰신 글을 찾아 봐요. 올해 초까지는 책과 영화, 독서 모임을 꾸준히 했는데 두 달 전에 아이가 태어난 뒤로는 시간이 없어서 가끔 책을 읽거나 SNS를 통해페미니스트 필진의 글을 읽고 있어요. 페미니즘에 관심이 간다면 권김현영, 이나영, 이현재, 손희정, 김홍미리, 김고연주 님의 글을 읽어보라고 추천하고 싶어요.

아주 작은 것부터 천천히

최승범 선생님이 페미니즘에 관심이 있는 학생들에게 나누어준 핀버튼 배지. <최승범 선생님 제공>

 

페미니즘의 시선으로 교과서를 보기도 한다고요. 학생들의 반응이 궁금해요. 긍정적인 변화를 보인 학생이 있나요?

 

강릉명륜고는 남자 고등학교인데, 반가워하기보다는 달가워하지 않는 학생들이 더 많은 것 같아요. 한 반에 30명 정도의 학생이 있다면, 의미 있는 변화를 보이는 학생은 3명 정도예요. 그 외 25명은 별생각이 없는 것 같고 강하게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학생이 2명쯤 돼요. 1학년 국어 시간마다 ‘3분 스피치’를 하는데 자기 관심 분야를 학생들 앞에서 발표하는 시간이에요. 한 친구가 그 시간에 ‘페미니즘의 폐해’에 대해 발표한 적이 있어요. 인권 감수성이 높은 친구라 처음에는 의아했어요. 그런데 2년 동안 수업에 열심히 참여하면서 도서관에 있는 관련 책을 찾아보더니 지금은 페미니즘이 왜 필요한지 알겠다고 하더라고요.

 

반면 강하게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학생과는 어떤 관계를 맺고 있나요?

 

인터넷 커뮤니티 ‘루리웹’에서 열심히 활동하는 친구가 있었어요. 온라인 남초 커뮤니티가 대부분 그럴 텐데, 반(反)페미니즘 정서가 강한 곳이에요. 한번은 그 친구가 토론을 하고 싶다고 교무실로 찾아왔어요. 40분 정도 대화하며 서로의 입장 차이를 확인했어요. 어떤 부분에서 생각이 다른지, 잘못된 근거는 없는지 의견을 나눴어요. 대화 이후에도 둘 다 입장의 변화는 없었지만, 저도 즐거웠던 시간이었고 학생도 만족하며 돌아갔어요. 교사의 권한을 남용해 학생을 누르려고 하지 않으면, 건설적인 토론을 할 수 있고 그 이후에도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고등학교 페미니즘 교육 의무화국민청원이 21만 명이 넘었어요. 학교에서 페미니즘 및 인권 교육이 이루어지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게 있다면 무엇일까요?

 

일단 남성들의 반발이 없어야겠죠.(웃음) 제도적인 교육에 페미니즘 교육을 정착시키는 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닐 거예요. 여전히 ‘페미니즘’이라는 단어에 강한 거부감을 갖는 사람들이 많아요. 아주 천천히 작은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처음에는 노동, 장애, 인종, 연령 등과 함께 인권 교육의 한 분과로 접근해야 한다고 봐요. 일단 첫발을 떼면 진행하는 과정에서 특정 분과를 확대 운영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올 수도 있어요. 여성들은 절박한데 남성들은 여전히 문제의 심각성을 잘 모르기 때문에 더 많은 여성의 증언과 고발, 남성의 성찰과 반성이 선행되어야 하고요.

 

일상 속 혐오 발언이 공공연하게 이루어지고 있어요. 어린아이들이 무의식적으로 장애인이나 성소수자를 비하하는 발언을 내뱉고 있고. 일상 속 혐오 표현은 듣는 사람에게 상처와 소외를 주는 표현인 데도 말하는 사람은 정작 아무 생각이 없는 경우가 있더라고요. 오 표현에 반응하면 왜 그렇게 민감하게 반응하느냐고 오히려 핀잔을 주기도 하죠.

 

혐오 표현이 심각한 문제라는 사회적 공감대가 먼저 이루어져야 할것 같아요. 그러면 다른 사람에게 상처가 되는 말을 하고 나서 ‘웃자고 한 이야기에 죽자고 달려든다’와 같은 반응이 사라지겠죠. 저 역시 혐오 표현을 구사하는 연령대가 점점 어려진다는 걸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결국 학교 교육이 개입해야 되는 문제라고 생각해요. 적은 비용과 노력으로 큰 갈등을 예방할 수 있는 길이죠.

 

혐오 표현은 왜 하는 걸까요?

 

우리의 표준이 지나치게 협소하기 때문 아닐까요? 정상성과 비정상성을 가르는 경계도 너무 뚜렷하고요. 다양성을 인정하지 못하는 관용이 부족한 게 원인이라고 생각해요. 혐오의 강도와 빈도가 강해지고 있는 건 저성장-양극화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울분이 자기보다 약해 보이는 사람이나 다른 사람을 향하기 때문인 것 같아요.

 

인권 감수성이란 무엇이며 일상에서 어떻게 키울 수 있을까요?

 

쉽게 말하면 ‘역지사지 능력’ 같아요. 내가 살아보지 못한 삶에 이입하고, 공감하고 아파하면서 누구도 함부로 대하거나 평가하지 않는 세와 태도죠. 저와 함께 공부했던 학생들을 떠올려보면 많이 보고, 듣고, 읽고, 접한 학생들이 인권 감수성이 높았어요.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과 다양한 삶이 있어요. 모두가 자기 나름의 고민과 이유를 갖고 살아간다는 걸 인정하기만 해도 타인을 함부로 재단하지는 않을 거예요. 경험의 폭이 넓어지면 사유의 폭과 관용의 폭도 자연스럽게 넓어지는 것 같아요. 미디어를 통해서도 키울 수 있다고 생각해요. 웹툰 <여중생 A>를 감명 깊게 봤다면 친구를 따돌리는 데 동참하기 어려운 것처럼요.

 

학생들의 경우 또래 집단에서 혼자 다른 생각을 표현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은데요. 개인의 각성이 일어났다고 해도 집단의 분위기가 형성되지 않으면 웬만큼 용기를 내지 않는 이상 자기 의견을 표현하기가 쉽지 않은 것 같아요. 이런 친구들에게 추천해주고 싶은 활동이 있나요?

 

먼저, 비슷한 친구들을 만나 용기를 얻었으면 좋겠어요. 둘은 좀 겁나지만 셋이 되면 저지르지 못할 일이 없죠.(웃음) 요즘은 웬만한도시에 청소년수련관이나 청소년문화센터가 있어요. 그런 곳에 함께 공부하고 행동할 수 있는 친구를 찾는다는 벽보를 붙여보는 건 어떨까요? 손을 내밀어줄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이 분명히 있을 거예요.

 

앞으로 수많은 선택을 앞둔 청소년들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나요?

 

세상은 엄청난 속도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지금의 기준으로 미래를 예측하고 대비하는 건 어리석은 행동일 수도 있어요. 당장 좋아 보이는 것, 어른들이 좋다고 권유하는 선택보다는 내가 하고 싶은 걸 선택하면 좋겠어요. 하고 싶은 게 없는 친구라면, 일단 뭐라도 저질러 보는 건 어떨까요?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합니다.

 

앞으로도 만나게 될 남학생들과 꾸준히 대화할 거예요. 또 성평등 교육의 필요성을 느끼지만 선뜻 용기를 내지 못하는 교사들을 설득할 거예요. 두 달 전에 태어난 제 딸을 잘 키우는 것도 중대한 목표입니다. 핑크와 리본에 가두지 않고 주체적인 사람으로 자랄 수 있도록 돕고 싶어요. 여자라서 꿈을 꺾거나, 여자라서 참거나, 여자라서 자기를 단속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에서 존엄한 개인으로 살 수 있게 사회를 바꾸는 노력도 계속 하고 싶습니다.

 

 

 

학교에서 흔히 발생하는 일 중 하나는 짓궂은 행동에 대해 무의식적으로 남자와 여자의 역할을 고정시켜 판단하는 일이다. 남자아이가 짓궂은 행동을 하면 남자니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반면, 여자아이가 짓궂은 행동을 하면 유별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최현희 선생님은 이러한 성별 고정관념에 ‘왜’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학생들과 직접 만나는 학교 현장에서 무의식적으로 행해진 성차별은 없는지 스스로를 성찰했다. 갑작스러운 주목으로 폭풍 같은 시간을 보낸 뒤, 1년의 휴직을 마무리하고 복직을 앞둔 최현희 선생님을 만났다.

이수진 ● 사진 오계옥, 생각의 힘

성별 고정관념과 혐오는 연결되어 있다

 

위례별 초등학교는 혁신학교로 알고 있어요. 일반 학교와 어떤 점이 다른가요?

 

위례별 초등학교는 신도시가 조성되면서 새롭게 문을 연 학교예요. 처음부터 혁신학교로 개교했기 때문에 자원해서 모인 교사들의 열의가 대단했죠. 혁신학교의 가장 중요한 의제는 학교 민주화인데 이를 위해 교직원 회의를 활성화했어요. 그 과정에서 페미니즘 이슈도 공론화될 수 있었죠. 기본적으로 교육에 대한 신념을 가진 교사들이 라 특정한 이슈에 관심이 없어도 교육에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논의를 거쳐서 수용하는 열린 태도를 갖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어요.

 

그런 과정에서 페미니즘 동아리가 만들어졌나요?

 

일반 학교에서는 페미니즘 이슈를 공론화하기 어려워요. 교사들이 학교 내에서 페미니즘 교사 동아리를 만든 것 자체가 의미 있는 시도였다고 생각해요. 동아리는 페미니즘에 대한 논의 속에서 자극을 받은 다른 선생님이 만들었어요. 저는 그 동아리의 일원이었고요.

 

동아리 내에서 어떤 활동을 했는지 궁금합니다.

 

책 모임이었어요. 외부에 알려지면서 모임 성격이 와전된 부분이 있는데, 2권의 책을 읽고 스스로를 돌아보는 활동을 했어요. 동아리 취지는 교사로서 수업활동 이전에 각자의 일상에서 젠더 감수성을 얼마나 갖고 있는지, 질문 없이 스며들었던 관성이나 통념은 없었는 지 등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자는 거였어요. 좋은 내용과 구성의 페미니즘 교과서가 만들어진다고 해도 결국 교사 개인의 성찰이 없으면 학생들에게 잘 전달되기 어렵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기고했던 일간지 칼럼에도 일상적으로 이뤄지는 차별과 혐오 표현에 대해 ‘왜’라는 질문이 필요하다고 썼어요. 선생님은 언제 처음 ‘왜’라는 질문을 했는지 궁금합니다. 많은 여성이 결혼을 통해 이런 질문을 시작하는 것 같아요. 저 역시그랬어요. 그 전까지는 여성으로서 자기 정체성에 대해 큰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죠. 눈앞의 차별에 무감했고 한편으로는 외면했던 시기가 있었어요. 결혼 후에 맞닥뜨린 어려운 질문은 시가 어른 모두 좋은 분들이고, 남편을 사랑하는데도 결혼생활의 불편한 감정이 있어서 그게 어디서 오는지에 관한 것이었어요. 처음에는 나 스스로를 질책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했죠. ‘내가 좋은 아내와 며느리가 아니 기 때문일까’, ‘내가 이기적인 걸까’. 이 질문을 따라가보니 끝에 페미니즘이 있었어요. 이게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이고 역사적인 문제라는 걸 깨달았죠. 내가 개인적으로 아무리 노력해도 불편한감정은 사라질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더 이상 소모적인 노력을 그만하고 싶었어요.

 

어떤 불편함이었는지 좀 더 설명해줄 수 있나요?

 

‘좋은 아내’나 ‘좋은 며느리’로서 착한 규범에 따르고자 아무리 노력해도 만족스럽지 않은 거예요. 오히려 노력하면 할수록 불편하고 공허했어요. 그 노력 대신 이런 불편함이 어디에서 오는지 근본적으로 공부해보고 싶었어요.

 

페미니즘 공부는 어떤 방식으로 했나요?

