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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학생

페미니즘에 대한 가장 흔한 편견은 여성 우월주의를 주도한다는 시선일 것이다. 편견을 거두기 위해서는 자세히 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남학생들과 매일 만나는 최승범 선생님은 페미니즘에 대해 편견이있거나 여성이 쓴 페미니즘 책은 읽고 싶지 않다는 10~30대 남성을 위해 페미니즘 책을 썼다. 크라우드 펀딩으로 시작된 책은 벌써 3쇄를 찍었다. 책에서 저자는 남자니까, 잘모르기 때문에 페미니즘을 더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페미니즘을 통해 자유를 얻었다고 덧붙인다. 어머니와 아내, 그리고 두 달 전에 태어난 딸과 함께 존엄한 개인으로 살아가기 위해 오늘도 고군분투하는 최승범 선생님을 만났다.

 

페미니즘을 만나고 자유를 경험하다

 

<저는 남자고, 페미니스트입니다>3(521일 기준)를 찍었어요. 주변 반응은 어떤가요?

 

예상보다 판매량이 높아서 놀랐어요. 책을 구입하는 주 독자층이 20대 여성이라고 들었는데 남자친구나 남동생, 오빠에게 주고 싶어서 샀다고 하더라고요. 여성이 쓴 페미니즘 책은 읽지 않으려 해서 남성 저자의 책을 선물한다는데, 여성의 현실이 그만큼 절박하다는게 느껴졌어요. 현재는 미투 운동을 계기로 새로운 남성성을 고민하는 목소리가 높아진 시기라, 처음 쓸 때도 10~30대 남성을 예상 독자로 선정하고 진행하긴 했어요. 이 책은 아내와 함께 썼다고 생각해요. 아내는 평소에도 제게 고민거리나 글감을 주는 친구이자 동지거든요. 최초의 독자가 되어 피드백을 주기도 했고요. 그리고 어머니 삶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다 보니 아버지가 나쁜 사람처럼 그려졌는데, 죄송스러운 마음이 있어요. 우리 아버지 정도면 그 나이대에서는 훌륭한 남편이긴 하거든요. 동료 교사들의 반응은 세대에 따라 조금 다른데, 젊은 선생님들은 응원해주는 편이에요.

 

책을 통해 공개적으로 페미니스트라고 밝힌 건데, 책을 쓰기 전과 후 달라진 점이 있나요?

 

공론장에 제 주장과 이야기를 던졌으니 더 조심하고 성찰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말과 글과 삶이 불일치하는 사람을 싫어하는데, 제가 그런 사람이 되면 안 되니까요. 한국에서 남자로 살면서 실수하고 실언하는 일은 너무 쉽게 일어나요.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아야죠. 인터뷰나 강연 요청도 많이 들어오고 다음 책을 내자고 제안하는 출판사도 있지만, 대부분 고사하고 있어요. 페미니즘은 여성인권 운동인데, 제 목소리가 너무 커지면 안 되니까요. 그렇지 않아도 남자 쪽으로 기울어진 사회인데 페미니즘에서까지 남성의 발화권력이 커지는 건 온당하지 못하다고 생각해요.

 

페미니즘 이야기를 공개적으로 꺼내는 분들이 공통적으로 겪는 일 같은데, 페미니즘에 대한 거부감 때문에 이야기를 꺼낸 당사자에게 모욕적인 말을 퍼붓는 일이 있더라고요. 선생님은 어떤가요?

 

저도 여러 차례 있었습니다. 언론사 인터뷰를 하거나 외부에 글을 기고하면 예외 없이 학교에 민원이 들어와요. 학교가 난색을 표하는 것도 이해가 가요. 소명서는 제가 쓴다고 해도 장학사 응대나 외부항의 전화는 결국 교장·교감 선생님의 몫이니까요. 아마 대부분의 학교나 교사가 변화를 반가워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학교는 워낙 보수적인 면이 있는 조직이니까요.

 

책에서 페미니즘은 남자에게도 이롭다고 이야기했어요. 선생님이 겪은 가장 좋은 점 한 가지만 꼽아주세요.

