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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롤모델

2014년 말, ‘구찌(Gucci)’의 모기업 ‘케어링 그룹’은 마르코 비자리를 CEO 자리에 앉혔다. 그가 구찌를 이끌고 5년 뒤, 구찌는 ‘샤넬(Chanel)’의 매출을 처음으로 추월했다. 그는 수렁에 빠진 구찌에 어떤 마법을 부린 것일까?

두 자릿수의 사나이

 

명품 브랜드 구찌는 2013년 이후 2년 연속 실적이 좋지 않았다. 모기업인 케어링 그룹은 구찌의 간판 디자이너 프리다 지아니니, CEO 패트리지오 디 마르코를 해임하고 그 자리에 마르코 비자리를 임명했다. 비자리는 패션 업계에 종사하던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파격적인 인사였다.
컨설턴트였던 그는 1993년 가방 브랜드 ‘만다리나 덕’의 관리자로 일하기 시작하며 패션 업계에 발을 들였다. 이후 2005년부터 2009년에는 영국 브랜드 ‘스텔라 매카트니(Stella McCartney)’를 흑자 전환했고, 2009년부터 2014년까지 부임했던 이탈리아 브랜드 ‘보테가 베네타(Bottega Veneta)’를 연 매출 4억 유로에서 10억 유로로 성장시켰다. 이렇듯 비자리가 맡은 브랜드는 늘 마법을 부린 듯 성공적인 성장률을 보였고, ‘두 자릿수의 사나이’라는 별명도 붙었다.

 

무명 디자이너를 수석 디자이너로

 

비자리는 위기를 맞은 구찌를 살리기 위해 수석 디자이너부터 물색했다. 빈자리를 메울 차기 디자이너로 유명한 스타 디자이너들이 물망에 올랐지만, 그는 구찌 디자인팀의 ‘서열 2위’ 알레산드로 미켈레를 임명했다. 12년 동안 구찌에 몸담았지만 사실상 무명에 가까웠던 미켈레와 긴 대화 끝에 누구보다 구찌를 잘 알고 있는 내부 인력을 수석 디자이너로 올리기로 결심한 것이다.
비자리의 믿음 덕분이었을까? 외부의 비웃음과는 달리 미켈레가 발표한 컬렉션 덕에 구찌의 올드한 이미지는 젊고 감각적인 느낌으로 탈바꿈했다. 꽃과 나비, 벌, 새 등을 이용해 과하지만 화려한 패턴과 색채를 구찌 제품에 입힌 것이다. 노골적이지만 자유분방하고 세련된 디자인으로 호평을 받았다.
그 덕에 구찌의 매출은 전년 대비 12%나 상승했고, 다음 해에는 17%로 늘었다. 2017년에는 ‘에르메스(Hermes)’를 넘어섰으며, 드디어 지난해에는 샤넬을 추월하며 세계 2위 명품 브랜드로 지속적인 성장을 보였다. 오늘도 이에 멈추지 않고 구찌는 명품 브랜드 1위인 ‘루이 비통(Louis Vuitton)’을 맹렬히 추격 중이다.

 

구찌는 2017년, 모피 제품 생산을 금지하기로 공식 발표했다. 기존 로퍼에 사용하던 캥거루털은 양털로 대신했다(우) ➊ 종로구에 위치한 대림미술관은 한국 최초의 ‘구찌 플레이스’다. 구찌의 창의적인 비전과 현대 미술, 디자인에 대한 열정을 대림미술관과 함께하는 것이다. ➋ 스니커즈, 선글라스, 모자 등을 증강현실로 착용해볼 수 있도록 만든 공식 구찌 앱 화면. 패션 브랜드 최초의 시도로 온라인 스토어에 바로 연결해 구매할 수 있다.

 

틀을 깬 감각적 경영

 

비자리는 무엇보다 구찌의 올드한 이미지를 벗기 위해 노력했다. 먼저 그는 35세 미만의 사원들이 임원진을 가르치는 멘토링을 시작했다. 나이와 경험이 많은 사람이 멘토가 되는 방식을 깬 것이다. 또한, 임원 회의가 끝나면 30세 미만의 젊은 직원들을 만나서 의견을 들었고 35세 미만 직원들과 점심 모임을 통해 아이디어를 얻었다. 이렇게 얻어진 아이디어는 구찌의 사업 정책에 적극 반영됐다.더불어 그는 기업에 사회적 책임을 요구하는 젊은 세대의 가치관에 맞춰 모피 금지를 선언했다. 실제로 구찌는 2018년 이후 각종 모피 제품을 없앴다. 또한 휴대폰을 제 몸처럼 활용하는 10~20대를 위해 애플리케이션 ‘구찌 플레이스’를 개발했다. 구찌 디자이너가 영감을 받았던 장소를 소개하고, 소비자들이 직접 방문하도록 제안한 것이다.
이 외에도 수십 억 유로를 투자해 구찌 매장 500개를 새롭게 단장했고, 명품 브랜드 최초로 소셜 앱을 활용해 패션쇼를 홍보했다. 이렇듯 젊은 세대를 철저하게 공략한 결과, 현재 구찌 전체 매출의 반 이상을 35세 미만의 소비자가 차지하고 있다.
그는 명확하게 짜인 틀로 브랜드를 경영하지 않는다. 지난 브랜드를 성공시켰다고 다음 맡은 브랜드를 같은 방식으로 운영하지 않는 것이다.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에 무조건적인 모방은 위험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브랜드를 맡으면 무엇을 가장 먼저 해야 하는지부터 파악한 마르코 비자리. 그의 경영 방식으로 앞으로도 승승장구할 구찌가 기대된다.

 

글 노형연 ●사진 위키미디어커먼즈, 구찌 공식 페이스북 페이지, 구찌 공식 애플리케이션 ●진행 전정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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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이 살아온 날보다 오래된 햄버거 회사를 위기에서 끌어올린 젊은 CEO가 있다. 1953년에 문을 열어 60년이 넘은 기업 ‘버거킹’의 CEO를 맡았던 다니엘 슈워츠(Daniel Schwartz)이다. 32세에 CEO가 된 그는 미국의 영향력 있는 경제 잡지 <포브스>가 선정한 ‘40세 이하 가장 영향력 있는 기업가’ 5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기울어지던 기업 ‘버거킹’을 위기에서 살린 다니엘 슈워츠의 비법은 무엇일까?


병원 대신 월가로 향하다

다니엘 슈워츠의 어릴 적 꿈은 의사였다. 의사였던 아버지나 삼촌의 영향으로 막연히 가졌던 장래희망이었다. 하지만 고등학생 때부터 과외를 하며 돈을 벌기 시작한 그는 코넬대에서 경제학과 경영학을 전공하며 기업인으로 진로를 바꿨다. 그는 대학 졸업 후 차곡차곡 경력을 쌓으며 월 스트리트 엘리트 코스를 밟아나갔다. 2005년에는 브라질 투자회사 ‘3G캐피털’에 입사해 3년 만에 회사의 임원 자리에 올랐다. 이는 그의 인생에서 가장 큰 변화의 계기가 됐다. 3G캐피털이 부채 비율이 높은 위기의 버거킹을 인수한 뒤 다니엘에게 CEO 자리를 준 것이다. 그의 나이 고작 32세 때의 일이다. 당시 업계 1위인 맥도날드는 50대 CEO를 필두로 운영되고 있었다. 업계를 놀라게 한 파격적인 인사와 함께 10년을 월 스트리트에 몸담았던 그의 햄버거 인생이 시작됐다.