 

시작은 결혼이라는 제도 안에서 느낀 불편함이었고, 그다음으로는 책을 읽으면서 본격적인 공부를 시작했어요. 책을 통해 이전에 내가 인지하지 못했던 많은 불평등과 차별에 대해 알게 됐고 제 안에 있던 알 수 없는 감정들을 좀 더 명확하게 인식할 수 있었죠. 이미 많은 여성이 되풀이되는 역사를 통해서 다 겪은 일들이더라고요. 저는 읽으며 공감만 하면 됐죠. 페미니즘 서적을 읽으며 저의 삶을 해체하고 다시 세우는 시간들이 있었는데, 내적으로 많이 성장할 수 있었어요. 괴로우면서도 즐거운 시간이었죠. 이 모든 것은 교육을 통해 충분히 배울 수 있었던 건데 왜 이제야 알게 됐는지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어요. 그러면서 학교 안으로 이런 내용을 가져와서 실천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요. 결정적인 계기는 2016년 5월 17일에 발생했던 강남역 살인사건이었어요.

 

그 사건이 선생님에게 어떤 의미였나요?

 

그 전까지 페미니즘을 공부하면서 희열도 느꼈지만, 약간의 버거움이 있었어요. 많은 분이 페미니즘을 알기 이전으로 돌아가기 어렵다는 말을 하는데 저도 그런 느낌이었어요. 이미 페미니즘 렌즈를 통해 많은 것이 보이는 상황 속에서 고단함과 피곤함이 있었지만 돌아갈 수는 없었죠. 그런데 강남역 사건을 접하면서 나라는 개인의 고통과 불편함이 나에게서 끝나지 않고 사회와 연결되어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일상적인 성차별과 여성 혐오가 결국 우리 사회의 극단적인 여성 살해와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요. 리베카 솔닛은 이걸 ‘미끄러지기 쉬운 비탈길 이론’으로 설명해요. 사실 저는 대한민국에서 여성으로서 안정된 직업이 있고, 가부장성에서 탈피하려고 노력하는 남편과 함께 살고 있어요. 그래서 제가 겪는 차별이나 불편함은 어떤 부분에서는 참고 넘어가면 무마시킬 수 있는 정도일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이 사소한 차별과 불편함이 혐오의 비탈길에서 어떤 곳에서는 여성의 죽음으로, 또 다른 곳에서는 데이트 폭력이나 가정폭력으로 연결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의 일상에서 겪는 여성 혐오나 차별이 내게 큰 해를 가하는 수준은 아닐지라도 참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학생들이 그런 시선을 가질 수 있도록 교육하는 게 나의 책임이라는 느낌이 강렬하게 들었어요.

 

개인의 삶을 사회적으로 연결시킨 사건이었군요.

 

강남역 사건 다음 날, 학생들이 복도에서 놀고 있는 모습을 보는데 눈물이 나더라고요. 통계상 3~4일에 한 명꼴로 친밀한 관계 안에서 죽는다고 하는데, 데이터에 잡히지 않은 경우까지 생각하니 너무 먹먹한 거예요. 또 물리적인 폭력뿐만 아니라 성별 고정관념으로 각자의 개성과 잠재력이 억압되는 것도 교사로서 문제가 있다고 느꼈어요. 활기차게 뛰어노는 학생들을 보면서 무엇이라도 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죠.

 

어떤 결심이었나요?

 

공적인 발언이나 활동에 대해 용기를 내야겠다는 결심이었어요. 그래서 그다음 주에 있었던 교직원 회의에서 몹시 긴장한 채로 강남역사건 발언을 했어요. 강남역 살인사건과 여성혐오 피라미드 이야기를 했어요. 혐오 피라미드의 꼭대기에는 살인 같은 극단적인 범죄가 있는데, 가장 밑바닥에는 성별 고정관념과 편견이 있다고요. 이 사건이 우리와 동떨어진 사건이 아니라고 이야기했어요. 우리 일상의 성별에 따른 고정관념이나 사소한 편견이 결국 여성 살해라는 극단적인 사건의 발단이 되는 거라고 덧붙였어요. 교사들이 먼저 학생들을 바라볼 때 그런 편견이 있지는 않은지 성찰했으면 좋겠고 학교나 교실의 문화도 돌아보자고 이야기했어요.

 

교실에서도 이런 실천이 이어졌나요?

 

사실 교실에서는 페미니즘 교육을 전면에 내세워본 적이 없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페미니즘 교육을 과격한 사상 교육으로 여기고 공격할 때 의아했죠. 특별하게 진행한 수업이 없거든요.(웃음) 아이들과 일상적으로 만나는 교사의 태도가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중·고등학교와 비교해서 초등학교는 교사와 학생이 한 공간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아요. 그래서 교사가 인권과 페미니즘 이슈에 열정과 관심을 갖고 실천하면 학생들도 수업 안팎의 상호작용 속에서 자연스럽게 배울 확률이 높죠.

 

※ 인터뷰 전문은 <MODU> 66호 지면에서 확인 가능합니다.

 

[만나고 싶었어요] 괜찮아, 있는 그대로의 너라서

                                            플러스 사이즈 모델 김지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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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도 하지 않는 일을 시도한다는 것

 

김지양을 수식하는 직업이 굉장히 많다. 플러스 사이즈 모델, 매거진 <66100> 편집장, 쇼핑몰 ‘66100’CEO, 이제는 방송인까지. 제 일 궁금한 건 역시 플러스 사이즈 모델이라는 일에 대해서다. 원래 부터 모델이 꿈은 아니었다고 들었다.

기존에 하던 일과 전혀 다른 일을 하다 보면 다들 직종이나 일을 바 꾸게 된 이유나 계기를 묻는다. 모델이 되고 싶다고 생각한 드라마 틱한 계기는 없었다. <도전! 수퍼모델 코리아 시즌1>에 지원할 당시, 일하던 직장에서 권고사직을 당했다. 정규직으로 전환이 안 된 거다. 내가 정말 원하는 분야에서 일한 것도 아닌데 여기에서까지 실패했다는 생각에 자괴감이 굉장히 컸다. 그때 우연히 <도전! 수퍼 모델 코리아 시즌1>의 모델 모집 광고를 봤다. 광고 속 ‘당신이 주인공입니다’라는 문구가 와닿았다. 이제까지 내 인생에서 내가 주인공 으로 살아본 적이 있었나 고민하게 된 거다. 그래서 충동적으로 지 원했다. 운 좋게 1차에는 합격했지만 2차에서 탈락했다. 하지만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게 카메라 앞에 서는 일이라는 것을 그때 깨달았다.

 

그런데 모델 데뷔는 미국에서 했다. 미국에서 데뷔한 최초의 모델이 된 비법 좀 알려달라.

‘구글링’이다.(웃음) 내 키와 체중으로 나를 기용해줄 만한 쇼를 찾 다가 미국 LA에 ‘풀 피겨드 패션위크(Full Figured Fashion Week)’ 라는 플러스 사이즈 패션쇼가 열리는 걸 알게 됐다. 한 달간 모델 워 킹 수업을 받은 다음, 프로필 사진과 동영상을 준비해 서류를 보냈 다. 덜컥 합격해서 그대로 미국으로 떠나 실물 면접을 봤고, 쇼에 섰 다. 그게 2010년이다. 2년 뒤 ‘캐러비언 플러스 사이즈 패션위크 (Caribbean Plus Size Fashion Week)’ 측에서 먼저 연락이 왔다.

 

데뷔부터 쇼에 서기까지가 일사천리로 진행됐나 보다.

전혀! 경제적 측면에서 힘든 점이 굉장히 많았다. 풀 피겨드 패션위 크는 모델들에게 숙소조차 제공하지 않았다. 캐러비언 플러스 사이 즈 패션위크 측도 숙식은 제공했지만 항공편은 스스로 마련해야 했다. 2012년 뉴욕에서 열리는 풀 피겨드 패션위크에도 참가하고 싶 었는데, 그러려면 면접, 쇼 스케줄 등을 포함해 미국에서 최소 90일 을 체류할 비용을 자비로 충당해야 했다. 돈이 엄청 많이 필요했다. 초등학교 급식실에서 설거지 일도 하고 쿠킹 클래스도 열어가며 돈을 모았다.

 

그래도 지금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플러스 사이즈 모델이 아닐까 싶다.

그런가? 하지만 나를 보고 모델의 꿈을 키우는 친구들이 생기는 건 별로 달갑지 않다. 플러스 사이즈 모델이 되고 싶으니 방법을 알려 달라는 질문은 많이 받고 있지만 일일이 답해주지 않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이 질문을 하는 경우는 보통 세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첫째, 얼굴이 예쁜데 뚱뚱한 경우, 둘째, 모델이 꿈인데 살이 안 빠 지는 경우, 셋째, 뚱뚱하지만 남한테 인정받고 싶은 경우. 그런데 왜 꼭 모델이 되고 싶은지 깊이 생각해본 친구는 별로 없는 것 같다. 그 저 미디어에서 예쁘게 보이니까 모델이라는 직업을 갖고 싶은 거라 면 정말 말리고 싶다. 모델은 철저하게 기용당하는 입장이다. 자신 의 잠재력에 대해 고민해보고 여러 일을 거친 뒤에 모델을 꿈꿔도 좋지 않을까? 나만 해도 보통 모델이라면 은퇴할 나이인 25세에 데뷔했다. 급하게 생각할 필요가 전혀 없다.

 

매거진 <66100>도 궁금하다. 모델이 직접 매거진을 창간했다는 게 새롭게 느껴졌다.

나를 커버에 세울 매거진을 만들고 싶었다. 처음 인턴을 한 곳이 잡지사였는데, 창간을 준비하던 차라 어깨너머로 잡지 제작 프로세스 를 배울 기회가 있었다. 가장 공들인 건 아마추어처럼 보이지 말자 는 것이었다. 대중의 눈에 익숙지 않은 플러스 사이즈 모델이 나오 는 만큼 편집 레이아웃이 어설프거나 너무 독특한 시도를 하면 본질 이 흐려진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최소한의 꼴은 맞춰보고자 기획서 들고 발품 팔아가며 자문을 구했다. 감사하게도 많은 분들이 도와주 었고 3개월 동안 준비해서 2014년에 창간호를 냈다. 현재 7호까지 나왔다. 지금은 잠시 휴간 중이다. 벌여놓은 일이 너무 많아서.(웃음) 곧 8호로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 아무것도 모르고 시작해서 인터뷰하고 화보 촬영하고 기사까지 쓰려니 고생은 많이 했지만 ‘이 잡지 한 권으로 다른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이 한명이라도 생긴다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만들었다.

 

쇼핑몰 ‘66100’도 그런 취지에서 열었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계속 찾아낸 결과다. 쇼핑몰 ‘66100’은 2015 년 사회적 기업가 육성사업 지원 대상으로 선정돼서 시작한 사업이 다. 올해로 4년 차인데, 처음엔 란제리 쇼핑몰로 시작했다. 그런데 모델로서의 나와 CEO로서의 나 사이에서 자꾸 갈등이 생겼다. 모 델로서의 나는 내 몸이 너무 좋은데, 상품을 팔아야 하는 CEO의 눈 으로는 자꾸 부족한 점이 보이는 거다. 그 당시만 해도 ‘들어갈 데 들어가고 나올 데 나온’, 일명 서구형 플러스 사이즈 모델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다. 그러다 보니 내 몸을 긍정적으로 보지 못하 게 되는 게 너무 고통스러웠다. 그래서 란제리 대신 일반 여성의류 쇼핑몰로 전향했다. 안되는 것을 억지로 하는 건 정말 싫었으니까.

 

오프라인 쇼룸도 운영해서 고객들의 만족도가 높다고 들었다.  

우리 쇼룸은 의류 선택권의 사각지대에 있는 사람들을 위한 서비스 다. 우리나라에서 ‘프리 사이즈’는 44에서 66까지다. 그런데 실상 55 사이즈 이상은 시중에서 찾기도 힘들다. 심지어 누가 봐도 마른 사람인데 44 사이즈 옷이 안 맞는 경우도 있다. 시판되는 의류가 이 런 상황이니 플러스 사이즈 고객들은 단순히 옷을 사는 일 자체가 힘들다. 그러니 주체적으로 옷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없다. 제품 의 디자인이나 질을 보고 사는 게 아니라 단지 몸에 맞는 옷을 사는 거다. 나도 돈 벌려고 쇼핑몰을 운영하지만 이런 플러스 사이즈 구 매층을 돕고 싶다는 마음이 컸다. 쇼룸도 그래서 만든 거다.

