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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학자

장애, 특별한 장점이 되다

동물학자 템플 그랜딘

 

콜로라도 주립대학교 동물학 교수 템플 그랜딘(Temple Grandin)은 소에게 스트레스를 주지 않는 축사와 도축장의 구조를 개발한 사람이다. 미국과 캐나다, 뉴질랜드 등 낙농업이 발달한 국가의 축사는 절반 이상 그가 설비한 이 시설을 사용하고 있다. 100편이 넘는 동물학 논문을 발표하기도 한 템플 그랜딘의 동물학 연구의 원동력은 ‘자폐증’, 아스퍼거 증후군이었다.

글 전정아 ●사진 위키미디어커먼즈, 템플 그랜딘 공식 홈페이지

 

장애는 모자란 게 아니라 다른 것

 

템플 그랜딘이 앓는 ‘아스퍼거 증후군’은 지적 장애 및 언어 능력이 떨어지지 않는 자폐증이다. 특정 행동을 반복하거나 한 가지 일에 집착하곤 한다. 대인관계에 서툴러 고립돼 지내는 경향이 있으며, 다른 사람의 느낌, 생각, 욕구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표정을 읽지 못한다. 하지만 그에 비해 그랜딘의 시각 지각 능력과 기억력은 거의 천재적인 수준이었다. 한마디로 직관 기억력, 즉 그림으로 보고 그림으로 생각할 수 있었다. 짧게 본 내용도 사진처럼 선명하게 기억했다.

 


 

그랜딘이 태어난 해인 1947년은 자폐성 장애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시대였다. 그는 두 살 때 뇌에 장애가 있다고 진단받아 평생을 보호시설에 맡겨질 뻔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그랜딘을 포기하지 않고 가정교사와 함께 말과 예의범절 등 사회생활을 가르쳤다. 중학생 때는 자신을 놀리는 아이를 때려 퇴학당하고 신경발작 증세로 고통을 겪기도 했지만 어머니와 정신과 주치의의 도움으로 마운틴 컨트리 고등학교에 입학해 그곳에서 윌리엄 칼록(William Carlock) 선생을 만나게 된다. 칼록은 그랜딘의 한 가지에 집착하는 성향을 장애로 취급하지 않고 창의적인 일을 할 수 있도록 이끌었다. 이후 그랜딘은 칼록의 응원과 도움으로 대학에 진학해 프랭클린 피어스 칼리지에서 심리학을 전공했다. 이에 그치지 않고 어릴 적부터 관심이 있던 동물을 공부하기 위해 애리조나 주립대학교에서 동물학 석사를, 일리노이 대학교에서는 동물학 박사 과정을 밟았다.

그는 자폐인과 비자폐인의 차이점을 이해하려는 노력도 멈추지 않았다. 자기공명영상(MRI)이 막 개발되던 1980년대 후반, MRI를 찍고 뇌영상 연구에 참여해서 자신과 일반인의 두뇌가 작용하는 차이를 연구하기도 했다. 그 결과 자신의 균형 감각이 좋지 않은 것은 소뇌가 작기 때문이고, 뇌 여러 영역을 잇는 ‘백색 섬유다발’이 일반인보다 과하게 연결돼 있어 시각적인 기억, 즉 모든 것을 ‘그림으로 생각’하는 까닭을 알아낼 수 있었다.

 

템플 그랜딘은 2010년, 세계에 큰 영향력을 끼친 사람을 뽑는 ‘타임지가 선정한 100인’ 중 한 명으로 뽑혔다. 그의 일화를 다룬 영화 <템플 그랜딘(temple Grandin)>(2010)은 에미상 7개 부문을 수상하기도 했다.

 

템플 그랜딘이 그린 기본적인 소 사육 시설의 설계도.


 

“모든 생명은 소중합니다. 소에게 친절하게 대하세요”

 

템플 그랜딘이 설계한 ‘자비로운 도축장(Humane Slaughter)’의 특징은 소가 받을 스트레스와 공포를 최대한 줄일 수 있는, 짐승에게 최적화된 동선을 갖춘 것이다. 자비로운 도축장은 소들이 일렬로 도살장으로 따라 들어가게 만들어서 뒤에 있는 소가 앞선 소의 엉덩이밖에 볼 수 없게 하고, 마지막 순간에는 소가 미처 알아차리기도 전에 발이 땅에서 떨어지게끔 설계했다. 이렇게 도살장에 들어가게 만든 뒤에는 공기압력 총으로 머리의 정중앙을 쏴 소를 죽이는 것이다.

그는 소를 도축하기 전, 짐승이 살아 있는 동안만이라도 불안한 마음을 갖지 않도록 돕는 것이 동물에게 고마움을 전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축사에서 1시간에 300마리씩 씻기는 과열된 과정 속에서 여러 마리의 소가 물에 빠져 죽는 것을 본 그랜딘은 소가 편안하게 씻을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축사 입장에서도 비용 절감에 도움이 된다고 주장했다.
그랜딘은 도축장을 설계하기 전 먼저 소를 꾸준히 관찰했다. 그 결과 소가 둥글게 빙빙 도는 방식을 좋아하며, 갑작스러운 빛에는 과민하게 반응하지만 사람이 소의 경계 범위 안에 들어가지 않으면 얌전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렇게 이동 방향과 특성에 맞춰 소의 본능을 최대한 고려하면 소가 안정된 상태로 물에 자연스럽게 들어가기 때문에 편안히 씻길 수 있었다. 이처럼 그랜딘이 동물의 감정을 쉽게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한번 보고 들은 것을 말과 문자가 아닌 이미지로 기억하는 그의 ‘특성’ 덕이기도 했다.

그랜딘은 지금도 미국 축산업계 내의 동물 복지와 식품 안전성 개선을 위해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동물 복지가 향상된 환경에서 자란 가축이 질병에 강하고, 이는 나아가 더 나은 식품을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동물복지학의 선구자로서, 그리고 자폐증에 대한 일반인의 인식을 변화시킨 사람으로서, 그가 앞으로 또 어떤 선한 영향력으로 세상을 바꿀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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