지난해 버거킹이 유럽에서 출시한 고기가 들어가지 않은 채식주의 버거 ‘레벨 와퍼(Rebel Whopper)’.

35초 안에 와퍼를 만들 수 있는 CEO

다니엘 슈워츠는 모든 것이 현장에 답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먼저 버거킹 매장 주방을 방문했다. 자신에게 부족한 외식업 경험을 채우기 위해 내린 결정이다. CEO였지만 사무실이 아닌 매장에서 유니폼을 입고 직접 햄버거를 만들고 고객의 주문도 받았다. 심지어 화장실 청소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렇게 몇 달 동안 현장을 파악한 그는 문제점을 발견하고 바로 실행에 옮겼다.

먼저 수십 가지에 달하던 메뉴를 대폭 줄였다. 비용 절감을 위해 불필요한 비용도 과감하게 없앴다. 그 비용이 본인에게 주어진 임원 특전일지라도 거절하며 비용을 줄였다. 그는 직원들에게 ‘회삿돈을 내 것처럼’ 써야 한다고 수백 번 강조했다. 대규모 인원 감축은 물론, 회사 직영 매장을 매각해 기존 1300개에서 71개로 확 줄였다. 본사 사무직을 줄이고 고객 서비스 질을 높이기 위해 매장의 직원을 늘렸다. 2012년 46억 달러였던 버거킹의 기업 가치는 2014년 90억 달러(약 10조 6000억 원)를 인정받으며 다시 확고한 2위 햄버거 프랜차이즈 브랜드로 자리매김했다. 지금 버거킹의 지주사 ‘레스토랑 브랜드 인터내셔널(RBI)’의 시가 총액은 443억 달러(약 52조 2000억 원)에 달한다.

 

젊은 감각으로 출시한 신제품

다니엘 슈워츠는 맥도날드를 따라가기 위해 신메뉴를 우후죽순 내놓던 버거킹의 과거를 잊지 않았다. 그래서 신제품을 출시할 때 이전보다 신중하게 접근했다. 경쟁사에는 없는 제품, 자신의 젊은 감각을 반영해 ‘저칼로리 감자튀김’과 다양한 식습관을 반영하기 위해 콩으로 패티를 만든 와퍼, 반려견을 위한 ‘독퍼(Dogpper)’ 등을 내놓은 것이다. 이는 곧 좋은 반응으로 이어졌다. 한정판 메뉴를 만들어 젊은 세대에게 인기를 얻고, 메뉴 설문조사와 모니터링도 꼼꼼하게 진행했다.

와퍼 특유의 직화 구이의 불맛을 느낄 수 있도록 만든 반려견 비스킷 ‘독퍼(Dogpper)’ 캠페인 광고.

 

겸손함은 중요한 미덕

젊은 나이에 성공한 CEO가 된 그는 항상 겸손을 강조할 정도로 성숙한 경영관을 갖고 있다. 그는 직원을 뽑는 면접에서 ‘당신은 머리가 좋습니까, 아니면 열심히 일하는 노력가 형입니까?’라고 질문한다. 열정적이면서 오만하지 않은 사람을 좋아한다며 거만한 자세를 가장 경계했다. 세계 3대 패스트푸드점으로 버거킹을 키운 그는 2019년 1월 CEO 자리에서 물러났다. 직책이라는 틀에 갇히지 않고 직접 현장으로 나선 대표, 그가 다음 문제점을 찾기 위해 현장으로 향할 곳은 어디이며 ‘제 2의 버거킹’ 신화를 쓸 곳은 어디가 될지궁금해진다.

글 노형연 ●사진 위키미디어커먼즈, 버거킹 공식 홈페이지 ●진행 전정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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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누구나 문제라고 여기는 인종차별, 성차별이 당연하게 여겨지던 시대가 있었다. 누군가 이러한 문제를 인식하고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기 시작할 때 변화는 시작된다. 성별에 대한 고정관념이 지배적이었던 때, 법 또한 성별에 따라 다르게 적용되기 일쑤였던 시대에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는 미국 연방의 대법관으로서 사회에 만연한 차별에 반대하며, 미국 사회를 변화시킨 인물이다.

 

사회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찾다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는 1933년 뉴욕 브루클린 유대계 집안에서 태어났다. 다정한 부모님 아래 자란 그는 특히 어머니의 말씀을 잘 따르는 아이였다. 그의 어머니는 ‘분노에 휩쓸리지 마라’, ‘독립적인 사람이 돼라’고 가르쳤으며, 배움을 강조했다. 이러한 어머니의 가르침에 따라 책을 좋아하는 총명한 학생으로 자란 그는 아이비리그 중 하나인 코넬대학교에 진학해 법을 전공한다.
루스 베이더가 대학에 진학할 당시 미국은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이에 따라 정치적 견해나 사상이 다른 사람들은 탄압을 받았다. 그리고 이처럼 부당하게 탄압을 받는 사람들의 인권을 보호했던 사람들이 바로 변호사였다. 이를 본 루스 베이더는 자신도 사회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것이라 생각해 1956년, 로스쿨에 진학한다. 로스쿨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둔 그는 수석으로 졸업했지만, 구직에는 번번이 실패했다. 차별이 만연했던 당시 유대인, 여자, 엄마를 채용해줄 곳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보다 낮은 성적으로 졸업한 남학생은 로펌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는 것을 보고, 그는 자신이 평생 해나갈 일을 깨닫는다. 바로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받는 것에 맞서는 것이었다.

 

 

법으로 차별에 맞서다

루스 베이더가 변호사로 활동하던 때는 법에서부터 차별을 명시하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임신 여성을 합법적으로 해고할 수 있다’, ‘남편은 아내 성폭행으로 기소될 수 없다’와 같은 내용이 있을 정도였다. 이에 불합리함을 느낀 그는 자신의 방식으로 이러한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이때부터 성차별에 관한 사건을 맡기 시작한다. 그렇게 처음 맡은 사건이 1972년, 프론티에로 대 리처드다. 이는 기혼 남자들이 받는 주택 수당을 여자라는 이유로 받지 못하는 데 부당함을 느낀 프론티에로가 소송을 건 것이다. 루스는 이 사건에 자원했다. 승소할 경우, 이 판결이 성차별 법률 폐지에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과는 패소. 결국 대법원까지 가게 된다. 성차별 따위는 없다고 생각하는 대법관을 설득시켜야 했기 때문에 철저한 준비가 필요했다. 단어 하나하나에 심혈을 기울여 구두 변론을 준비했고, 결국 승소했다. 하지만 그의 기대와 달리 성차별을 인종차별과 마찬가지로 불법으로 만드는 데까지는 이어지지 못했다. 그러나 한 번에 법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던 루스 베이더는 계속해서 성차별에 관한 사건을 맡았다.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이 받는 차별을 다룬 사건을 맡아 성차별이 모두에게 동등한 기회와 자격을 누릴 권리를 빼앗고 있음을 세상에 알렸다.