 

쇼룸에서는 옷만 입어볼 수 있나?

아니다. 방문한 고객의 가슴, 허리, 엉덩이 등 신체 치수를 측정한 뒤 정확한 사이즈를 알려주고 그 자리에서 우리 쇼핑몰의 옷을 살 수 있도록 했다. 여기에 더해 고객에게 맞는 스타일도 제안해준다. 어떻게 보면 ‘퍼스널 쇼퍼’로서의 서비스도 함께 제공하고 있는 거다. 쇼룸을 운영하는 일이 힘들어서 그만두고 싶다가도 쇼룸에 와서 옷을 사고 처음으로 만족스러운 쇼핑을 했다는 분들을 보면 그만둘 수가 없다.

 

지난해 종영한 <바디 액츄얼리> 프로그램에서는 MC로도 주목을 받았다. 방송은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

<명견만리>, <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 등은 프로그램 측에서 섭외가 들어왔다. <바디 액츄얼리>는 전에 출연했던 프로그램의 PD님 추천으로 합류했다. 방송이고 예능이고 전부 초보라서 내가 방송에 어울리는 사람인지 확신은 없다. 하지만 방송으로 유명해져야겠다고는 생각한다.

 

방송이 적성에 맞았던 건가?

단순히 방송 일이 즐거워서 유명인이 되고 싶은 게 아니다. 예전부터 인터뷰를 해오면서 정말 수많은 악플을 받았다. 악플을 일일이 고소하는 게 지칠 정도로. 특히 내 주위, 내 소중한 사람까지 모욕할 때는 차라리 더 유명해져서 강경하게 대응할 수 있는 지위에 오르고 싶다는 마음도 생긴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지금보다 더 유명해져 서 사람들이 뚱뚱한 사람들에게 해코지하지 못하는 사회도 만들어 보고싶다.

 

사회구조까지 바꿔나가려면 몸이 열 개라도 모자라겠다.

나는 일을 벌이는 걸 싫어하는 성격이다. 일이 많으면 내가 통제하 지 못하는 부분이 생길 수밖에 없는데, 내 손이 미치지 않은 영역이 느는 게 싫다. 그리고 일에 매몰되는 것은 사람을 피폐하게 만든다 고 생각한다. 그런데도 예전보다 더 워커홀릭이 된 데에는 다른 이 유가 있다. 한 여중생이 비만이라는 이유로 왕따를 당하고 SNS에서 조리돌림을 당해서 자살 시도를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 사연을 보고 잠이 안 오더라. 그때 생각했다. 내가 이런 친구들의 자살을 막 을 수 있는 ‘난간’ 정도는 되어야겠다고. 나를 모른다면 어쩔 수 없 지만 나와 내 활동이 더 알려지면 뚱뚱하다는 이유만으로 괴롭힘 당하는 친구들을 살릴 수 있는 기회도 더 많아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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➊의류 브랜드 ‘아메리칸 어패럴’에서 진행한 플러스 사이즈 모델 온라인 투표 부분에 지원한 사진. 김지양은 세계 지원자 991명 중 8위를 차지했다.
➋현재까지 발행된 매거진.
➌캐러비언 플러스 사이즈 패션위크 관련 기사에 한국인 참가자로 소개됐다.
➍2012년 마이애미에서 열린 ‘LS 1426’ 런웨이에 선 모습.

 

 플러스 사이즈를 대변하는 사람으로서 일종의 사명감을 느끼는 것으로 보인다.

 

내가 못하는 것을 안 하는 것은 괜찮지만 할 수 있는 걸 안 하는 건 직무유기처럼 느껴진다. 게다가 이전에는 아무도 하지 않았던 일을 내가 시작하고 있으니 책임감이 생길 수밖에 없다.

 

외부에서 문제의식을 찾는 프로 불편러가 되길

 

자기 자신의 몸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데에는 자존감도 관계가 깊을 것 같다.

맞다. 그런데 자존감이라는 단어를 영어 사전에서 찾아보면 self-regard, self-esteem, self-respect처럼 대부분 ‘self’라는 말이 붙는 다. 난 자존감이 정말 ‘셀프’, 즉 자기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인지의 문이 든다. 인간은 누구나 똑같은 값의 자존감을 갖고 태어나지만 점차 외부 환경에 따라 자존감이 깎이면서 낮아지는 건 아닐까.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인격적으로 공격을 받은 경험이 있거나 아니면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인정받지 못했던 경우가 많더라.

 

자존감이 높고 낮은 이유를 외부에서 찾는다면, 자존감을 높일 수 있는 방법도 바깥에서 찾으면 될까?

자신의 낮아진 자존감을 대면하고, 나를 돌봐야겠다는 마음이 들어 서 스스로 고민하는 것이 자존감을 높이는 첫걸음이다. 모든 병이 그렇듯 만병통치약은 없다. 누구의 강연을 듣거나 인터뷰를 읽는다 고 자존감이 갑자기 확 높아질 수는 없다. 그런데 자존감이 높은 사 람들을 보면 대부분 외부 요인에 크게 상처를 받지 않았거나, 오히려 외부에서 문제의식을 찾은 사람들이 많았다. 이 문제의식을 갖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 자기 자존감을 깎은 외부 요인은 무엇이었는 지 곰곰이 생각해보길 바란다. 분명 자신의 외모나 행동, 사고방식 을 억압해가며 상처를 준 요인이 있을 것이다. 그 요인은 부모가 될 수도, 가장 친한 친구일 수도, 아니면 사랑하는 연인이나 미디어 속 모습일 수도 있다. 그 원인을 탐색해보고 원인에 화내고, 따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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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스타일 매거진 <더 셀러브리티>의 2017년 봄호에 실린 화보.

 

당신도 그런 과정을 거쳤나?

물론이다. 나 역시 유치원 때 “많이 먹으면 미스코리아 못 된다”는 말을 들어가며 컸다. 하지만 지금은 내 몸을 사랑한다. 나름대로 외 부에 문제의식을 갖고 그 환경과 싸워 이긴 결과겠지. 나를 불편하 게 하는 것을 찾는 것은 지금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행동이 기도 하다. 그리고 이건 페미니즘에서도 마찬가지다.

 

페미니즘이 이렇게 연결되다니, 안 물어볼 수 없겠다. 여성 문제에 목소리를 높이는 만큼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을 것 같은데.

여자이면서 청소년인 여학생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첫 경험 을 조급해하지 말라는 거다. 어릴 때 부모나 사회로부터 충분한 사 랑을 받지 못하고, 주변 상황에 의해 자존감이 낮아지면 이성 교제를 통해 심리적 안정감을 찾게 된다. 이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 에게 관계를 요구하면 떠밀려서 경험하는 경우가 많다. 자주지 않으 면 상대가 나를 싫어하게 될까 봐. 무슨 일이 있어도 스스로의 욕망 에 집중하길 바란다. 내가 원할 때, 스스로 행동하고 표현하면 된다. 또 불합리한 상황, 이를테면 성폭행과 강간을 당해도 그 당시 자신 이 완강하게 거부하지 않았다면 도움을 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친 구들이 많은데 전혀 아니다. 본인이 싫었으면 그건 성폭행이고, 강 간이다. 이럴 때 피해자를 돕는 기관도 정말 많다. 어린 친구들이 성 관계로 트라우마를 갖고 걱정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래도 굉장히 다행인 건 불편한 것, 불합리한 것에 대해 의견을 표출하는 10대 친 구들이 많아졌다는 사실이다.

 

이쯤 되니 궁금해진다. 10대의 김지양은 어떤 사람이었나?

초등학교 때는 뭐든지 앞서서 해보고 싶은 아이였다. 자연히 ‘잘난 척하는 애’, ‘나대는 애’로 찍혔고, 그래서인지 친구가 많지 않았다. 아, 18살 땐 우울증을 앓았다. 공부를 곧잘 하는 편이었는데 어제까 지 풀었던 문제가 갑자기 안 풀리더라. 스트레스가 너무 쌓여서 학 교를 3~4개월 가까이 못 갔다. 고3 때는 그냥 놀러만 다녔다. 조퇴 하고 싶으면 조퇴해서 놀러 다니고. 그 방황하는 시간 자체가 진짜 재밌었다. 그러면서 연애를 정말 많이 했다. 난 늘 외로웠고 내가 너무 궁금했다. 스스로 답을 찾지 못하면 견디지 못하는 성격 탓에 나 를 알기 위해 많은 사람을 만나왔다. 문제는 그렇게 놀다 보니 대학 원서 쓸 때쯤에는 갈 대학이 없었다는 거지.(웃음)

 

그래도 외식조리학과에 진학하지 않았나.

외식조리학과에 진학한 건 진로적성검사 결과지를 보면서 고민하 다 결정한 선택이었다. 요리를 전공하면 최소한 굶지는 않겠지, 그렇다면 요리 스킬을 배워야겠다는 마음이었다. 원래는 문예창작학과를 지망해서 백일장도 많이 참여했는데 다 떨어졌다. 실내 백일장 대회에서는 더위를 먹어서 아픈 적도 있었고. 잠깐 청소년상담사를 꿈꾼적도 있지만 ‘내가 청소년들을 좋은 길로 이끌어줄 수 있을까? 일단 나조차 학교를 잘 안 나가는데’라는 생각에 그만뒀다. 외식조리학과에 진학한 건 차선책이기는 했어도 후회하지는 않는다. 지금의 나를 있게 만들어준 게 그때 배운 요리다. 요리하면서 만난 사람 들이 참 좋은 사람들이었고, 지금 나에게 ‘온전히 나로 있을 수 있는 시간’, 그리고 삶에 재미를 더하는 것도 요리니까.

 

재미를 중요하게 여기나 보다. 더 파고들고 싶은 분야는 어떤 것인가?

지금은 컴퓨터 프로그래밍에 관심이 있다. 프로그래머들이 문제를 직접 풀 수 있는 스킬을 갖고 솔루션을 제시하는 게 멋지다. 물도 굉장히 좋아하는데, 수영을 좀 더 배워서 스쿠버다이빙 강사 자격증을 따보고 싶다. 이렇게 말하니 지금 하는 일에 만족을 못하는 것 같지만.(웃음) 물론 지금 하는 일도 재밌기는 하다. 하지만 ‘enjoy’에 가까운 개념이다. 기왕이면 ‘fun’, 정말 깔깔 웃을 수 있는 ‘재미 요소’ 가 담긴 직업을 갖고 싶다.

 

참 많은 일을 해왔고, 앞으로도 더 많은 일을 벌일 것 같다. 함께 진 로를 고민할 <MODU> 독자들에게 한마디 부탁한다

난 직업을 갖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우리나라는 부모님이 자녀의 결혼 전까지, 혹은 자녀의 전 생애를 관리하고 서포트하는 것 이 너무 당연하게 여겨지는 문화다. 그래서 집안이 경제적으로 풍족 하지 않아 일찍 독립하게 되는 친구들이 그렇지 않은 친구들에 비해 손해를 본다거나 억울하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그냥 애 초에 내 것이 아니었다고 마음을 먹으면 편하다. 그리고 원하는 일 을 하고 싶다면 경제적 자립부터 생각해봐라. 부모에게 경제적으로 기대면 아무리 부모 자식 사이라 해도 결국은 빚으로 남는다고 생각 한다. 나는 내가 돈 벌어 악착같이 아껴가며 독립했다. 그래서 부모 님의 허락 없이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할 수 있었다. ‘나는 나의 의 견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려면 앞으로 조금씩이라도 경제적으로 독립해보길 바란다. 물론 내가 아무리 뭐라고 얘기해도 직접 겪어보고, 그 시기를 지나야만 알게 될 거다. 섣불리 조언은 하 지 않겠다. 그냥 이 글을 읽는 친구들이 즐거웠으면 좋겠다. 하고 싶은게 생기면 뭐든 해봐라. 그 일이 의미 있는 일이든 그저 재미있어 보이는 일이든, 뭐든 좋으니 일단.