 

사람 관계 안에서 더 자유로워졌어요. 아주 오래전부터 남자 집단에서 어떤 불편함을 느꼈어요. 이른바 ‘센 척’이나 ‘있는 척’하는 사람들이 싫었죠. 꼭 한마디 꼬집어서 이야기해야 속 시원하기도 했고요. 그래서 남자 집단에서 적응하기가 어려웠는데, 한때는 이런 내가 이상한 사람이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어요. 페미니즘을 공부하면서 ‘식민지 남성성(한국 남성의 위치는 한국 여성과의 관계에서가 아니라 미국, 일본 등의 남성과의 관계에서 설정된다는 시각으로, 여성의 역할을 남성이 글로벌 경쟁의 우위에 설 수 있도록 돕는 존재로 생각하는 시각)’ 개념을 알게 됐는데, 한국 사례에 꼭 맞는 거예요. 상대적으로 약하다고 생각하는 대상을 무시하거나 혐오하는 문화의 원인을 근본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어요. 그 뒤부터 마음이 편해졌어요. 원하는 대로 살아도 된다는 걸 깨달았죠.

 

현재 페미니즘 공부는 어떻게 하고 있나요?

 

페미니즘을 처음 접한 뒤에 여성학·평화학 연구자인 정희진 선생님께 정말 많은 영향을 받았어요. <페미니즘의 도전>은 제 인생 책이기도 하고요. 그 외의 다른 저서들과 언론 기고문도 전부 읽었어요. 마음속 스승이라고 생각하고 제 지식과 경험으로 판단하기 어려운 페미니즘 이슈가 터지면 정희진 선생님께서 쓰신 글을 찾아 봐요. 올해 초까지는 책과 영화, 독서 모임을 꾸준히 했는데 두 달 전에 아이가 태어난 뒤로는 시간이 없어서 가끔 책을 읽거나 SNS를 통해페미니스트 필진의 글을 읽고 있어요. 페미니즘에 관심이 간다면 권김현영, 이나영, 이현재, 손희정, 김홍미리, 김고연주 님의 글을 읽어보라고 추천하고 싶어요.

아주 작은 것부터 천천히

최승범 선생님이 페미니즘에 관심이 있는 학생들에게 나누어준 핀버튼 배지. <최승범 선생님 제공>

 

페미니즘의 시선으로 교과서를 보기도 한다고요. 학생들의 반응이 궁금해요. 긍정적인 변화를 보인 학생이 있나요?

 

강릉명륜고는 남자 고등학교인데, 반가워하기보다는 달가워하지 않는 학생들이 더 많은 것 같아요. 한 반에 30명 정도의 학생이 있다면, 의미 있는 변화를 보이는 학생은 3명 정도예요. 그 외 25명은 별생각이 없는 것 같고 강하게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학생이 2명쯤 돼요. 1학년 국어 시간마다 ‘3분 스피치’를 하는데 자기 관심 분야를 학생들 앞에서 발표하는 시간이에요. 한 친구가 그 시간에 ‘페미니즘의 폐해’에 대해 발표한 적이 있어요. 인권 감수성이 높은 친구라 처음에는 의아했어요. 그런데 2년 동안 수업에 열심히 참여하면서 도서관에 있는 관련 책을 찾아보더니 지금은 페미니즘이 왜 필요한지 알겠다고 하더라고요.

 

반면 강하게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학생과는 어떤 관계를 맺고 있나요?

 

인터넷 커뮤니티 ‘루리웹’에서 열심히 활동하는 친구가 있었어요. 온라인 남초 커뮤니티가 대부분 그럴 텐데, 반(反)페미니즘 정서가 강한 곳이에요. 한번은 그 친구가 토론을 하고 싶다고 교무실로 찾아왔어요. 40분 정도 대화하며 서로의 입장 차이를 확인했어요. 어떤 부분에서 생각이 다른지, 잘못된 근거는 없는지 의견을 나눴어요. 대화 이후에도 둘 다 입장의 변화는 없었지만, 저도 즐거웠던 시간이었고 학생도 만족하며 돌아갔어요. 교사의 권한을 남용해 학생을 누르려고 하지 않으면, 건설적인 토론을 할 수 있고 그 이후에도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고등학교 페미니즘 교육 의무화국민청원이 21만 명이 넘었어요. 학교에서 페미니즘 및 인권 교육이 이루어지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게 있다면 무엇일까요?

 

일단 남성들의 반발이 없어야겠죠.(웃음) 제도적인 교육에 페미니즘 교육을 정착시키는 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닐 거예요. 여전히 ‘페미니즘’이라는 단어에 강한 거부감을 갖는 사람들이 많아요. 아주 천천히 작은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처음에는 노동, 장애, 인종, 연령 등과 함께 인권 교육의 한 분과로 접근해야 한다고 봐요. 일단 첫발을 떼면 진행하는 과정에서 특정 분과를 확대 운영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올 수도 있어요. 여성들은 절박한데 남성들은 여전히 문제의 심각성을 잘 모르기 때문에 더 많은 여성의 증언과 고발, 남성의 성찰과 반성이 선행되어야 하고요.