“나는 반대한다”

20년간 변호사로서 차별을 철폐해온 루스 베이더를 눈여겨본 빌 클린턴 대통령은 그를 역사상 두 번째 여성 대법관 후보로 지명한다. 사람들은 루스 베이더가 금방 후보에서 제외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빌 클린턴은 현재와 미래를 위한 법이 무엇인지 고민했고, 루스와 함께 새로운 법을 만들어나갈 수 있을 것이라 판단해 그를 미국 연방 대법원의 107대 대법관으로 지명한다.
그는 미국 연방 대법원 대법관에 취임한 후에도 차별을 철폐하기 위한 행보를 이어나갔다. 가장 먼저 맡은 사건은 ‘연방정부 대 버지니아’다. 당시 버지니아군사대학교는 개교 이래 150년간 남자 생도만긴즈버그받았다. 남학생을 기준으로 한 신체 기준을 총족하며, 생도 과정을 이수할 능력이 있어도 단지 여학생이라는 이유만으로 입학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다. 이에 긴즈버그는 다음과 같은 판결을 내렸다. “여성의 동등한 기회를 제한하는 법률의 효력은 소멸할 것이며 여성의 뜻과 성취와 참여는 제한될 수 없고 여성도 능력에 근거해 사회에 기여할 것이다.”
하지만 정권이 바뀌고 보수 성향이 짙은 다수의 대법관이 임명되자, 보수적인 판결을 내놓는 상황이 잦아졌다. 그때마다 그는 이에 대한 반대의견을 낭독했다. 판결이 소수의 편이 아니더라도, 루스 베이더의 반대의견은 소수의 입장에 있는 사람들에게 희망의 메시지이자 변화의 가능성으로 다가왔다. 올해로 현직 미국 연방 대법관 아홉 명 중 최고령자인 루스 베이더는 역대 최고령 연방 대법관 기록을 눈앞에 두고 있다. 최근 췌장암을 판정받아 많은 이들이 걱정했지만, 이를 딛고 다시 대중 앞에 나섰다. 그리고 그는 여전히 모든 이들이 ‘자유로운 너와 내가 되는’ 날까지 온 힘을 다하고 있다.

 

글 김현홍 ●사진 위키미디어커먼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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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UN이 104개국의 55억 명을 대상으로 생활 수준, 건강, 교육 등을 조사한 결과, 그중 13억 명은 빈곤 속에 사는 것으로 밝혀졌다. 그들을 위해 다양한 방식으로 국제 원조가 이뤄지고 있지만 가난과 빈곤의 고리를 끊을 방법은 정말 없는 걸까? 무함마드 유누스는 가난으로 인해 미처 발휘하지 못한 개인의 잠재력을 믿고 그들에게 소액 융자를 주는 은행을 설립해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했다.

진짜 경제를 찾아 떠난 경제학 교수

무함마드 유누스는 1940년, 대대로 보석 세공 사업을 하는 집안의 자녀 9명 중 셋째로 태어났다. 높은 교육열을 자랑하는 아버지의 경제적인 뒷받침으로 그는 대학을 졸업한 후 방글라데시의 치타공대학교에서 경제학 교수로 부임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방글라데시에 기근으로 많은 사람이 굶어 죽는 일이 발생했다. 주변에서 한 줌의 양식이 없어 죽어가는 사람들을 본 그는 자신이 가르치는 경제학 이론이 현실과는 동떨어진 것처럼 느껴졌다. 이에 자신의 주변에 사는 사람들의 경제 상황을 직접 알아보기 위해 조브라 마을로 향했다.

조브라 마을 사람들은 당시 단돈 20센트가 없어 주변에서 돈을 빌리곤 했다. 은행에서 돈을 빌릴 수 없었기 때문에 고리대금업자를 통해 물건을 만들 재료를 살 돈을 빌린 다음, 만든 물건으로 빌린 돈을 갚았다. 돈을 빌려하루 종일 일을 하고 돈을 갚고 나면 겨우 식구들의 입에 풀칠을 할 수 있을 정도였다. 단돈 20센트에 한 가족의 생계가 달려 있는 것을 본 그는 그들에게 직접 재료를 살 수 있는 약간의 돈만 있다면, 그들이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직접 재료를 사서 물건을 만든다면, 돈을 갚는 것보다 더 큰 이익을 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난한 이들에게 돈을 빌려줄 수 있는 은행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들이 돈을 갚을 능력이 있다는 것을 충분히 증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가난해야 돈을 빌려주는 은행

전통적인 은행의 대출 시스템에서 돈이 많은 사람은 더 많은 돈을 빌릴 수 있고, 가난한 사람은 적은 돈만 빌릴 수 있다. 보증이나 담보가 없는 사람들은 은행에서 대출이 불가능하다. 무함마드 유누스는 이처럼 기존의 은행에서 대출받기 어려운 사람들을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 고민하다 은행으로 찾아갔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을 대신해 보증을 서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은행의 반응은 냉담했다. 담보가 없는 사람에게는 대출해줄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하지만 계속된 설득으로 6개월 만에 1만 타카(당시 환율로 약 240달러)를 대출받아 조브라 마을 사람들에게 소액 융자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것은 지금의 그라민 은행의 시초가 된다.

당시에는 담보도, 보증도 없는 사람을 위한 융자 시스템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새로운 체계를 만들어야 했다. 기존의 은행은 돈을 빌린 후 만기가 될 때 한꺼번에 상환해야 했지만 그라민 은행은 대출 후 일주일부터 1년에 걸쳐 돈을 조금씩 갚을 수 있도록 했다. 또한 그룹 단위로 융자를 제공했기 때문에 융자를 받은 사람들이 그룹 내 다른 사람의 도움도 받고, 서로 융자를 계획에 따라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이 외에도 그라민 은행은 빌려간 돈이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 돈을 빌려간 사람들의 재정 상태는 어떠한지를 꾸준히 체크했다. 그리고 자연재해가 발생해 돈을 갚을 수 없는 상황이 되면 그라민 은행은 이재민을 구호하는 데 힘을 쏟았다. 자연재해 같은 외부 환경으로 인해 그들이 돈을 갚을 수 없다는 무기력함이나 좌절감을 느끼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이처럼 그라민 은행은 기존의 은행과 정반대의 시스템으로 수많은 사람을 가난에서 구제하는 데 성공했고, 1983년 마침내 공식 은행으로 인정받았다.

 

2006년, 무함마드 유누스는 세계 빈곤 퇴치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가난은 가난한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다

그라민 은행에서는 어떠한 신용 평가나 보증도 필요하지 않다. 대신 돈을 갚겠다는 의지와 가능성을 기준으로 돈을 빌려준다. 가난한 사람을 위해 돈을 빌려준다는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많았지만 그라민 은행에서 돈을 빌린 사람들의 상환율은 98%에 달했다. 그라민 은행의 원금 상환율이 98%나 되는 것은 돈을 빌려간 사람들 스스로 이것이 가난을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그라민 은행에서 돈을 빌려간 사람 중 3분의 1은 가난에서 벗어났으며 3분의 1은 가난에서 벗어나기 직전의 단계까지 생활 수준을 끌어올릴 수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그라민 은행은 단순히 돈을 빌려주는 곳이 아니다. 가난한 이들이 환경으로 인해 좌절하지 않고, 그들의 잠재된 능력을 발휘해 스스로 가난의 장벽을 허물 수 있도록 그들을 믿고, 지지하는 곳이다. 가난이란 가난한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라, 사회의 시스템이 만든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이 시스템을 바꾸고자 그라민 은행을 설립했다는 무함마드 유누스는 2006년, 세계 빈곤퇴치에 기여한 바를 인정받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그라민 은행은 현재도 전 세계에 2568개의 지점을 운영하며, 보다 많은 사람이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글 김현홍 ●사진 위키미디어커먼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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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편견을 깬 성공 신화

펩시코 전 CEO 인드라 누이

 

펩시코는 펩시콜라를 비롯해 게토레이, 마운틴듀, 썬칩, 치토스 등 음료와 스낵 브랜드를 보유한 미국의 대표적인 식품기업이다. 음료업계 1위인 코카콜라와의 경쟁에서 뒤처지던 펩시코는 경영 위기를 겪다 2004년 코카콜라의 매출을 앞지르며 회사 설립 100여 년 만에 업계 1위에 올라섰다. 펩시코가 세계적인 기업으로 우뚝 설 수 있었던 것은 전 CEO이자 회장인 인드라 누이의 남다른 경영전략 때문이다.