 

[만나고 싶었어요]

바다처럼 넓게 보고 파도처럼 도전하라

해양모험가 김승진 선장

글 이수진 ● 사진 이강훈

 시속 9km로 세계일주를 하는 바다달팽이

 

201410월부터 20155월까지 약 7개월간 요트로 무기항, 무원조, 무동력 세계일주를 했다. 요트로 세계일주가 정말 가능한가?

 

요트는 엔진 없이 바람 등의 자연 에너지로만 움직일 수 있다. 어느 정도 요트를 다루는 기술이 있다면 태풍 속에서도 견딜 수 있다. 요트는 어딘가에 부딪히거나 좌초되지만 않으면 탈것 중에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한다. 해도, 그러니까 바다 지도에 좌초 위험이 있는 지역이 표시돼 있는데 이곳만 잘 피해가면 된다. 그리고 요트는 바다위에 떠 있을 땐 이동 수단이 되지만 정박하는 순간 집으로 변한다. 단순한 레저 스포츠 개념으로 이해하기에는 그 이상의 역할을 하고 있다.

 

무기항, 무원조, 무동력 요트 세계일주에 대해 조금 더 설명해달라.

 

내가 떠난 항해는 여행이 아니라 모험이다. 혼자서 하는 레이스인동시에 모험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 레이스는 전 세계적으로 정해진 몇 가지 규칙이 있다. 말 그대로 무기항, 육지에 정착하지 않고바다에 떠 있을 것. 무원조,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을 것. 무동력, 오로지 바람의 힘으로만 항해를 할 것. 요트는 인간이 만든 탈것 중에가장 느리다. 세계일주한 요트 이름은 ‘아라파니’인데 바다달팽이라는 뜻이다. 이 요트의 평균 속도가 시속 9km 정도다. 자전거보다 느린 속도로 지구 한 바퀴를 도는 데 7개월이 채 걸리지 않았다.

 

항해를 할 수 있는 길이 정해져 있나?

 

1998년에 세계적으로 바다에 대한 ‘통항의 자유 협정’이 체결됐다. 각 나라의 경계선에서 12해리 이상, 즉 20km 이상 멀어진 곳을 ‘공해(公海)’라고 부르는데, 통항의 자유 협정으로 공해에서는 누구나 항해를 할 수 있다.

 

무기항, 무원조, 무동력 요트 세계일주에 성공한 사례로 전 세계적으로는 여섯 번째, 국내에서는 최초라고 들었다. 처음부터 성공을 확신하고 떠났나?

 

확신이 있었다. 물론 1%의 불행은 염두에 두었다. 나의 의지나 능력과 관계없이 일어나는 일들이 있으니까. 갑자기 벼락이 치거나 태풍에 휘말릴 수 있는 거 아닌가? 그런 예측 불가한 1%의 불행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확신이 있었다. 배를 수리한다거나 혼자 시간을 보내는 일은 내게 어렵지 않은 일이다. 자연은 무섭지 않다.

 

자연은 사람과 달리 말이나 행동으로 소통이 어려운 대상인데 어떻게 확신할 수 있었나?

 

말이나 행동이 아니라서 소통이 더 잘될 수 있는 것 같다. 말은 늘 정확하게 전달이 안 된다. 두 사람만 거쳐도 의미가 온전하게 전달되기가 어렵다. 그런데 느낌이나 마음은 거의 정확하게 전달된다. 내가 나쁜 짓을 하고 상대를 보면 상대방은 나쁜 짓의 내용은 몰라도 내 의도가 무엇인지는 100% 알아차린다. 마음이나 직관이 말보다 소통 능력이 뛰어나다고 생각한다. 자연도 마찬가지다. 늘 예시를 준다. 그럴 때면 느낌이 온다.

 

구체적으로 어떤 느낌을 받는지 하나만 소개해달라.

 

엄청난 폭풍, 태풍이 오기 전에 소리가 먼저 온다. 바다가 ‘우-웅’ 운다. 그리고 청정 지역 바다에서 수평선 위에 약간 노란색의 띠가 생길 때가 있다. 해무랑은 조금 다르다. 그때 찬 바람이 휭 지나갈 때가 있는데, 바로 조금 뒤에 엄청난 돌풍이 온다. 이런 느낌은 금방알 수 있다.

 

혼자서 무섭지는 않았나?

 

늘 긴장이 되는 순간이 있었다. 바람이 워낙 세니까 배는 잘 달렸다. 파도가 높고 세서 가끔 두려움을 느낄 정도로 배가 미끄러지며 내려가면 짜릿하기도 했다. 남극해는 예측하기 어려운 바다다. 상식적이지 않은 바다로 표현하기도 하는데 그게 참 긴장되고 두렵다. 보통은 바람이 불지 않을 때 돛을 펼쳐서 항해를 한다. 그런데 남극해는 바람이 불지 않을 때에도 돛을 펼칠 수 없었다. 언제 큰 바람이 올지 예측이 잘 안 되기 때문이다. 돛을 펼쳤다가 갑자기 바람이 불면 돛대가 부러지거나 돛이 찢어질 수 있다. 그러면 항해가 어려워지기 때문에 이런 선택이 어려웠다.

 

항해 덕분에 감각이 매우 발달했을 것 같다.

 

혼자 항해를 하는 사람은 감각이 발달할 수밖에 없다. 내 오감으로 모든 것을 판단해야 하기 때문에 상당히 민감해진다. 나는 잠이 굉장히 많고 한번 잠들면 깊이 자는 사람인데 항해하면서는 알람이 울리면 벌떡 일어났다. 깊이 잤는데도 그랬다. 몸에 있는 센서가 발달한 거다.

 

요트 위에서 보내는 하루 일과가 궁금하다.

 

할 일이 많다. 항해는 매일 했다. 항해에 필요한 요트 조정은 필요한 때에 하고. 무엇보다 밥 먹는 시간이 무척 중요했다. 하루에 두 끼를 먹는데 제한된 식재료로 무엇을 해 먹을지 결정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맛있는 걸 해 먹으면 좋겠지만 재료가 여의치 않기 때문에 메뉴 고민을 많이 했다. 싱싱한 채소나 육류를 먹을 수 없고 통조림 종류를 먹어야 했는데 그 재료들로 어떤 걸 만들어야 하나 생각하는 시간이 많았다. 그 외에는 감시 활동을 하거나 항해일지 기록이나 사색을 했다.

 

7개월의 항해 기간 동안 인상에 깊게 남아 있는 장면을 말해달라.

 

평소에 흔히 보지 못하던 바다를 봤을 때 인상적이었다. 남극해를 항해할 때인데 되게 험하기도 했고 사람을 우울하게 만드는 칙칙한 바다였다. 주변에 회전하고 있는 저기압 때문에 하늘은 늘 구름으로 덮여 있다. 그 당시 일기를 보면 왕짜증이라고 쓰여 있다.(웃음) 한달에 3일 정도 해가 뜨는데 그마저도 짧은 시간 동안 떠 있다. 그 외에는 계속 폭풍과 높은 파도가 이는 거다. 이게 사람을 무기력하게 하고 우울하게 만든다.

 

그런 기간이 얼마나 됐나?

 

7개월 중에 2개월 이상이니 전체 항해 중 3분의 1 정도를 남극해에 있었다. 그때는 사진도 안 찍었다. 예쁘고 아름다워야 사진을 찍고 싶을 텐데 그런 마음이 전혀 들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해가 갑자기 떠서 파란 하늘이 잠깐 보이기에 선실 밖으로 뛰어나가 녹슨 기구들을 햇볕에 쬐었다. 그런데 2, 3시간 만에 다시 날이 흐려졌다. 그때 어떤 깨달음이 왔다. ‘아, 그렇지. 이 바다는 원래 그런 바다인데 내가 바다의 본모습을 거절하고 자꾸 다른 모습을 원했구나’ 한 거다. 내가 참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맑은 하늘을 보려면 여기말고 적도에 갔어야지 하는 생각을 했다. 있는 그대로를 봐주면 아름다운데 자꾸 다른 바다를 원하니 불만족스러울 수밖에. 그때 우울하고 칙칙한 바다가 새롭게 다가왔다. 그 뒤로는 남극해가 사랑스러워졌고 그때부터 카메라를 들기 시작했다. 잿빛 하늘, 밋밋한 하늘을 찍었다. 한 달 이상 항해를 하고 나서야 남극해의 모습 그대로를 인정할 수 있었다.

 

내가 모험을 계속할 수밖에 없는 이유

 

7개월가량을 홀로 요트 위에 있으면 많은 생각이 들 것 같다. 무슨 생각을 가장 많이 했나?

 

크게 사람에 대한 생각과 자연에 대한 생각으로 나뉜다. 사람들에 대한 생각은, 지금까지 나를 스쳐 지난 모든 사람이 떠올랐다. 그런데 다 좋은 점만 생각나더라. 그리고 하늘을 바라보고 있으면 우주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낮에는 지구가 보이지만 밤이 되면 수많은 별, 우주가 보인다. 내가 이 우주 어디쯤 있는 걸까, 그 위치에 대해 생각하면서 끝없이 생각에 빠질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우주의 끝이 어디일까 궁금해지면서 모험이 또 하고 싶어진다. 그런데 과연 우주의 끝이 있을까? 이 생각의 끝에 가면 ‘나는 이 별에 왜 왔을까?’에 대한 궁금증으로 이어진다.

 

밤하늘의 별을 보면서 인생의 의미를 생각한 건가?

 

그렇다. 내가 이 별에 온 이유가 분명히 있을 텐데,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확실히 알고 있는 건 모두가 죽어간다는 거다. 조금 있으면 지구라는 별을 떠나야 한다는 것. 그러다 보면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건 무엇인가, 나는 남은 시간을 어떻게 존재할 것인가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진다. 달리 뾰족한 방법이 없다. 나름대로 결론 내린 건, 행복감을 많이 느끼며 살고 싶다는 거였다. 내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모험을 계속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➊ 하루 일과의 시작은 콧수염 다듬기로. ➋ 배 위에서는 싱싱한 채소를 먹기가 어려워 직접 새싹을 재배해 먹었다. ➌ 남극해를 항해하는 동안 많은 새들이 요트를 따라왔다. 그중에 가장 오래도록 따라온 새는 앨버트로스 ‘이리와’. ➍ 남극해 주변은 늘 거친 파도가 함께한다.

➊ 하루 일과의 시작은 콧수염 다듬기로.
➋ 배 위에서는 싱싱한 채소를 먹기가 어려워 직접 새싹을 재배해 먹었다.
➌ 남극해를 항해하는 동안 많은 새들이 요트를 따라왔다.
그중에 가장 오래도록 따라온 새는 앨버트로스 ‘이리와’.
➍ 남극해 주변은 늘 거친 파도가 함께한다.

➎ 남극해에서 만난 거대한 유빙. 이 모습을 보며 ‘오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➏ 날마다 썼던 항해일지. ➐ 인도양에서 갓 잡아 구운 오늘의 양식. ➑ 배 위에서는 막대기를 그어 날짜를 기록했다.

➎ 남극해에서 만난 거대한 유빙. 이 모습을 보며 ‘오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➏ 날마다 썼던 항해일지.
➐ 인도양에서 갓 잡아 구운 오늘의 양식.
➑ 배 위에서는 막대기를 그어 날짜를 기록했다.

 

모험할 때 가장 행복하다는 걸 언제 알았나?

 

약간 위험을 무릅쓰고 극복해나갈 때 짜릿한 쾌감을 느낀다. 그때 가 살아 있다는 걸 실감한다. 마흔 살에 내가 그런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

 

그동안 경제적으로 안락한 생활을 했다. 많은 사람이 원하는 것인데 나는 이상하게 행복하지 않았다. 그때 이런 물질적인 것들이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모험은 달랐다. 그 속에서 행복을 느끼고 굉장히 두근거리고 설레었다. 이 길을 가는 게 옳다는 생각이 들었다. 옳다고 생각하면 바로 실행해야 하지 않나? 내몸이 원하는 것, 내 마음이 원하는 것을 충족시켜주는 일이 행복감을 가장 많이 느낄 수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모험가로 살고 있고 ‘해양모험가’라는 직업도 만들게 됐다. 이 모든 과정이 재미있다.

