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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롤모델

글 이수진 ● 사진 발뮤다(BALMUDA)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는 홍차와 마들렌의 향기를 통해 어린 시절의 기억을 되살리는 장면이 나온다. 특정한 상황에서 겪은 미각, 후각 등의 감각적 체험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특히 기분 좋은 경험이라면 더욱 그렇다. ‘발뮤다’ 창업자 테라오 겐은 맛있는 빵 냄새, 창문에서 불어오는 자연 바람처럼 일상에서 경험하는 기분 좋은 순간을 발뮤다의 가전제품에 담았다.

테라오 겐은 고등학교를 그만두고 17살 때 배낭여행을 하다 스페인에서 배고픔 끝에 갓 구운 빵을 먹은 적 있다. 그는 감격한 나머지 눈물을 흘렸고 어른이 될 때까지 그 맛을 잊지 못했다. 사업가가 된 테라오 겐은 스페인에서 먹었던 빵 맛을 기억하며 발뮤다의 토스터를 만들었다.

 

사용할수록 즐거움을 느끼는 가전제품

 

일본의 가전제품 회사인 발뮤다의 기본 철학은 사용자에게 즐거움을 주는 가전제품을 만들자는 것이다. 발뮤다가 지금까지 만든 제품은 노트북 거치대 ‘X-베이스’, LED 스탠드 ‘에어라인’, 난방 기기 ‘스마트히터’, 공기청정기 ‘에어엔진’, 가습기 ‘휴미디파이어’, 공기 순환기 ‘그린팬 서큐’, 선풍기 ‘그린팬’, 전기 주전자 ‘더 팟’, 토스터 ‘더 토스터’, 전기밥솥 ‘더 고항’까지 총 10개의 제품이다.

테라오 겐은 특정한 순간에 경험하는 기분 좋은 느낌을 가전제품 기술에 구현했다. 즉 눈에 보이지 않는 추상적 가치를 가전제품이라는 가시적 도구에 담은 것이다. 이를테면 발뮤다의 토스터는 여행지 스페인에서 맛본 빵의 맛을 기준으로 만들어졌다. 테라오 겐이 스페인에서 먹은 빵은 갓 만들어진, 속은 부드럽지만 겉은 바삭한 빵이었다. 발뮤다의 토스터는 그런 식감의 토스트를 위해 기존의 굽기 방식에 스팀 기능을 추가했다. 수분을 더해 속은 부드럽게 유지시키면서겉을 바삭하게 구워주는 것이다. 국내에서 인기가 좋은 그린팬 역시 일상에서 경험할 수 있는 기분 좋은 순간에서 영감을 얻어 만들어졌다. 그린팬은 이중나선 구조로 팬의 모양을 독특하게 만들어 창문에서 불어오는 자연 바람을 구현한 기술이다.

 

아이디어부터 제조까지 혼자 시작한 창업

발뮤다가 제일 먼저 만든제품인 노트북 거치대 ‘X-베이스’ .

 

테라오 겐은 발뮤다를 창업하기 전 뮤지션을 꿈꿨다. 고등학교 시절문과, 이과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대신 학교를 그만둔 그는 배낭여행을 떠나 1년간 지중해 부근을 방랑한다. 테라오 겐은 그때의 고생스러운 여행을 통해 앞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고 한다. 유럽에서 돌아온 뒤 록 스타가 되겠다는 포부를 안고 음악활동을 시작했지만 원하는 만큼의 결실을 얻지는 못했다. 최선을 다했지만 결과가 좋지 못한 음악을 과감히 포기하고 앞으로 무엇을 하면 좋을지 고민하던 중, 작곡을 하기 위해 사용한 컴퓨터와 의자의 활용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곧, 도구는 자신의 일상을 뒷받침해주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아가 테라오 겐은 더 나은 도구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에 스스로 제품을 개발하고 디자인하기 위해 전자상가를 열심히 다니며 전자 기기의 구조나 소재에 대해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 뒤 생산 현장을 직접 찾아다니며 기계 작동법, 알루미늄 및 스테인리스 스틸 가공과 조립 등의 작업을 익혔다. 현장에서 온몸으로 기기 제조를 익힌 뒤에는 CAD를 배웠고, 마침내 발뮤다의 첫 제품이라고 할 수 있는 노트북 거치대를 만들었다. 판매를 위해 테라오 겐이 선택한 전략은 ‘니치(Niche)’였다. 니치란 틈새를 공략하는 마케팅 기법으로, 테라오 겐은 애플의 매킨토시 노트북을 사용하는 소비자를 주 구매층으로 잡았다. 테라오 겐은 매킨토시 사용자 커뮤니티에서 자신이 만든 노트북 거치대를 홍보했다. 발뮤다의 첫 제품은 특정 소비층을 공략한 기발한 발상이었지만 곧 파산 위기에 처하고 만다. 미국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세계 금융위기를 맞은 사람들의 소비생활이 위축되었기 때문이다.