 

만년 2등을 정상에 올린 탁월한 안목

 

1994년 펩시코에 입사한 인드라 누이는 전략기획과 구조조정 업무를 맡으며 시장 변화에 발 빠르게 대응했다. 웰빙을 추구하는 소비자의 식습관 변화로 탄산음료 시장의 한계를 예측하고 주스, 차, 스포츠 음료 등 건강식품 사업에 주력하는 전략을 회사에 제시했다. 펩시코는 이 제안을 받아들여 KFC, 피자헛, 타코벨 등의 패스트푸드 사업을 정리하고 도리토스, 치토스, 썬칩 등 스낵 사업 비중을 크게 늘렸다. 또 과일주스 생산 업체인 ‘트로피카나’와 시리얼 및 스포츠 음료 업체인 ‘퀘이커오츠’를 인수했다. 특히 퀘이커오츠는 펩시코가 종합 식품 회사로 성장하는 데 큰 발판이 됐다. 코카콜라의 ‘파워에이드’보다 점유율이 크게 앞서는 ‘게토레이’를 생산하고 있어 퀘이커오츠 인수를 통해 건강음료 시장을 주도하게 된 것이다. 펩시코는 인드라 누이의 사업 다각화 전략으로 식품과 스낵, 음료 전 부문에서 급속도로 성장했고, 2004년 코카콜라보다 높은 매출을 기록했다. 입사 10년 만에 펩시코를 회생시킨 인드라 누이는 최고재무책임자를 거쳐 2006년 CEO에 취임, 2007년에는 회장직까지 올랐다.

인드라 누이 체제의 펩시코는 디자인 경영을 내세우며 대대적인 변화에 나섰다. 제품의 맛과 식감은 물론, 제조 공정과 포장, 유통, 마케팅 등 회사 시스템 전반을 새롭게 바꾼 것이다. 매주 매장에 들러 펩시코 제품을 둘러본 누이는 소비자의 눈길을 끄는 매력이 부족한 것을 느꼈고, 제품의 기능과 소비자의 인식을 모두 바꾸는 전략을 고민했다. 그래서 3M 디자이너인 마우로 포르치니를 디자인 책임자로 영입하고, 제품을 만드는 방식을 새로 구성했다. 에너지드링크 ‘마운틴듀’를 리뉴얼한 ‘마운틴듀 킥스타트’와 터치스크린 음료 판매기 ‘펩시 스파이어’는 펩시코 디자인 전략이 성공한 대표적인 사례다. 마운틴듀 킥스타트는 과즙 함량을 높이고 칼로리를 낮춰 출시 직후 약 2380억 원의 매출을 올리며 큰 인기를 끌었다. 또 소비자가 기호에 맞게 맛과 양, 탄산 강도를 선택해 음료를 제조할 수 있는 ‘펩시 스파이어’로 고객 친화적인 마케팅과 유통 전략을 펼쳤다. 인드라 누이는 소비자와 시장 변화를 정확하게 꿰뚫고 대응하는 전략으로 CEO 취임 후부터 지금까지 펩시코의 시장점유율을 80% 이상 늘렸으며, 주가도 2배 이상 올렸다. 또 2018년 세계 기업 순위에서 펩시코가 102위에 올라 209위인 코카콜라를 크게 앞서는 성과를 이뤘다.

 

 

유리천장을 극복한 부드러운 리더십

 

인도 출신인 인드라 누이는 여성의 사회 진출에 보수적인 나라에서 편견과 차별을 극복하고 세계적인 기업의 대표가 됐다.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가르친 어머니의 영향으로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온 누이는 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하고 경영학 석사 학위를 취득, 미국 예일대에서 MBA 과정을 거치는 등 꿈을 이루기 위한 발판을 탄탄히 다졌다. 우수한 성적으로 MBA 과정을 마친 누이는 모토롤라 이사로 스카우트돼 부사장으로 승진하고, 다국적 기업 ABB의 수석 부사장을 맡는 등 세계적인 회사를 거치면서 사업 구조조정과 판매 전략, 기획 분야에서 탁월한 실력을 발휘했다. 위기에 놓인 펩시코를 업계 1위 기업으로 성장시킨 데는 가족 문화를 중시한 누이의 리더십도 큰 역할을 했다. 직원들에게 가정과 개인 생활이 안정적이어야 일을 잘할 수 있다고 조언하며 일과 가정의 조화를 강조했고, 임직원의 가족에게는 감사 편지를 전하기도 했다. 또 직원들을 이해하고 배려하며 자발적인 문화와 끈끈한 조직력을 이끌어냈다. 직원이 하고 싶은 일을 적극적으로 추진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회의 때는 격의 없이 소통하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힘썼다. 이렇게 부드러운 리더십을 발휘한 인드라 누이는 미국 언론사가 선정하는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지도자’ 순위에서 1위로 꼽혔고, 2018년 <CEO WORLD> 잡지에서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CEO’로 선정되기도 했다. 펩시코 CEO 중 가장 오랫동안 자리를 지킨 인드라 누이는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을 갖기 위해 지난해 10월 CEO직에서 물러났다. 펩시코는 12년 동안 회사의 성장을 이끌어온 누이 회장의 경영 철학을 계속 이어갈 계획으로 건강식품 사업을 확대하고 있다. 여성, 그리고 외국인으로서 차별을 넘어서고 업계 최고 자리에 오른 인드라 누이. 기업의 위기를 구한 상징적인 리더로 꼽히는 그의 다음 행보가 무엇일지 전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

 

글 강서진 ●사진 REX, 위키미디어커먼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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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탁’ 스럽게!
산업 디자이너 필립 스탁런던

“나는 부자를 위해 2억 달러짜리 요트를 만들고, 가난한 사람도 살 수 있는 2달러짜리 우유병도 디자인한다”는 말처럼 작은 소품부터 건축에 이르기까지 세상의 모든 것을 디자인하는 필립 스탁. 분야를 가리지 않고 뛰어난 독창성을 보여주며 오랫동안 디자인계의 거장으로 꼽히는 필립 스탁의 남다른 비결은 무엇일까?