 

마흔에 그렇다는 걸 깨닫고 쉰이 넘어 세계일주를 떠났다. 많은 사람들은 오랜 시간을 공들여 안락한 기반을 꾸리고 싶어 하는데 선장님은 오랜 시간을 공들여 과감히 모험을 떠났다. 그것도 예측 불가능한 곳으로.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측 불가능한 상황을 원하지 않을 거다. 나도 깜짝 놀랄 때가 있다. 그런데 그렇기 때문에 더 즐거운 것 같다. 앞을 모르기 때문에 더 궁금하고 재미있고 가보고 싶다. 사람들에게 오히려 묻고 싶다. 지금 쌓고 있는 기반이 정말 안정적일까 내가 모험을 떠나는 것과 사람들이 안정을 취하는 건 크게 보면 둘다 모험이라고 본다. 앞날은 아무도 알 수 없다. 인간 생활에 영원한 안정이란 건 없다고 생각한다. 다수가 가는 길이 안정적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어떻게 보면 착각일 수 있다. 요즘은 쉰 살이면 대부분 직장을 그만둔다. 그때까지 모아둔 돈은 병원비로 쓰거나 자녀들 출가할 때 지출한다. 은퇴하고 카페를 많이 한다는데 이들 중 95% 이상이 문을 닫는다고 한다. 그런데 항해는 성공할 확률이 90% 이상이다. 시선을 조금만 바꾸면 다른 세상을 볼 수 있다. 안정적이라고 생각하는 길이 다르게 보면 계속 불안정한 생활일 수 있다. 인생은 모험이라고 생각한다. 방법만 다를 뿐이지 모든 인간은 전부 모험하고 있는 거다.

 

청소년 시절이 궁금하다.

 

장난스럽고 호기심이 많았다. 처음 가는 장소를 좋아해 주말이 되면 배낭을 메고 들로 산으로 떠났다. 가서 아무 데나 텐트 치고 밥을 해먹으면서 밤을 지새웠다. 중고등학교 시절에 보이스카우트를 한 영향도 있지만 개인적으로도 많이 다녔다. 부모님은 내가 늦게 들어와도 안심할 수 있는 아이라고 생각하셨다. 밖에서 일어나는 일을 집안으로 끌어들이지 않는 성격이기도 했다. 누군가를 정시키면서

하는 행동은 올바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약간의 정의감도 있어서 친구들을 돕는 것도 좋아했다.

 

목표를 이루고 싶다면 용기라는 실행 키를 잡아라

만나고 2

<그것이 알고 싶다>에 방영됐던 꽃제비다큐멘터리를 촬영한 걸로 안다. 항해 전에는 다큐멘터리 PD로 세계 곳곳의 삶을 깊숙하게 들여다보면서 세상의 별별 일들을 가장 가까이에서 봤을 텐데, 사람과 세상에 대해 어떤 마음이 들었는지 궁금하다.

 

다큐멘터리 PD가 된 건 사회에서의 생존과 연관이 있다. 미술대학을 졸업했는데 미술로는 사회에서 생존하기 어렵다는 판단이 들었다. 대신 비주얼과 관련된 일은 하고 싶었다. 어떤 일이 좋을까 생각하다가 방송이 떠올랐고 일본으로 유학을 가 방송사에 취업했다. 다큐멘터리라면 장르를 가리지 않고 찍었다. 다큐멘터리를 찍으며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건 행복한 일이다. 밑바탕에 사람에 대한 애정이 없으면 어려운 일이지만. 물론 중간에 회의감이들 때도 있었다. 왜 이런 사람들을 위해 일해야 하나, 이런 생각이들 때가 있었다. 그럴 때면 좀 더 사람들을 지켜본다. 가만히 보면 납득하기 어려운 행동을 하는 사람들도 다 이유가 있다. 거짓말, 잘못된 행동, 이런 것들을 납득할 수 있게 되면 그다음부터는 사람들을 사랑하게 된다. 여기까지 시간이 좀 걸리지만 그런 과정들이 재미있었다. 특히 40대 후반에서 50살 무렵에 다큐멘터리를 만들 때는 정말 재미있었다. 나이가 들다 보니 사람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져 있었고 이전보다 더 사랑하게 됐다. 이런 마음이 프로그램 속에 묻어 나온다. 나이 든 사람들의 시선으로 제작되는 다큐멘터리가 많았으면 좋겠다.

 

직업 선택도 그렇고, 자기 욕구를 잘 알고 그에 맞게 선택하는 것 같다. 어떻게 자신이 원하는 것을 잘 알아차릴 수 있었나?

 

친구들이나 주변 사람들은 나를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내가 하고 싶은 건 다 하고 사는 것처럼 보이나 보다. 진솔하게 행동하는 걸 좋아하다 보니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조건과 상황이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적극적인 사고를 하고 좋아하는 것을 열심히 좇아가다 보면 진정한 자기 욕구를 깨닫게 되는 것 같다. 특히 여행은 견문을 넓히는 데 아주 좋다. 사람을 다양하게 만나는 이들과 보다 넓은 세상을 경험하는 사람들은 가치관의 폭이 남다르다. 이해의 폭이 넓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스트레스를 주지 않는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다양한 기회를 얻게 된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과감하게 선택하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선장님은 용기가 많은 사람 같다.

 

나는 호기심이 많은데 그 호기심을 채우려는 욕구도 많은 사람이다. 그러다 보니 혼자 여행도 다니게 된 것 같다. 지금도 여전히 지도를 보면 흥분된다. 지형을 열심히 살피며 실제로 보면 어떤 모습일까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어릴 적에 사회과 부도를 받으면 한 번에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봤다. 지도에 가고 싶다고 표시해둔 부분을 실제 가기 시작하면서 용기가 꾸준히 생긴 것 같다. 용기는 실행 키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좋은 조건을 갖고 있어도 용기를 내 행동하지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예를 들어 결혼하고 싶은 상대가 있으면 결혼해달라는 말을 해야 하고, 들어가고 싶은 회사가 있다면 이력서를 쓰고 면접을 봐야 한다. 그 지점에 도달하기 위해 필요한 게 바로 용기라는 실행 키다. 끊임없이 용기를 내 도전하고 실행해야만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다.

 

사회과 부도에서 본 곳 중에 여전히 가고 싶은 곳이 남아 있는지?

 

못 가본 곳이 많다. 남극해는 다녀왔으니 북극해 알래스카 쪽에 가고 싶다. 동해를 지나 일본, 러시아, 캐나다, 미국 쪽으로 돌아오는 항해 코스가 있다. 그 코스를 조만간 하고 싶어 계획을 세우고 있다. 아마 몇 년이 걸릴 거다. 그 전에는 바르셀로나 월드 레이스와 프랑스에서 열리는 대회에 나가 대한민국의 위상을 높이고 싶다.

 

김승진 선장에게 바다는 어떤 곳인가?

 

대한민국은 바다에 약하다. 바다에 강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계속 생각하고 있다. 지난해 12월부터 7개월간 ‘대양 항해’를 하면서 41명의 다양한 사람들이 요트에 타고 내렸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들 전부 자신만의 바다를 발견했다. 멀미를 하던 이들도 2, 3일 후면 멀미를 그치고 바다를 즐기기 시작한다. 예술가는 영감을 찾고 젊은 친구들은 직업을 찾는다. 나이 드신 분들은 남은 인생 여정의 새로운 친구를 찾기도 한다. 너무 행복해서 우는 사람도 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이 이렇게 관심을 가지면 자연스럽게 대한민국은 해양 대국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내가 하고 싶은 일도 이런 식의 ‘물 문화’ 운동이다. 국내에 있을 때면 바다와 친근하게 느낄 수 있도록 강연과 요트 체험을 하고 있다. 얼마 전에 중학교에서 강의를 하고 내려오는데 이 친구들이 뛰어오면서 자신을 안아달라고 말하더라. 그때 이 친구들이 나와 친구가 되었다고 느끼는구나 싶어 행복감을 느꼈다. 강의가 많아서 피곤할 수도 있지만 내가 만난 사람들 중 몇 명은 바다를 사랑하게 되니 이만하면 성공한 것 같다.

 

마지막으로 MODU 독자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청소년 시절은 무엇인가를 찾으려는 나이 같다. 나의 청소년 시절도 그랬던 것 같다. 이 모든 과정이 자기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발견해가는 과정이 되었으면 한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명확하게 알 수 있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도 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지금은 어떤 목표를 갖기보다는 많은 것에 호기심을 갖고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여러분의 꿈을 응원한다.

 

페북-배너-1-사본

아이, 로봇, 메이커 로봇 공학자 한재권

글 박지은●사진 한재권, 김좌상

변신 로봇을 만들겠다는 꿈 같은 로망

 

자기소개를 해달라.

로봇 공학자 한재권이다. 고려대학교 기계공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자동제어학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대기업에서 군사용 무기를 만들다가 버지니아 공대로 유학을 떠났다. 세계적인 로봇 공학자인 데니스 홍 교수님이 이끄는 로멜라 연구실에서 로봇을 만들기 시작해 다윈-HP, 휴머노이드 로봇 찰리(CHARLI)를 설계하고 제작했다. 이 두 대의 로봇으로 2011년 로봇컵 대회의 어덜트 사이즈 리그, 키즈 사이즈 리그에서 동시 우승했다. 2013년에 열린 다르파 로보틱스 챌린지 트라이얼에서 9위를 차지한 재난 구조용 로봇 ‘똘망 1’의 설계와 제작에도 참여했다. 2015년에 유학 생활을 마치고 로보티즈 수석 연구원으로 재직하면서 다르파 로보틱스 챌린지 결선에 진출한 로봇 ‘똘망 2’의 설계와 제작을 담당했다. 현재 한양대학교 융합시스템학과 산학협력 중점 교수로 재직 중이다.

 

로봇 공학자가 된 특별한 이유나 계기가 있나?

많은 매체에 소개되었지만 내게는 몸이 불편한 남동생이 있다. 기술이나 제도가 많이 발달한 지금도 장애인들은 집 밖을 나서기가 어려운데 내가 어릴 때는 모든 것이 훨씬 더 열악했다. 온 가족이 동생을 돌봐야하는 상황이었는데, 동생을 데리고 동네를 벗어나기도 힘들 정도였다. 때문에 가족끼리 여행을 가는 건 호사로운 꿈일 뿐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텔레비전에서 만화 영화를 보는 로봇이 나오는 거다. 저거다 싶었다. 저런 로봇만 있으면 동생을 돌보는 일이 한결 수월할 것 같았다. 돈을 모아서 저런 로봇을 사리라 마음먹었다. 그런데 돈을 아무리 모아도 정작 살 로봇이 없었다. 그래서 내가 직접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렇게 시작된 꿈인데 이렇게 현실이 되어버렸다. 다행스럽게도.

 

원래 뭔가를 만드는 재주가 있었나?

만드는 걸 좋아하는 건 확실하다. 맨날 로봇만 만들었던 건 아니다. 플라모델을 맞추는 데 집중하기도 하고, 나무를 깎아서 뭔가를 만들려는 시도도 끊임없이 했다. 환경적인 영향도 있는 듯하다. 아버지가 철공소에서 다양한 기계를 제작하는 일을 하셨는데 정해진 걸 만드는 게 아니라 주문을 받아 설계부터 제작까지 직접 하셨다. 그런 아버지 밑에서 자라다 보니 뭔가를 만드는 일은 생활의 일부처럼 느껴졌다. 중학교 시절에는 아버지 철공소에서 일을 한 덕분에 남들보다 만드는 기술을 아주 일찍부터 익히게 되었다. 이때의 경험 덕에 유학 가서 로봇을 직접 제작하게 되었을 때 남다른 실력을 뽐낼 수 있었다.

 

로봇 공학자는 정확히 어떤 일을 하는가?

말 그대로 로봇을 만든다. 하지만 모든 로봇 공학자가 같은 일을 하는 건 아니다. 로봇은 아주 복잡한 기계라서 다양한 지식이 필요하다. 그래서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팀을 이루어 로봇을 만들어간다. 그래서 한 팀 안에는 나처럼 로봇을 설계하고 제작하는 로봇 공학자가 있는가 하면, 로봇의 전기 회로를 만들어주는 로봇 공학자, 로봇에게 주어진 임무를 수행하도록 프로그램을 입력해주는 로봇 공학자 등이 함께 있다.

 

대기업 연구실에서 일하다가 돌연 유학을 떠났다고 들었다. 이유가 무엇인가?