 

일상 속 혐오 발언이 공공연하게 이루어지고 있어요. 어린아이들이 무의식적으로 장애인이나 성소수자를 비하하는 발언을 내뱉고 있고. 일상 속 혐오 표현은 듣는 사람에게 상처와 소외를 주는 표현인 데도 말하는 사람은 정작 아무 생각이 없는 경우가 있더라고요. 오 표현에 반응하면 왜 그렇게 민감하게 반응하느냐고 오히려 핀잔을 주기도 하죠.

 

혐오 표현이 심각한 문제라는 사회적 공감대가 먼저 이루어져야 할것 같아요. 그러면 다른 사람에게 상처가 되는 말을 하고 나서 ‘웃자고 한 이야기에 죽자고 달려든다’와 같은 반응이 사라지겠죠. 저 역시 혐오 표현을 구사하는 연령대가 점점 어려진다는 걸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결국 학교 교육이 개입해야 되는 문제라고 생각해요. 적은 비용과 노력으로 큰 갈등을 예방할 수 있는 길이죠.

 

혐오 표현은 왜 하는 걸까요?

 

우리의 표준이 지나치게 협소하기 때문 아닐까요? 정상성과 비정상성을 가르는 경계도 너무 뚜렷하고요. 다양성을 인정하지 못하는 관용이 부족한 게 원인이라고 생각해요. 혐오의 강도와 빈도가 강해지고 있는 건 저성장-양극화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울분이 자기보다 약해 보이는 사람이나 다른 사람을 향하기 때문인 것 같아요.

 

인권 감수성이란 무엇이며 일상에서 어떻게 키울 수 있을까요?

 

쉽게 말하면 ‘역지사지 능력’ 같아요. 내가 살아보지 못한 삶에 이입하고, 공감하고 아파하면서 누구도 함부로 대하거나 평가하지 않는 세와 태도죠. 저와 함께 공부했던 학생들을 떠올려보면 많이 보고, 듣고, 읽고, 접한 학생들이 인권 감수성이 높았어요.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과 다양한 삶이 있어요. 모두가 자기 나름의 고민과 이유를 갖고 살아간다는 걸 인정하기만 해도 타인을 함부로 재단하지는 않을 거예요. 경험의 폭이 넓어지면 사유의 폭과 관용의 폭도 자연스럽게 넓어지는 것 같아요. 미디어를 통해서도 키울 수 있다고 생각해요. 웹툰 <여중생 A>를 감명 깊게 봤다면 친구를 따돌리는 데 동참하기 어려운 것처럼요.

 

학생들의 경우 또래 집단에서 혼자 다른 생각을 표현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은데요. 개인의 각성이 일어났다고 해도 집단의 분위기가 형성되지 않으면 웬만큼 용기를 내지 않는 이상 자기 의견을 표현하기가 쉽지 않은 것 같아요. 이런 친구들에게 추천해주고 싶은 활동이 있나요?

 

먼저, 비슷한 친구들을 만나 용기를 얻었으면 좋겠어요. 둘은 좀 겁나지만 셋이 되면 저지르지 못할 일이 없죠.(웃음) 요즘은 웬만한도시에 청소년수련관이나 청소년문화센터가 있어요. 그런 곳에 함께 공부하고 행동할 수 있는 친구를 찾는다는 벽보를 붙여보는 건 어떨까요? 손을 내밀어줄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이 분명히 있을 거예요.

 

앞으로 수많은 선택을 앞둔 청소년들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나요?

 

세상은 엄청난 속도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지금의 기준으로 미래를 예측하고 대비하는 건 어리석은 행동일 수도 있어요. 당장 좋아 보이는 것, 어른들이 좋다고 권유하는 선택보다는 내가 하고 싶은 걸 선택하면 좋겠어요. 하고 싶은 게 없는 친구라면, 일단 뭐라도 저질러 보는 건 어떨까요?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합니다.

 

앞으로도 만나게 될 남학생들과 꾸준히 대화할 거예요. 또 성평등 교육의 필요성을 느끼지만 선뜻 용기를 내지 못하는 교사들을 설득할 거예요. 두 달 전에 태어난 제 딸을 잘 키우는 것도 중대한 목표입니다. 핑크와 리본에 가두지 않고 주체적인 사람으로 자랄 수 있도록 돕고 싶어요. 여자라서 꿈을 꺾거나, 여자라서 참거나, 여자라서 자기를 단속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에서 존엄한 개인으로 살 수 있게 사회를 바꾸는 노력도 계속 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