글 강서진 ●사진 REX, 위키미디어커먼즈

디자인의 편견을 깨다

 

프랑스의 산업 디자이너 필립 스탁은 세계 3대 디자이너로 손꼽힐 만큼 국제적인 명성을 얻고 있다. 1960년대부터 디자이너로 활동해 실용적이면서도 감성적인 디자인, 고정관념을 깨는 제품을 지속적으로 선보이며 대중의 주목을 받았다. 70살이 된 지금까지도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스탁이 디자인계의 전설로 불릴 수 있는 건 제품뿐만 아니라 인테리어, 건축, 요트, 모터사이클 등 다양한 분야에서 창의적인 재능을 뽐내고 있기 때문이다. 오징어와 외계인을 형상화한 착즙기, 투명한 플라스틱 의자, 휴대용 TV, 세라믹 소재의 스마트폰 등 기존 제품들과 모양이나 소재, 기능, 디자인을 차별화한 스탁의 제품은 큰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주시 살리프(Juicy Salif)’ 착즙기는 눈에 띄는 독특한 디자인과 기계적 장치가 없는 간편한 사용법으로 많은 사람에게 알려지며 필립 스탁의 대표작이 됐다. 투명한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져 유령 의자로 불리는 ‘루이 고스트 체어’는 전 세계에서 연간 5만여 개가 판매되는 베스트셀러다. 이 제품은 튼튼하고 가벼우며 착석감이 편안해 플라스틱은 딱딱하고 불편하다는 편견을 깼으며, 특정한 컬러가 없어도 어느 공간이든 잘 어울려 예술성과 실용성을 고루 갖춘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스탁은 건축 디자인에서도 뛰어난 상상력을 펼쳤다. 일본 맥주 기업인 아사히의 건물 ‘비어홀’은 스탁이 디자인한 대표적인 건축물로 꼽히는데, 건물 꼭대기에 맥주 거품을 형상화한 조형물을 만들어 도쿄의 명소가 됐다.
여러 분야에서 반짝이는 아이디어를 보여주는 스탁의 작품은 파리,스탁런던, 뉴욕 등 세계 박물관과 미술관의 소장품으로 채택되고, 작품전이 열리기도 했으며 1985년에는 최우수 아트디렉터로 선정됐다. 이후 하버드 디자인 우수상을 비롯해 바르셀로나, 시카고, 뉴욕, 이탈리아 등에서 수많은 디자인상을 휩쓸며 부와 명예를 얻었다.

자유로운 상상력이 경쟁력

 

필립 스탁이 디자인해 파리의 명소가 된 레스토랑 ‘콩(Kong)’. 유리로 덮인 돔 형태의 공간은 스탁이 만든 의자와 테이블로 채워져 있다.


 

디자이너로서 세계적인 입지를 탄탄히 다진 필립 스탁이 틀에 얽매이지 않은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건 자유롭게 상상할 기회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파리의 디자인 스쿨에 진학했지만, 공부에 회의를 느껴 자퇴 후 독학으로 디자인을 배웠다. 어릴 때부터 물건을 분해하고 조립하는 것을 좋아한 스탁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게 취미였고, 항공기 엔지니어인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기계에도 관심이 많았다. 19살에는 헬륨 풍선을 이용해 공중에 떠다니는 램프를 생각해내고 공기 주입식 제품들을 생산하는 회사를 세웠다. 스탁의 도전 정신과 아이디어를 높이 평가한 유명 패션 기업 ‘피에르 가르뎅’은 20살인 그를 아트 디렉터로 고용했고, 스탁은 일과 공부를 병행하며 디자인 역량을 쌓아갔다. 디자이너로 활동한 지 7년 차가 되던 1976년에는 파리의 한 나이트클럽 실내 디자인을 맡게 되며 업계에 이름을 알렸고, 1979년에 독립 회사인 ‘스탁 프로덕트(Starck Product)’를 설립해 의자, 조명, 주방용품 등 그가 디자인한 것들을 상품화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1982년에 프랑스 대통령 사저의 인테리어를 맡아 고풍스러운 디자인을 선보였는데, 특히 영부인 침실의 쿠션 의자가 독창적인 제품으로 평가받으며 공간 디자이너로도 인정받게 됐다. 이후 스탁은 파리의 카페와 레스토랑, 뉴욕과 홍콩의 호텔 등 세계 주요 도시의 건축물과 실내 디자인을 창조해내며 세계적인 디자이너이자 건축가로 거듭났다.
 

사람과 환경을 사랑한 크리에이터

 

필립 스탁이 레스토랑에서 오징어 요리를 먹다가 아이디어를 얻은 착즙기
‘주시 살리프’


 

생활용품부터 패션, 전자기기, 건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산업에서 ‘스탁 스타일’의 디자인이 창출되며 파리의 한 도심 거리에는 필립 스탁이 디자인한 것들로 꾸며진 ‘스탁 거리’가 생겼다. 또 ‘스탁 라이프스타일’이라 불리는 문화가 조성돼 스탁이 만든 공간과 제품을 즐기는 스탁 마니아들도 생겨났다. 스탁이 만든 제품이 세계적으로 주목받으면서 유명 기업들은 스탁과 협업을 진행했고 중국 전자회사 샤오미의 스마트폰을 비롯해 러시아의 호화 요트, 세계 최초 인공지능 의자 등을 디자인했다. 또 우주여행 비행선과 정거장 객실, 젤라틴 소재의 미래형 스마트폰 등의 디자인을 제안하며 끊임없이 혁신을 거듭하는 디자이너로 평가받고 있다.

필립 스탁이 큰 성공을 이룬 것은 뛰어난 감각과 재능뿐만 아니라, 인간의 더 나은 삶을 연구한다는 신념이 있기 때문이다. ‘디자인의 시작은 인간에 대한 사랑’이라고 소신을 밝혀온 그는 카페 웨이터들이 음식을 나르다 의자 다리에 부딪히는 걸 보고 다리가 세 개인 의자를 개발했다. 또 환경에 해로운 생산 방식을 고수하는 기업들과는 일하지 않았을 정도로 남다른 윤리 의식을 지녀 친환경 플라스틱을 이용한 의자를 만들기도 했다.

“디자인의 핵심은 아름다움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 그들의 삶을 좀 더 편하게 해주는 것이다. 그것이 디자인의 역할이다”라고 필립 스탁이 말한 것처럼 그는 디자이너를 넘어 사람들의 삶을 이롭게 만드는 창작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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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 특별한 장점이 되다

동물학자 템플 그랜딘

 

콜로라도 주립대학교 동물학 교수 템플 그랜딘(Temple Grandin)은 소에게 스트레스를 주지 않는 축사와 도축장의 구조를 개발한 사람이다. 미국과 캐나다, 뉴질랜드 등 낙농업이 발달한 국가의 축사는 절반 이상 그가 설비한 이 시설을 사용하고 있다. 100편이 넘는 동물학 논문을 발표하기도 한 템플 그랜딘의 동물학 연구의 원동력은 ‘자폐증’, 아스퍼거 증후군이었다.

글 전정아 ●사진 위키미디어커먼즈, 템플 그랜딘 공식 홈페이지

 

장애는 모자란 게 아니라 다른 것

 

템플 그랜딘이 앓는 ‘아스퍼거 증후군’은 지적 장애 및 언어 능력이 떨어지지 않는 자폐증이다. 특정 행동을 반복하거나 한 가지 일에 집착하곤 한다. 대인관계에 서툴러 고립돼 지내는 경향이 있으며, 다른 사람의 느낌, 생각, 욕구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표정을 읽지 못한다. 하지만 그에 비해 그랜딘의 시각 지각 능력과 기억력은 거의 천재적인 수준이었다. 한마디로 직관 기억력, 즉 그림으로 보고 그림으로 생각할 수 있었다. 짧게 본 내용도 사진처럼 선명하게 기억했다.