연구실에서는 4년 정도 근무했다. 차세대 전차 장갑차, 일명 탱크의 핵심 장비인 자동제어 타깃 장치를 설계했다. 이런 군사용 무기를 만드는 건 나름 재미가 있기는 했지만 내가 꿈꾸던 일은 아니었다. 난 예전부터 친구 같은, 그리고 사람을 돕는 로봇을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인지 어느 날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내 인생은 이게 아닌데, 내가 하고 싶은 건 이게 아닌데…’ 하는 생각들이 점점 많아지자 마음이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이대로 지내다 보면 로봇을 만들 수 있는 기회가 영영 없어져버릴 것 같았다. 결국 아내의 동의를 얻어 유학을 결심했다. 다행히 아내는 나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줬다.

 

데니스 홍 교수님과 일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데니스 홍 교수님은 언제 만났나?

2007년 제주도에서 열린 국제 로봇 학회에서 처음 만났다. 당시 교수님은 버지니아 공대 신임 교수로 독창적인 아이디어와 기상천외한 로봇으로 많은 주목을 받고 계셨다. 나 역시 ‘리얼 트랜스포머’라는 변신 로봇을 만들어서 변신 과정을 찍은 유튜브 영상이 꽤 인기를 끌고 있을 때였다. 난 로봇 공학자로서의 능력을 평가받고 싶어서 일면식도 없는 데니스 홍 교수님을 만나기 위해 제주도까지 날아갔다. 어찌 보면 별거 아닐 것 같은 로봇을 들고 교수님을 뵈려니 심장이 두근거렸다. 다행히 교수님과의 첫 만남은 아주 즐거웠다. 홍 교수님은 잘 알려진 것처럼 굉장히 개방적이셨고 유쾌한 에너지가 넘치는 분이었다. 게다가 만들고 싶은 로봇, 꿈꾸는 로봇에 관해서 통하는 점이 정말 많았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마치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람을 만난 것처럼 순식간에 마음을 열게 되었다.

 

리얼 트랜스포머는 어떤 로봇인가?

꼬마였을 때부터 언젠가는 변신 로봇을 만들어보겠다는 로망을 가지고 있었다. 리얼 트랜스포머는 이 오랜 로망을 실현시킨 로봇인데 로보티즈 제품이었던 바이올로이드와 내가 따로 구입한 모형 자동차를 결합해 로봇에서 자동차로 자유자재로 변신할 수 있게 만들었다. 이 변신 과정을 동영상으로 찍어서 유튜브에 올렸는데 조회 수가 100만을 넘어섰다. <트랜스포머>라는 영화 탓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자동차에서 로봇으로 변신하는 ‘트랜스포머’는 모든 남자들의 로망이었던 모양이다.(웃음)

 

홍 교수님 때문에 로멜라 연구실을 택했나?

그렇다. 원래는 아이비리그의 한 곳인 코넬 대학교에 입학을 지원했었고 입학 허가서도 받았다. 그런데 데니스 홍 교수님을 만나고 꼭 이분 밑에서 로봇 만드는 일을 배우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하지만 버지니아 공대로 진로를 바꾸는 일은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홍 교수님이 계시기는 했지만 당시 로멜라 연구실은 막 만들어진 상태였고, 학생도 얼마 없어 일반적인 시선으로는 좋은 결정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고민 끝에 코넬대 입학을 포기하고 버지니아 공대를 선택했다. 이 선택은 지금 생각해도 너무 잘한 결정이었다. 로멜라 연구실에서 난 그 어느 때보다 더 로봇 제작에 빠져 내가 꿈꾸는 그림을 그려나갈 수 있었다.

 

로멜라 연구실에서는 어떤 로봇을 만들었나?

처음으로 한 건 ‘다윈 4’의 설계, 제작 및 보행 알고리즘을 개발하는 거였다. 알고리즘이란 어떤 행동을 할 때 필요한 반복되는 절차를 말한다. 다윈은 로보컵 대회의 휴머노이드 키즈 사이즈 리그에 출전하기 위해 만든 인간형 로봇으로 키가 작고 아주 귀엽게 생겼다. 내가 로멜라에 들어가기 전인 2007년에 ‘다윈 1’이 만들어졌다. 해마다 업그레이드되고 있었는데 내가 4번째 업그레이드될 다윈 4를 맡게 된 것이다. 이후에는 ‘다윈-OP’, ‘찰리’를 만들었다. 찰리는 성인 크기의 로봇이 경기하는 어덜트 사이즈 리그가 생겨나면서 만든 로봇으로 키가 무려 150cm나 된다.

 

유명한 로봇이긴 하지만 찰리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소개해주겠나?

찰리는 내게 특별한 로봇이다. 설계부터 제작까지 손수 한 데다 각종 시험과 로보컵 경기 전략을 짜는 것까지 하나하나 정성을 쏟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만든 지 2년 만에 로보컵 대회에서 우승을 거머쥔 건 물론이고, 최고의 휴머노이드로 뽑히기도 했다. 또 미국 최초의 성인 크기 휴머노이드 로봇으로 인정받은 것도 모자라 <타임>지가 선정한 ‘최고 발명품 50’에도 들어갔다. 그야말로 타이틀이 화려하다. 지금은 시카고 박물관에 전시까지 되어 있다. 찰리는 잘 만들어진 로봇이기도 하지만 ‘핸섬 로봇’이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세련되게 생겼다. 아내인 엄윤설 작가가 커버를 디자인해주었는데 보통 로봇들은 직선 위주의 커버를 가진다. 하지만 찰리는 곡선의 디자인을 가지고 있다. 당시에는 아무도 하지 않던 획기적인 디자인이었다. 세련된 외모 덕에 잡지며 교과서 표지 모델도 여러 번 했다.

 

10년 뒤에는 11로봇의 시대가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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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보컵 대회에서 우승을 거머쥐면서 유명해졌다. 로보컵 대회는 어떤 대회인가?

말 그대로 로봇들의 월드컵이다. 인공지능을 탑재한 로봇들이 축구 경기를 벌이는데 사람이 원격 조정해서 로봇들을 움직여 축구 경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로봇들이 스스로 움직여 축구 실력을 겨룬다. 사람은 감독 또는 관객일 뿐이다. 주심이 휘슬을 불면 경기가 시작되는데, 로봇들이 스스로 공을 찾아서 드리블을 하고 패스를 하고, 슛을 해서 공을 넣어야 이길 수 있다. 로봇 대회 중 가장 난이도가 높은 대회로 손꼽히기 때문에 여기서 우승을 하면 하루아침에 스타가 된다. 2개의 리그로 나뉘어서 대회가 진행되는데 키가 작은 로봇들이 출전하는 키즈 사이즈 리그와 키가 150cm 이상인 로봇이 출전하는 어덜트 사이즈 리그가 있다. 참, 우승을 차지하는 최고의 휴머노이드 로봇에게는 루이비통 컵을 준다. 명품으로 유명한 그 루이비통 말이다. 케이스 안쪽에는 매년 우승자의 이름이 새겨진다. 나는 다윈-HP, 휴머노이드 로봇 찰리로 2011년 로봇컵 대회의 어덜트 사이즈 리그, 키즈 사이즈 리그에서 동시 우승했다.

로보컵에 처음 출전했을 때는 성적이 좋지 않았다고 들었다.

첫 출전이기도 했지만 어마어마한 실패를 맛봐서 그 대회에서 일어난 모든 일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지금 생각해도 어이가 없지만 조별 예선 첫 경기에서 아예 움직이지도 못했다. 주심의 휘슬이 울리고 시작 명령을 보냈는데 로봇 3대가 약속이나 한 것처럼 꼼짝도 안 하는 게 아닌가. 내 머릿속은 하얗게 텅 비어버렸고, 상대 팀은 신나게 골을 넣었다. 근데 더 큰 일이었던 건 작전 타임 때 로봇을 아무리 살펴봐도 문제를 찾지 못한 것이다. 무참히 경기를 지고 나서야 문제를 찾아 밤새 이리저리 손봤지만 고치지 못했다. 결국 두 번째 경기에서도 다윈들은 꼼짝도 안 했다. 그나마 위로가 됐던 건 상대편 로봇들도 다윈처럼 가만히 서 있었다는 것이다.(웃음) 결국 패자 부활전에서도 한 골도 넣지 못한 채 대회를 마쳤다.

 

로보컵 대회에 이어 다르파 재난 구조 로봇 대회에도 참가했다.

‘재난 구조 로봇 대회’는 미국 국방부 산하 연구 기관인 다르파(DARPA)가 개최한 것으로 인류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로봇 대회이기도 하지만 다르파가 열었다는 것으로도 굉장한 의미가 있다. 다르파가 앞으로 재난 로봇의 시대가 올 거라고 예측한 것이니 말이다. 난 이 대회에 로보티즈에서 만든 ‘똘망’을 가지고 참여했다. 원래 참가하기로 했던 ‘토르’가 완성되지 않아 결국 시험용으로 만든 똘망이 참가하게 된 거다. 사실 똘망은 예선에서 9위에 그쳐 8팀만 올라갈 수 있는 본선에 진출하지 못했다. 그런데 1위였던 일본의 샤프트 팀이 미국 회사에 인수되면서 중도 포기한 덕에 가까스로 본선에 올랐다. 본선에서 우리나라의 카이스트가 만든 ‘휴보-DRC’가 우승을 차지했지만 똘망은 15위에 그쳤다. 하지만 난 로보티즈라는 대한민국의 작은 벤처 회사가 본선에 올라 세계적인 로봇들과 겨뤘다는 사실도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다르파 대회가 큰 의미를 갖는 건 무슨 이유인가?

다르파가 내건 프로젝트는 항상 엄청난 과학 기술의 발전을 가져왔다. 1950년대에 시작한 로켓 프로젝트는 달 착륙을 이루어냈고, 1980년대에 내건 프로젝트였던 인터넷은 1990년 인터넷 혁명으로 이어졌다. 2005년과 2007년에 있었던 무인 자동차 경주 대회는 현재 구글의 무인 자동차 개발로 이어지고 있다.

이런 결과로 봤을 때, 다르파가 재난 구조 로봇 대회를 연 것은 재난 구조 로봇이, 더 나아가 로봇이 엄청나게 발전할 것이라고 예언한 것과 다름없이 받아들여지고 있다. 실제 다르파가 2012년 대회를 소개하면서 내건 미션들은 당시로서는 그 어떤 로봇도 가능하지 않은 것들이었다. 재난 현장을 혼자 걸어가 문을 연 후에 밸브를 잠그고, 혼자 운전을 하는 로봇은 그저 꿈만 꾸던 것이었다. 하지만 3년 후의 본선에서는 많은 로봇이 이 미션을 거뜬히 수행했다. 로봇의 엄청난 발전을 불러온 것이다. 이것이 다르파 대회가 갖는 파워라고 생각한다.

 

현재 개발된 로봇은 한 살짜리 아기의 수준이라고 들었다. 그런데 10년 안에 집집마다 도우미 로봇이 보급될 수 있을까?

현재 가장 발전했다고 하는 로봇도 입력된 프로그램에 따라 움직이고 이동할 뿐이다. 하지만 과학의 발전 속도는 놀라울 정도로 빠르다. 휴대폰은 보급된 지 9년 만에 누구나 가지고 있는 일상 용품이 되었다. 때문에 10년 후면 누구나 로봇 하나쯤은 비서로 두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런 날이 되면 설거지나 청소처럼 귀찮은 일은 로봇에게 맡겨두고 사람들은 여가를 즐길 것이다. 마치 과거의 귀족들처럼 말이다. 느지막하게 일어나서 로봇이 챙겨주는 밥 먹고, 옷 입고 친구들 만나서 수다 떨고. 그러다 운동 경기도 한 번 하고. 사람들이 이렇게 여가를 즐기는 동안 로봇들은 집 안을 정리하고, 빨래를 하며 집을 관리하게 될 것이다.

평소 로봇과 함께 사는 시대를 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는데, 로봇이 아직 한 살 수준이라면 좀 이른 것 아닌가?

 

절대 이르지 않다. 지금이 우리가 로봇 시대를 대비해야 할 적기라고 생각한다. 어린아이도 한 살 때는 순수하지 않나. 부모가 정해준 기준에 따라 행동하고 자라나게 된다. 사람은 여기에 수많은 변수가 있지만 로봇은 만드는 사람이 정한 기준대로, 로봇 과학자가 입력해준 가치에 따라 행동한다. 따라서 모든 로봇이 한 살 수준인 바로 지금! 로봇에게 주어져야 할 일의 한계와 로봇에게 주어져야 할 규범과 가치, 그리고 인간이 꼭 지켜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어야 한다고 본다.

 

많은 사람들이 로봇에게 일자리를 뺏기거나 로봇이 사람을 지배할지도 모른다고 걱정한다. 이런 시선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로봇이 대중화되면 분명히 많은 것이 달라질 것이다. 그리고 거기엔 좋은 변화도 있겠지만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변화도 포함될 것이다. 일자리 문제도 그렇다. 많은 로봇이 사람의 일을 대신할 것이 확실하다. 힘든 노동이나 반복되는 업무에서는 분명 로봇이 사람보다 뛰어난 능력을 발휘할 테니까. 하지만 사라지는 직업이 있는 만큼 또 새로운 직업들이 생겨날 것이다.

 

로봇으로 인한 실업 문제가 저절로 해결되리라고 보는 것인가?

사람을 믿어보자고 제안하고 싶다. 인류는 지금까지 수많은 변화를 겪어왔다. 하지만 또 인간들은 그 변화에 맞게 모든 걸 맞춰가는 것 같다. 그리고 어떤 나라들은 미래를 예측해서 대비를 하기도 한다. 지금도 많은 로봇 공학자를 비롯해 미래학자들은 이런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그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결국 우리는 로봇을 받아들이고 그로 인한 문제를 시간이 걸릴지라도 현명하게 해결하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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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이해하고 위로하는 착한 로봇과 사는 세상

 

로봇 공학자를 꿈꾸는 친구들이 많다. 로봇 공학자가 되기 위해서 청소년기에 무엇을 하는 것이 좋겠나?

가능한 한 로봇을 많이 만들어봤으면 좋겠다. 키트라도 좋고, 재료를 직접 구해서 만들어도 좋다. 일단 만들어보면서 로봇을 배웠으면 한다. 그리고 친구들과 함께 만들었으면 한다. 진짜 로봇 공학자들도 혼자서 로봇을 만들지 않는다.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이 팀을 이루는데 이 과정에서 의사소통이 로봇의 완성도를 높이는 데 무척 중요하다. 서로의 이야기를 듣고, 문제점을 파악하고, 서로 머리를 맞대 더 좋은 아이디어를 찾아내는 과정이 있어야만 더욱 완벽하고 수준 높은 로봇이 탄생한다. 그런데 이런 의사소통 과정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게다가 친구, 선배와 팀을 이루면 몰랐던 것들을 서로 배우게 되고, 재료비에 대한 부담은 줄어든다. 일석이조 아닌가. 참, 대회에도 꼭 참여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대회는 정해진 기간이 있어 팀워크를 확인하기에 좋은 기회다. 긴박하게 돌아가는 상황 속에서도 서로를 격려하고, 터지는 문제들을 하나씩 해결해가면서 서로에 대한 신뢰를 쌓아갈 수 있다. 국내 대회를 1차 목표로 삼고, 각종 세계 대회로 확대해갔으면 좋겠다.

 

대부분의 로봇 공학자들은 박사님이다. 박사 학위가 꼭 필요한가?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인데 대답하기가 쉽지 않다. 솔직하게 말하면 대학 졸업장이나 박사 학위가 필수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내가 아는 해외의 훌륭한 로봇 공학자 중에는 공대가 아닌 다른 학과를 졸업한 분들이 많고. 심지어 대학 졸업장이 없는 분도 있다. 하지만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장점이 있다. 대학이나 대학원 과정은 로봇을 제작하기 위해 필요한 각종 지식을 가장 효율적으로 배울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로봇 공학자가 되기 위해 가장 필요한 능력이 뭐냐고 물어보는데 난 주저하지 않고 ‘창의성’이라고 말한다. 로봇을 만드는 데 가장 중요한 건 수많은 이론과 기술이 아니라 이것들을 하나로 합쳐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다. 그리고 이걸 가능하게 하는 게 바로 창의성이다. 하지만 수학, 과학을 열심히 공부하고 공대에 간다고 창의성이 절로 생기는 건 아니잖나. 그러니 진짜 로봇을 만들고 싶으면 지나치게 스펙에만 신경 쓰지 말고 지식과 이론을 쌓은 후 이걸 합칠 수 있는 창의력을 기르라고 말하고 싶다.

 

로보티즈에서 수석 연구원으로 일하다 대학교로 자리를 옮겼다. 다른 목표가 생긴 것인가?

다르파 대회를 진행하면서 가장 부러운 건 다른 팀들의 인력풀이었다. 우리나라의 ‘휴보’가 1등을 거머쥐는 놀라운 기술력을 보여줬지만 우리나라 팀들은 여전히 소수 정예로 팀원 한 사람이 몇 사람 몫을 하면서 이리 뛰고 저리 뛰어야만 대회를 치를 수 있다. 로봇 산업이 번창하려면 로봇을 만드는 사람이 많아져야 하는데 여전히 우리나라는 로봇 공학자가 귀한 실정이다. 그래서 기회가 되면 젊은 로봇 공학자들을 키우는 일을 해보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마침 대학교에 자리가 나서 옮기게 되었다. 이곳에서 한 명의 로봇 공학자라도 더 배출해내는 데 기여하고 싶다.

 

현재 개발 중인 로봇을 소개해달라.

2개의 로봇을 개발하고 있다. 하나는 재난 구조 로봇으로 KT와 공동으로 개발 중이다. 한 대당 25kg 정도인 로봇들이 연결된 형태인데 필요할 때는 스스로 합치기도 하고 분리되기도 한다. 바람이나 장애물 때문에 뒤집히더라도 어느 방향에서든 작동하는데 무엇보다 큰 강점은 통신 능력이다. 재난 현장에서는 사람이 들어가기도 어려운 곳이 많지만 깊이 들어갈수록 통신 신호가 약해져서 로봇이 정보를 수집한다 해도 받기가 어렵다. 하지만 지금 개발 중인 재난 구조 로봇은 여러 개가 줄줄이 결합되어 있어 재난 현장에 투입된 후 통신 신호가 약해지는 지역에 가면 가장 끄트머리에 있는 로봇을 분리한다. 분리된 로봇이 그곳에서 중계기 역할을 하는 것이다.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면 또다시 맨 끝의 로봇이 분리되어 두 번째 중계기가 된다. 하나하나 떨어뜨리고 가는 모양새가 마치 빵 조각을 떨어뜨리며 집을 찾아가는 헨젤과 그레텔 같아 프로젝트명도 ‘헨젤과 그레텔’로 정했다.(웃음) 또 다른 로봇은 감성 로봇이다. 털북숭이 로봇인 ‘에디(EDIE) 01’은 사람의 촉각을 만족시킬 수 있도록 부드러운 털을 두르고 그 사이에 전도성 실을 장착해 사람이 로봇을 쓰다듬으면 눈의 표정과 소리, 몸짓으로 반응한다.

 

궁극적으로 만들고 싶은 로봇은 무엇인가?

사람도 구하고 감성도 갖춘 휴머노이드가 최종 목표다. 난 여전히 로봇 공학자가 되기로 결심했던 어린 시절처럼 로봇이 사람들을 도와주는 존재이기 바란다. 그래서 귀찮은 일, 힘든 일, 위험한 일을 대신해주며 때론 친구 같고 비서 같고, 또 때로는 영웅 같은 로봇을 만들고 싶다. 그리고 한 가지를 더하자면, 착한 로봇이었으면 좋겠다. 사람을 이해하고 사람을 위로하는, 그리고 선함을 기준으로 행동하는 로봇! 이런 로봇을 만들기 위해서는 앞으로 갈 길이 멀다.

세상을 바꾸는 맛있는 인생

오세득 셰프

 

‘셰프(chef)가 대세’란 말이 어색하지 않은 시대다. 스타 셰프들 가운데 ‘아재 개그’라는 유쾌함으로 주목받는 오세득 셰프. 그가 요리하는 인생의 맛은 무엇일까?

글 이정호·사진 백종헌

함께 맛보고 즐기는 곳이라면 주방이 아니어도 좋아

셰프테이너라는 말이 생길 만큼 셰프들의 방송 진출이 활발하다. 오세득 셰프도 그 중심에 있는데, 너무 바빠서 쉬지도 못하는 건 아닌지.

바쁘지만 즐겁게 일하고 있다. 나 역시 방송에서 셰프가 요리하는 모습을 보고 자극을 받은 적이 있어서 이렇게 방송할 기회가 온 걸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방송은 오히려 나에게 쉼, 휴식을 준다. 요리에 관해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낼 수 있어 재충전한다는 기분이다.

방송을 통해 얼굴이 많이 알려졌는데 부담스럽지는 않은가?

그렇게 부담스럽지는 않다. 그렇다고 해서 유명 방송인이나 연예인이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셰프라는 본업에 따라 충실히 요리하는 것뿐이라고 여긴다. 레스토랑에서 얼굴을 알아보고 사인해달라고 할 땐 아직도 쑥스럽긴 하다.(웃음) 뭔가 자유롭지 못한 면은 분명히 있다. 그래서 말과 행동을 늘 조심해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방송의 영향력 덕에 요리사들의 사회적 지위가 어느 때보다 높아져서 기분이 좋다.

이렇게까지 요리 방송이 인기를 끌게 된 이유를 뭐라고 생각하나?

세상은 경쟁과 순위에 집착한다. 요리 방송도 대결하고 등수를 매기고 승부욕을 자극하는 구도지만, 절대 기준이 없어 의외의 결과가 나온다. 내가 보기에 맛있어 보이는 음식이 낮게 평가되고, 애매할 것 같은 요리가 일등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일등이든 아니든 함께 맛보고 즐기는 과정이 재미있다. 그래서 요리사는 부담 없고, 먹는 사람은 행복하고, 시청자도 그 즐거움을 공유하게 되어 인기를 끄는 게 아닐까? 셰프가 알려주는 팁을 바로 집에서 적용할 수 있는 것도 소소한 매력이 아닐까 싶다.

그래도 방송 덕분에 레스토랑을 찾는 손님이 많아졌을 것 같다.

참 고마운 일이다. 그런데 가끔 “예약하려고 하는데 그날 셰프 있어요”라는 전화를 받을 때가 있다. 이런 전화를 받으면 셰프를 예약하려는 건지 음식을 예약하려는 건지 헷갈린다.(웃음) 오세득이라는 셰프가 보고 싶어서 레스토랑에 오는 건 감사한 일이지만, 사실 내가 모든 요리를 다 하지는 않는다. 아주 미세한 차이는 있을 수 있겠지만, 내가 없어도 음식의 맛은 늘 일정하다. 중요한 건 식당이 내놓은 음식이고 서비스니까 셰프에 대한 관심보다 식당에 대한 신뢰를 가져주셨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 시간이 특별했으면 더 바랄 게 없다. 내가 주방에 있고 없고를 떠나 자신만의 특별한 시간을 보내셨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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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근차근 꿈의 레시피를 밟다

어린 시절이 궁금하다. 방송에서 재미있는 모습을 보여주던데, 어릴 때 왠지 개구쟁이였을 것 같다.

맞다. 사고뭉치로 유명했다.(웃음) 야구 하다가 아파트 유리창 깨먹고, 구슬 놀이 하다가 너무 세게 튕겨서 유리창 깨고…. 넘어지고 다쳐서 꿰매기 일쑤였다. 동네에 꼭 한 명은 있는 그런 말썽쟁이였다. 사고를 치면 잽싸게 도망가기 바빴는데 얼마 못 가 어머니에게 잡히곤 했다. 어머니가 육상 선수에 배구 선수까지 지낸 분이라 나보다 훨씬 발이 빨랐다.(웃음)

누구 못지않은 개구쟁이였다니 요리사가 된 지금 모습이 낯설어 보인다. 요리사란 직업을 처음 접한 적은 언제였나?