 


 

그랜딘이 태어난 해인 1947년은 자폐성 장애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시대였다. 그는 두 살 때 뇌에 장애가 있다고 진단받아 평생을 보호시설에 맡겨질 뻔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그랜딘을 포기하지 않고 가정교사와 함께 말과 예의범절 등 사회생활을 가르쳤다. 중학생 때는 자신을 놀리는 아이를 때려 퇴학당하고 신경발작 증세로 고통을 겪기도 했지만 어머니와 정신과 주치의의 도움으로 마운틴 컨트리 고등학교에 입학해 그곳에서 윌리엄 칼록(William Carlock) 선생을 만나게 된다. 칼록은 그랜딘의 한 가지에 집착하는 성향을 장애로 취급하지 않고 창의적인 일을 할 수 있도록 이끌었다. 이후 그랜딘은 칼록의 응원과 도움으로 대학에 진학해 프랭클린 피어스 칼리지에서 심리학을 전공했다. 이에 그치지 않고 어릴 적부터 관심이 있던 동물을 공부하기 위해 애리조나 주립대학교에서 동물학 석사를, 일리노이 대학교에서는 동물학 박사 과정을 밟았다.

그는 자폐인과 비자폐인의 차이점을 이해하려는 노력도 멈추지 않았다. 자기공명영상(MRI)이 막 개발되던 1980년대 후반, MRI를 찍고 뇌영상 연구에 참여해서 자신과 일반인의 두뇌가 작용하는 차이를 연구하기도 했다. 그 결과 자신의 균형 감각이 좋지 않은 것은 소뇌가 작기 때문이고, 뇌 여러 영역을 잇는 ‘백색 섬유다발’이 일반인보다 과하게 연결돼 있어 시각적인 기억, 즉 모든 것을 ‘그림으로 생각’하는 까닭을 알아낼 수 있었다.

 

템플 그랜딘은 2010년, 세계에 큰 영향력을 끼친 사람을 뽑는 ‘타임지가 선정한 100인’ 중 한 명으로 뽑혔다. 그의 일화를 다룬 영화 <템플 그랜딘(temple Grandin)>(2010)은 에미상 7개 부문을 수상하기도 했다.

 

템플 그랜딘이 그린 기본적인 소 사육 시설의 설계도.


 

“모든 생명은 소중합니다. 소에게 친절하게 대하세요”

 

템플 그랜딘이 설계한 ‘자비로운 도축장(Humane Slaughter)’의 특징은 소가 받을 스트레스와 공포를 최대한 줄일 수 있는, 짐승에게 최적화된 동선을 갖춘 것이다. 자비로운 도축장은 소들이 일렬로 도살장으로 따라 들어가게 만들어서 뒤에 있는 소가 앞선 소의 엉덩이밖에 볼 수 없게 하고, 마지막 순간에는 소가 미처 알아차리기도 전에 발이 땅에서 떨어지게끔 설계했다. 이렇게 도살장에 들어가게 만든 뒤에는 공기압력 총으로 머리의 정중앙을 쏴 소를 죽이는 것이다.

그는 소를 도축하기 전, 짐승이 살아 있는 동안만이라도 불안한 마음을 갖지 않도록 돕는 것이 동물에게 고마움을 전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축사에서 1시간에 300마리씩 씻기는 과열된 과정 속에서 여러 마리의 소가 물에 빠져 죽는 것을 본 그랜딘은 소가 편안하게 씻을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축사 입장에서도 비용 절감에 도움이 된다고 주장했다.
그랜딘은 도축장을 설계하기 전 먼저 소를 꾸준히 관찰했다. 그 결과 소가 둥글게 빙빙 도는 방식을 좋아하며, 갑작스러운 빛에는 과민하게 반응하지만 사람이 소의 경계 범위 안에 들어가지 않으면 얌전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렇게 이동 방향과 특성에 맞춰 소의 본능을 최대한 고려하면 소가 안정된 상태로 물에 자연스럽게 들어가기 때문에 편안히 씻길 수 있었다. 이처럼 그랜딘이 동물의 감정을 쉽게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한번 보고 들은 것을 말과 문자가 아닌 이미지로 기억하는 그의 ‘특성’ 덕이기도 했다.

그랜딘은 지금도 미국 축산업계 내의 동물 복지와 식품 안전성 개선을 위해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동물 복지가 향상된 환경에서 자란 가축이 질병에 강하고, 이는 나아가 더 나은 식품을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동물복지학의 선구자로서, 그리고 자폐증에 대한 일반인의 인식을 변화시킨 사람으로서, 그가 앞으로 또 어떤 선한 영향력으로 세상을 바꿀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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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차 산업혁명 시대에 주목할 만한 유망 산업을 꼽으라면 단연 드론이 대표적이다. 사람이 탑승하지 않고 조종과 비행이 가능한 드론은 처음에 군사용 무인항공기로 활용되다 현재는 택배, 공중촬
영 등 다양한 산업에 널리 쓰이며 대중화하고 있다. 또 많은 사람이 드론을 취미로 즐기게 되면서 드론 시장이 급성장했는데, 이런성과를 이끈 기업이 중국의 DJI다. DJI는 뛰어난 기술력을 선보이
며 중국을 넘어 세계 최대 드론 업체로 성장했고, 현재 업계 1위로 꼽히고 있다. ‘드론계의 애플’이라 불리는 DJI는 어떻게 세계 시장을 장악할 수 있었을까?

글 강서진 ● 사진 REX, 위키미디어커먼즈

 

세계 1위 드론 기업으로 성장

 

DJI는 2018년 4조 8000억 원의 매출을 기록하며 전 세계 민간용 드론 시장에서 70% 이상의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다. 업계에서 독보적인 기술력과 디자인을 갖춘 제품을 지속적으로 선보이는 DJI는 세계 드론 시장을 개척하고 있다는 점에서 스마트폰 시장을 선점한 미국 ‘애플’과 닮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DJI가 세계인의 이목을 끌 수 있었던 건 창업자이자 CEO인 왕타오가 ‘품질 제일주의’를 고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DJI 전체 직원 중 약 30%가 드론 기술 연구원으로, 왕타오는 기술 개발에 대한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

DJI가 세계 1위 기업이 되는 데 신호탄이 된 제품은 2012년 출시한 ‘팬텀’이다. 팬텀은 비행 중 발생하는 진동을 흡수하는 ‘짐벌(gimbal)’ 장치를 달아 바람이나 외부 요인에 의해 기체가 흔들리지 않으며, 카메라를 장착하고 5km를 비행할 수 있다. 당시의 제품들은 바람이 불면 드론이 심하게되자 큰 인기를 끌었다. 사용자가 필요로 하는 모든 장치를 갖춘 완제품을 개발한 것도 특징이다. 과거에는 드론의 본체와 영상 촬영 장치, 비행 제어 장치 등 주변기기나 프로그램을 일일이 조립해야 하는 DIY 제품이 대부분이었다. 왕타오는 기계를 잘 다루지 못하는 사람들도 쉽게 사용할 수 있는 드론의 필요성을 파악하고, 고화질 카메라와 영상 송출 장치 등 항공 촬영에 필요한 모든 기능을 갖춘 드론을 내놓았다. 또 스마트폰 앱으로 드론을 제어하거나 20km 이상의 장거리를 비행하는 제품, 작고 가벼운 접이식 드론 등 대중이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드론을 개발했다. 이 밖에도 10kg 이상의 무거운 물체를 실어 나르는 농업용 드론과 전문 영상 장비 등 다양한 산업용제품을 출시하며 우수한 기술력을 인정받고 있다.