고등학생 때 텔레비전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다가 미군방송(AFKN)에서 하는 요리 프로그램을 보게 되었다. 그 프로에 나이 많은 중국인 요리사가 나왔는데, 빠른 손놀림으로 15초 만에 후다닥 닭 손질을 마치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이건 뭐지’ 호기심이 생겨 계속 보다 보니 그 요리사가 방청객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아주 쉽게 요리 과정을 설명하는 거였다. 마치 토크쇼처럼 진행하는 걸 보면서 ‘어, 요리가 재미있는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요리사란 직업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셰프가 되기 전 실습생 시절이 힘들고 고되지는 않았나?

주방의 막내 일부터 차근차근 배워나갔다. 창고에 있는 식재료를 정리하고, 구입한 식재료를 받으러 가고, 선배들이 요리할 재료를 썰고 다듬고 설거지하는 일이었다. 그때는 뭐든지 선배들이 시키는 일이라면 좋았고, 무슨 일이든 기꺼이 해낼 자신감이 있었다. 막내니 까 창피한 것도 없고 뭐든 즐거웠다.

남다른 각오로 유학 생활을 했다고 들었다. 자기 인생에서 가장 열심히 살았던 때라고 하던데.

아침 8시에 수업이 시작해서 6시 30분쯤 일어나 후다닥 씻고 집을 나섰다. 지하철을 타고 40분쯤 걸려 학교에 도착하면 곧바로 요리 복장을 갖추고 오후 1시까지 수업을 들었다. 수업이 끝나고 난 오후 3시부터 밤 10시까지는 호텔 레스토랑의 파트타임 직원으로 일했 다. 배운 걸 실전에 활용해보고 싶고, 현지 레스토랑의 분위기도 알 고 싶어서였다. 일을 마치고 집에 도착하면 밤 12시. 그런데 잘 수가 없었다. 다음 수업을 위해 예습, 복습을 하고 영어 공부도 해야 했기 때문이다. 하루에 네 시간만 자고 공부했으니 그때처럼 치열하게 살 았던 적이 없었다. 학창 시절에 그렇게 열심히 공부했다면 일류 대 학에 갔을 거다.(웃음)

요리사로 성장하고 발전하는 데 힘이 되어준 멘토가 있다면 누구인가?

실습생 시절에 만난 김후남 셰프님이 내 요리사 인생의 스승이다. 늘 본받고 싶은 그분 덕에 셰프로서의 마음가짐을 바르게 할 수 있 지 않았나 싶다. 스승님은 여러 나라의 식재료를 다채롭게 활용해 맛을 냈는데, 종종 “양식만으로는, 한식만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다” 고 말씀하셨다. 여러 나라의 음식을 많이 알고 받아들이는 것, 곧 다 양성이 중요하다는 뜻이었다. 지금도 그 말씀을 되새기며 다양한 퓨 전 요리를 개발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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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셰프의 재료가 된다

요리사로서 느끼는 요리의 매력은 무엇인가?

‘함께 맛보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 ‘혼자가 아니라 함께 해야 한 다’는 것이 요리의 매력이다. 음악도 그렇지만 여럿이 평가하고 공 감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요리다. 음식의 맛을 손님이 정확히 알아맞 히면 요리사와 손님은 굳이 대화하지 않아도 느낌으로 소통한다. 또 하나의 요리가 만들어지려면 식재료를 생산하는 농부, 식재료를 납 품하는 판매자, 만든 요리를 소비하는 고객이 있어야 한다. 레스토랑도 셰프의 능력만으로 운영될 수 없다. 함께하는 직원들과 늘 대화하고 토론해야 더 나은 방향으로 발전할 수 한다. 함께하는 사람이 없는 요리란 의미가 없다고 본다.

요리를 식탁 위의 예술이라고 극찬하기도 하는데, 어떤 면에서 그런가?

요리에 ‘감동’이 있기 때문이다. 모든 예술에 감동이 있는 것처럼 훌륭한 요리를 먹고 나서는 진한 감동을 느끼게 된다. 요리사에 대한 고마움뿐 아니라 몸도 감동하는 걸 느낀다. 좋은 음식만큼 좋은 약이 없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또 요리에는 다른 예술 분야와 통하는 부분이 있다. 지글지글 고기 구워지는 소리가 내겐 음악처럼 들린다. ‘치익-’ 소리가 날 때 ‘이쯤에서 뒤집어야 하는구나’ 하고 느끼는 거다. 음악의 클라이맥스를 느끼는 것과 같다고 할까.

가장 아끼는 요리 도구는 무엇인가?

아무래도 칼이 아닐까 싶다. 대부분의 셰프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요리사에게는 전용 칼이 있다. 자기 손에 익숙한 칼. 그렇다고 한 가지만 쓰는 건 아니고 여러 종류의 칼을 때에 따라 골라 쓴다. 어떤 요리를 하느냐에 따라 용도가 전부 다르기 때문이다. 셰프에게 칼은 야구 선수의 전용 배트, 탁구 선수의 전용 라켓과도 같다. 출장 요리를 해야 하는 경우가 생기면, 커다란 가방에 나만의 전용 칼들을 넣어서 가지고 다닌다.

일을 하면서 가장 자긍심을 느낄 때는 언제인가?

요리가 참 재밌는 점은, 요리에 세대 차가 없다는 거다. 주방에서는 누구랄 것 없이 모두 서서 일한다. 음식 앞에서는 자기 생각과 의견을 스스럼없이 말한다. 음식을 만들고 먹으면서 대화를 나누다 보면 세대 간의 격차가 좁혀지는 것 같다.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는 마찰을 일으키기 쉬운데, 요리 세계에서는 젊은 세대가 선배들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노하우를 하나라도 더 배우고 싶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요리사가 되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나도 나이가 들면 나의 노하우를 후배들에게 더 많이 알려주고 싶다. 소통하며 함께 발전하는 것, 그것이 요리사라는 직업에서 얻는 보람이 아닐까

일 때문에 피로와 스트레스가 쌓이면 어떻게 푸나?

스트레스를 잘 받지 않는 편이다.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해도 시간이 알아서 해결해주겠지 하고 내버려둔다. 못하는 것도 잘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스트레스가 생기는 법이니까 못하는 건 못한다고 인정한다. 외국의 어느 유명한 셰프는 자기가 운영하던 식당이 ‘미슐랭’에서 별 세 개를 받다가 두 개로 강등할 거란 소식을 듣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성공에 대한 중압감이 극단적 선택을 하게 만든 거다. 별 개수가 뭐 그리 중요하다고. 머리를 식히면서 쉬고 싶을 때는 여행하거나 식재료를 사러 다니며 기분 전환을 한다.

다른 매체의 인터뷰나 방송에서 오세득 셰프의 레스토랑 경영 철학이 관심을 끌었다. <MODU> 독자들에게도 소개해주면 좋겠다.

아, 그거!(웃음) 나의 경영 철학은 딱 하나다. ‘주방 때문에 홀 직원이 욕먹게 하지 말자.’ 제대로 만들지 못한 음식이 나가면 셰프가 아니라 홀에서 일하는 직원이 욕을 먹는다. 그래서 함께 일하는 요리사들에게 늘 이야기한다. “홀 직원이 창피하지 않을 음식을 만들자.” 손님과 직원은 다 존중받아야 한다. 잘못된 요리로 직원이 폭언을 듣고 상처 입는 일이 없게 하는 것이 셰프로서, 레스토랑 운영자로서 지녀야 할 목표다.

셰프로서 손님들에게 가장 듣고 싶은 말은 무엇인가?

역시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란 말이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기분 좋은 말이 있다. “이번 음식은 좀 과했던 것 같아요. 이건 좀 안 어울리는 것 같아요”라는 뼈 있는 말이다. “셰프님 음식이 최고예요”라든가 “이런 음식 난생처음 먹어봐요” 같은 극찬보다 냉정한 평가를 해줄 때 ‘더 노력해야겠구나’ 하고 다짐하게 된다. 그런 손님들이 다시 레스토랑에 찾아주면 뿌듯함을 느낀다.

셰프를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한때는 셰프를 ‘스나이퍼’라고 생각했다. 손님의 입맛을 한 번에 사로잡는 저격수. 손님을 만족시키지 못하면 불만 사항이 들어오고, 그러면 식당이 쑥대밭이 되고 만다. 요즘에는 생각이 바뀌었다. ‘셰프는 스펀지다.’ 셰프는 뭐든지 다 흡수해야 한다. 원치 않는 얼룩이어도 받아들여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열린 마음으로 요리를 대할 때, 나이가 들어도 정체되지 않는 창의적인 셰프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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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변화시키는 소금 치는 요리사

요리를 가르칠 때 강조하는 말은 무엇인가?

학생들을 가르칠 때 늘 이렇게 말한다. “배워서 남 주자. 배운 게 없으면 남에게 줄 게 없다. 배워서 남에게 줘야 내가 편하다.” 학생들에게 하는 말처럼 나도 몸을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지 하나라도 더 가르쳐주려고 한다. 나와 같은 꿈을 꾸고 같은 열정으로 달려가는 친구들과 함께 요리의 길을 가기를 바란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늘 되새기는 좌우명이 있나?

<중용>에 이런 구절이 있다.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 솔성지위도(率性之謂道) 수도지위교 (修道之謂敎)’. 뜻을 풀이하면 ‘천지자연의 도리를 만물에게 나눠주는 것을 본성이라 하고, 본성을 따르는 것이 도이며, 도리를 올바르게 닦는 것을 교라고 한다’이다. 이 말뜻에 따라 내가 배운 요리를 계속 남에게 가르쳐주고 싶다. 운명 같은 거라고 할까.

앞으로 이루고 싶은 꿈에 대해 듣고 싶다.

세상을 좀 더 맛있게 변화시키는 ‘소금 치는 요리사’가 되고 싶다. 그러기 위해 두 가지 일을 계획하고 있다. 노인복지 사업과 재소자 교화다. 노인복지 사업은 할머니들이 집밥을 만들고 할아버지들이 식사 시간에 맞춰 배송하는 식의 사업이다. 일하고자 하는 어르신들을 도와주고 싶다. 재소자 교화의 경우, 요리가 그들의 교화뿐 아니라 출소 후 사회생활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믿음에서 비롯되었다.

올해 말에는 요리 학원을 열 계획이다. 후배들을 양성하고 싶은 바람 때문이다. 요리 레시피 책을 내보자는 제안도 많이 받는데, 아직 구체적인 계획은 없다. 다만 한 가지 식재료로 무궁무진한 요리를 만들어내는 요리책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다시 태어나도 셰프가 되고 싶은가?

지금과 같이 좋은 상태라면 다시 셰프를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상황이 좋지 않다면 당연히 다른 공부를 해서 다른 직업을 찾을지도 모르고.(웃음) 만약 다시 10대로 돌아간다면 외국어를 좀 더 철저하게 준비하고 싶다. 외국 음식과 문화도 미리 경험하고 싶고. 요리 면에서는 지금 하고 있는 양식보다 한식을 먼저 배우고 싶다. 한식이 양식보다 좋아서가 아니라 우리 음식을 먼저 알아야 다른 나라의 음식을 우리 입맛에 맞게 발전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요리사가 되고 싶은 청소년들에게 꼭 조언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요리사를 희망하는 청소년들에게 꼭 두 가지를 물어본다. ‘어떻게 살려고 하나’ ‘요리 일을 얼마나 할 생각인가’ 요즘 셰프들 사이의 걱정은 방송 때문에 요리사가 너무 갑자기 떠버렸다는 거다. 요리사들이 열심히 해서 관심을 받게 된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언젠가 쿡방의 인기가 시들해지면 요리사에 대한 관심도 떨어질 테니까. 게다가 우리나라에서는 양식 분야가 자리 잡은 지 얼마 되지 않는다. 그런 상태에서 많은 청소년이 요리계로 뛰어든다. 그래서 정말 이 악물고 해볼 자신이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라고 말한다. 정말 잘할 수 있다면, 어떤 힘든 상황이든 포기하지 말고 자신만의 전공 분야를 개척하며 연구하고 몰입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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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세득 셰프가 들려주는 셰프의 세계를 좀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MODU> 매거진과 가나출판사가 함께 만든 단행본 <리얼 셰프>를 확인하세요. 셰프가 되기 위해 꼭 필요한 조언을 멘토 오세득 셰프가 콕콕 짚어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