제품의 품질 외에 저렴한 가격과 발 빠른 신제품 출시 전략도 소비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요인이다. DJI는 수백 개에 이르는 특허 기술로 5~6개월마다 새로운 디자인과 기능을 갖춘 신제품을 선보인다. 보통 2~3년마다 신제품을 출시하는 드론 업체들은 쉽게 따라 할 수 없는 정책이어서 DJI 제품이 드론 시장을 선점할 수밖에 없다. 또 본사와 공장이 인접해 부품이나 제품 운송 비용을 줄일 수 있기 때문에 제조 원가를 낮추고 제품을 저렴하게 판매하고 있다. 우수한 품질, 세련된 디자인, 저렴한 가격을 모두 갖춘 DJI 제품은 전체 생산량의 80%가 해외로 수출되고 있어 세계적인 기업으로 자리 잡고 있다.

‘드론’만 생각한 열정이 성공의 밑거름

 

미국 경제 전문지 <포브스>는 왕타오의 자산을 약 3조 5000억 원으로 추산하며 최연소 억만장자로 꼽았다. 올해 39세인 왕타오가 일찍이 경제적으로 성공할 수 있었던 건 좋아하는 일을 뚝심 있게 해왔기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모형 비행기에 관심이 많았던 왕타오는 원격조종 헬기를 만드는 엔지니어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공과대학으로 유명한 미국 MIT와 스탠퍼드 대학에 지원했지만 불합격했고, 차선책으로 선택한 사범대는 적성에 맞지 않아 자퇴했다. 원하는 공부를 하기 위해 공대에 다시 도전한 왕타오는 홍콩과학기술대 전자공학과에 입학해 원격조종 비행 시스템 연구에 매진했다. 그는 학점이 뛰어난 편은 아니었지만 무선 헬기에 대한 열정만큼은 누구보다 빛났고, 그런 재능을 높이 평가한 학과 교수의 도움으로 대학원에 진학할 수 있었다.

비행 시스템 연구를 계속할 수 있게 된 왕타오는 홍콩 로봇 경진대회에서 1등을 차지하며 우승 상금으로 DJI를 창업했다. 왕타오는 책상과 침대만 있는 작은 사무실에서 생활하며 드론 개발에 몰두했다. 처음에는 소형 헬기에 연결하는 영상 장치를 개발하다 2008년에 4개의 프로펠러가 달린 드론을 만들 수 있었다. 이후 카메라를 장착한 ‘팬텀’을 개발하고 창업 6년 만에 사업이 빛을 보기 시작했다. 어릴 때부터 직접 소형 헬기를 다루며 느꼈던 단점을 개선하고자 ‘누구나 쉽게 조종할 수 있는 드론’을 개발하려 노력했고, 팬텀은 그 목표가 그대로 실현된 제품이었다. 기존 드론과는 달리 교육
과 훈련을 받지 않아도 쉽게 조작할 수 있다는 점이 대중의 눈길을끈 것이다.

작은 사무실에서 시작한 DJI가 전 세계에 진출하고, 1만 2000여 명의 직원을 둔 거대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건 소비자 입장에서생각하고 제품을 개발하는 철칙 때문이다.

 

글 이수진 ●사진 위키미디어커먼즈

 

좋은 음악은 장르를 가르지 않는다

앤드루 로이드 웨버는 웨스트엔드를 뮤지컬의 메카이자 공연 예술의 명소로 만드는 데 중요한 공을 세운 인물이다. 또한 뮤지컬의 대표 격인 <캣츠>나 <오페라의 유령> 등을 무대에 올렸고 클래식과 팝, 민속음악, 성가 등 장르를 가로지르며 새로운 형식의 뮤지컬 음악을 만들었다. 왕립음악대학의 교수이자 작곡가였던 아버지와 피아노 교사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앤드루는 네 살 때 주법에 맞게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등 클래식 음악에서도 천재적 재능을 보였지만 정작 그의 흥미를 끈 건 뮤지컬 음악이었다. 연극배우였던 숙모가 보여준 뮤지컬 <마이 페어 레이디>와 <지지> 속 음악에 매료된 것이다.

 

부적응 속에서 발견한 새로운 길

음악적 재능이 풍부했지만 처음 들어간 대학에서는 역사학을 공부했다. 그러나 이내 흥미가 없다는 걸 깨닫고 아버지가 재직 중인 왕립음악대학에 편입한다. 앤드루는 이곳에서도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앤드루가 원하는 건 선배들이 해온 방식 그대로를 되풀이하는 것처럼 보이는 클래식 음악이 아니라 그것에 대중음악을 접목한 새로운 장르였다. 당시에 클래식과 대중음악을 결합한 음악은 매우 생소한 장르였다. 하지만 원하는 것이 명확했기 때문에 자신을 믿고 새로운 길을 선택하기로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자기보다 세 살 많은 법대생에게 한 통의 편지를 받게 된다. 편지에는 자신은 앤드루의 음악에 최고의 가사를 쓸 수 있는 재능을 가진 사람이라고 적혀 있었다. 평생의 파트너로 불리는 팀 라이스였다.

앤드루 로이드 웨버의 데뷔작인 <요셉과 놀라운 색동옷>(왼쪽).
<캣츠>는 세계 4대 뮤지컬로 꼽힐 정도로 세계인의 사랑을 받고 있다.

 

평생의 파트너를 만나다

앤드루와 팀은 자라온 환경은 물론 성격도 매우 달랐다. 그러나 앤드루에게는 천부적인 음감과 작곡 실력이 있었고 팀에게는 빼어난 가사를 쓸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둘은 첫 작품으로 아일랜드의 자선사업가 토머스 베르나르도의 실화를 다룬 음악극 <우리들의 유사함>을 만들었다. 그러나 세상은 그들을 알아봐주지 않았다.

두 사람은 다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콜렛 코트 초등학교에서 재밌는 의뢰가 들어온다. 학생들의 학예회에 올릴 뮤지컬을 제작해달라는 제안이었다. 단, 조건이 있었다. 성경 속 이야기가 담겨 있어야 했다. 앤드루와 팀은 구약성경에 나오는 요셉의 이야기로 15분짜리 뮤지컬을 만들었다. 앤드루의 데뷔작으로 알려진 <요셉과 놀라운 색동옷>이 탄생한 것이다. 그는 이때도 가스펠만을 토대로 작곡하는 것이 아니라 팝이나 록 같은 대중적인 음악을 섞어서 작곡을 시도했다. 그 결과 로큰롤과 컨트리 음악, 트리니다드트리니다드섬 원주민의 민속음악인 칼립소를 결합한 새로운 형식의 칸타타 곡이 탄생했다. 대성공이었다. 그 후 어느 중학교에서 합창곡으로 부를 수 있게 편곡해달라는 의뢰가 들어왔다. 강당에서 합창곡을 듣던 학부모 중에는 <런던 선데이 타임스> 기자도 있었다. 빼어난 작품에 감탄한 기자는 평론을 썼고 드디어 사람들은 그들의 작품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획기적이지만 대중적인 작품 세계

두 사람은 그 후로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를 만들며 또 한 번 기발한 작품을 내놓는다. 예수를 히피 기질이 있는 인간적인 모습으로 그려 기독교와 유대교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그러나 종교에 관심이 없었던 젊은이들은 오히려 예수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후 앤드루는 <캣츠>와 <오페라의 유령> 등을 제작하며 명실공히 뮤지컬의 제왕으로 자리 잡는다. T.S. 엘리엇의 동시를 오마주한 <캣츠>는 매우 획기적인 방법으로 제작했다. 당시 뮤지컬 제작 구조에는 완성된 가사에 곡을 붙이는 경우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앤드루는 자신의 음악적 감각을 믿었고 <캣츠>는 대성공을 거뒀다.

앤드루는 성공에 유리한 조건을 갖춘 인물이다. 천부적 재능과 주변 사람들의 시선에 아량곳하지 않는 배짱, 안주하지 않고 늘 새로운 것을 생각해내는 부지런함까지. 무엇보다 그는 비즈니스에 대한 감각이 있었다. 수많은 예술가가 재능을 인정받아도 평생 가난하게 사는 데 비해 앤드루는 예술적 재능과 비즈니스 감각으로 명성과 부를 전부 얻었다. 그리고 일흔이 넘은 오늘날에도 과거의 성공에 안주하지 않고 제작에 참여하는 등 뮤지컬을 향한 멈추지 않는 사랑을 드러내고 있다.

 

 

가격을 내릴수록 기업은 성장한다
코스트코 설립자 짐 시네갈

글 김현홍 ● 사진 위키미디어커먼즈



코스트코는 전자제품, 식료품, 생활용품 등의 제품을 판매하는 창고형 대형 할인점이다. 쿠키, 치즈케이크, 연어 등 푸짐한 양은 물론 높은 품질과 저렴한 가격으로 전 세계적으로 소비자들에게 인기가 많다. 우리나라에서 대형 할인 마트들이 줄줄이 폐점하는 동안에도 코스트코만은 고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특히 코스트코 양재점은 전 세계 매장 중 매출 1위(2012년도)를 차지할 정도였다.
세계적으로 유통업이 위기를 맞고 있는 지금, 코스트코의 매출은 해마다 증가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거기에는 최소한의 이익을 추구하더라도 소비자들에게 질 좋은 제품을 낮은 가격에 제공하고자 했던 짐 시네갈의 경영 철학이 있다.

아르바이트로 시작한 곳에서 29년간 일하다

 
짐 시네갈은 1936년 미국 펜실베이니아주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을 혼자 키울 형편이 되지 않아 시네갈을 보육원에 보냈다. 그래서 그는 11살 때까지 그곳에서 자랐다. 이후에는 어머니와 살았지만 경제적 지원을 받기 어려워 어릴 때부터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 다.
대학에 진학한 후에도 아르바이트를 계속하던 짐 시네갈은 친구의 부탁으로 우연히 미국 최초의 창고형 마트인 ‘페드 마트’에서 매트리스 하역 일을 하게 된다. 이때 짐 시네갈은 처음으로 대형 할인 매장 일을 접하고, 이 일이 자신에게 맞는다는 생각이 들어 페드 마트에 정식 입사한다. 이를 시작으로 25년간 페드 마트의 CEO였던 솔 프라이스의 밑에서 일하며 수석 부사장 자리까지 오른다.
하지만 페드 마트의 사업주가 바뀌고 멘토 같은 존재였던 솔 프라이스가 회사를 떠나자, 짐 시네갈도 퇴사를 결심한다. 그리고 솔 프라이스가 새롭게 설립한 ‘프라이스 클럽’으로 직장을 옮긴다. 하지만 짐 시네갈은 언젠가 독립된 회사를 꾸리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29 년간 함께 일한 솔 프라이스를 떠났고, 그의 나이 49세에 창업을 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리고 자신의 경력을 살려 대형 유통 할인매장 코스트코를 창립한다.

최저 가격, 최대 만족의 원칙을 고수하다

 
짐 시네갈은 ‘가치를 창출하고 직원과 고객을 섬김으로써 주주들에 게 보답하라’고 했던 솔 프라이스의 영향을 받아 ‘최상의 제품과 서비스를 최저 가격에 제공하는 것’을 코스트코의 사명으로 삼았다. 이러한 경영 철학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마진율 15% 규칙’이다. 이 규칙으로 고객에게 상품과 서비스를 최저가에 제공하고, 기업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이익을 확보하겠다는 것이다. 보통 유통업계가 20~30%, 백화점이 50%까지 마진을 내는 것에 비해 그 절반에도 못 미치는 수준을 유지하겠다고 한 것은 매우 파격적인 정책이었다.
대신 코스트코는 저렴한 제품을 ‘많이’ 파는 것으로 승부를 봤다. 일례로 스타벅스의 CEO 하워드 슐츠는 짐 시네갈의 끈질긴 설득 끝에 코스트코에서만큼은 싼 가격에 다량의 제품을 판매할 정도다. 꾸준히 고객의 선택을 받기 위해서는 저렴한 가격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제품의 품질이 보장돼야 한다. 그래서 짐 시네갈은 소수의 엄선된 제품만 판매하는 전략을 폈다. 실제로 코스트코에서 판매하는 품목은 4000여 가지로, 경쟁사인 월마트가 10만 가지 넘는 품목을 판매하는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적은 품목만 취급한다. 이로써 물품을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게 됐을 뿐만 아니라 관리 비용을 줄여 제품 가격을 더욱 절감시키는 효과를 냈고, 이는 곧 코스트코의 정체성이자 경쟁력이 됐다.
 

코스트코 매장 내부. 적은 품목을 대량으로 판매하는 짐 시네갈의 경영 방식이 엿보인다.

코스트코의 지속적인 성장 동력

 
기업은 이윤 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집단이다. 하지만 짐 시네갈이 코스트코를 경영하는 방식은 이와는 거리가 먼 것처럼 보인다. 보통의 기업은 이윤을 최대화하기 위해 고민하지만, 짐 시네갈은 이윤을 많이 내면 낼수록 더욱 저렴한 가격을 만들기 위해 힘썼기 때문이다. 그의 이러한 경영 방식은 ‘마진율 15% 규칙’을 만들어냈고, 2008 년 금융 위기 때에도 제품 공급업체를 설득해가며 이 비율을 지켜 고객의 신뢰가 무너지지 않게 했다. 이런 노력으로 코스트코는 창업한 지 30년이 되기도 전에 매출액 148조 원에 이르는 세계적인 할인매장이 될 수 있었다.
지금도 코스트코는 740여 개의 매장에 9000만 명이 넘는 회원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 중 90%는 매년 재가입할 정도로 높은 만족도를 자랑한다. 현재 짐 시네갈은 CEO 자리에서 물러났지만 코스트코는 창업 당시의 규칙을 지키며 꾸준히 성장하는 대형 할인매장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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