작지만 강한 기업 발뮤다의 첫 제품이 출시됐을 때 회사 직원은 테라오 겐을 포함해서 단 3명이었다. 당시 판매고는 4500만 엔, 적자는 1400만 엔, 빚은 3000만 엔(약 3억 원)이었다. 파산 위기를 느낀 테라오 겐은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회사가 망하더라도 만들고 싶은 제품을 만들자는 생각에 그린팬을 만든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그린팬은 사람들에게 선풍적 인기를 얻었고 회사도 급성장하게 된다. 또한 특정 소비층의 인기를 얻는 대신 대중의 인기를 얻게 되었다. 일본에서는 자국 내 작지만 강한 기업을 거론할 때 ‘모노즈쿠리’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물건을 뜻하는 ‘모노’와 만들기를 뜻하는 ‘즈쿠리’가 합쳐진 말이지만, ‘혼신의 힘을 쏟아 최고의 제품을 만든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발뮤다 역시 모노즈쿠리, 즉 작지만 강한 기업이다. 직원 수가 70여 명으로 여전히 작은 회사지만 매체와 업계, 대중은 발뮤다를 주목하고 있다. 브랜드의 정체성과 철학이 확고하다는 점에서 발뮤다는 성공한 기업이다. 그러나 테라오 겐은 아직은 발뮤다의 성공을 확신하기 어렵다고 평가한다. 대중의 주목을 받은 지 5년 정도밖에 안 되었기 때문이다. 소비자의 필요를 민감하게 알아채고 기기의 뒷면과 부속품까지 완성도 높은 기능과 디자인을 선보이는 발뮤다라면, 앞으로도 혼신의 힘으로 최고의 제품을 만들어내는 모노즈쿠리의 길을 선택하지 않을까?

 

고객의 취향입니다

존중해주세요

츠타야 서점 CEO 마스다 무네아키

글 전정아 ● 사진 위키미디어커먼즈, T-SITE 공식 홈페이지

 

일본의 최대 서점 ‘츠타야’는 전국에 1500곳이 넘는 매장과 일본 인구의 절반인 6000만 명의 회원을 확보해 국민 브랜드로 불린다. 츠타야는 단순한 서점이 아니다. 창업 초기에는 서적과 음반, DVD 등을 대여하고 판매했지만 이후 각종 문구와 소품, 전자제품 등 다양한 생활용품을 취급해 범위를 확장했다. 이제는 라이프스타일까지 제안하는 ‘문화 기획사’ 츠타야. 여기에는 고객의 입장을 대변하기 위해 묵묵히 발로 뛴 츠타야의 지주회사 ‘컬처 컨비니언스 클럽(CCC)’ CEO 마스다 무네아키의 기획력이 있었다.

 

고객의 입장에서, 고객의 기분으로,고객이 원하는 매장을 만들다

 

1983년 오사카 히라가타 역에서 첫 개장한 츠타야는 마스다 무네아키의 관찰에서 시작됐다. 당시 히라가타 시에 음반 대여점이 없고,역 주변에도 밤늦게까지 영업하는 서점이 없다는 점에서 사업 아이템을 찾은 것이다. 대여업 운영 노하우는 없었지만 고객의 요구 사항을 매장에 반영하면 분명 성공할 것이라는 믿음은 있었다. 그렇게 서점과 음반 대여를 함께 하는 복합 매장 츠타야가 탄생했다.결과는 성공적이었다. 근처 고교생과 쇼핑객이 몰려들었고, 그 인기에 힘입어 이후 타 지역에 매장을 확장했다. 마스다의 기획은 ‘고객의 취향’을 파악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했다. 예를 들어 서점의 책을 카페에서 무료로 읽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반영해 북 카페를 만들었다. 고객에게 라이프스타일을 제안하기로 사업 방향을 정한

뒤에는 하나의 주제가 정해지면 그 주제에 관련된 제품을 인접한 곳에 진열했다. 요리책 진열대 주변에 요리 도구와 요리 프로그램 수강권을 진열하는 식이다. 고객을 대하는 마스다의 자세가 가장 잘 드러난 매장은 2011년 도쿄 다이칸야마에 개점한 복합 상업 공간 ‘티사이트(T-SITE)’다. 그는 60세 이상의 노인이 계속해서 증가하는 일본 사회를 꿰뚫어보고, 노인들의 주목을 끌 수 있는 공간을 기획했다. 먼저 노년층의 아침이 일찍 시작된다는 사실에 착안해 서점과 카페 오픈 시간을 아침 7시로 정했다. 노인들은 자가용 대신 택시를 자주 이용한다는 점을 생각해 택시 승강장도 만들었다. 이 외에도 뷰티와 반려동물에 관심이 많은 실버 세대 여성들을 위해 에스테틱 살롱과 동물병원을 건물에 입점시켰다. 서적도 건강과 종교, 철학, 여행 등 노년층의 관심사와 관련된 것들로 구비해서 고객의 만족감을 높였다. 츠타야가 단순한 서점을 넘어 음식, 주거, 패션 등 라이프스타일을 기획하고 제안하는

‘문화 기획사’로 불리게 된 것은 이때부터였다. 그는 고객의 입장에 서기 위해 같은 매장이라도 아침, 점심, 저녁에 둘러본다고 한다. 때로는 출근하는 회사원의 마음으로, 또 다른 때는 20대 여성의 마음으로 매장을 찾아 고객의 취향을 헤아렸다. 그들의 요구를 실현하면 고객은 스스로 찾아오기 마련이라는 것을 이미 알았기 때문이다.

 

실패는 성공의 자산, 절망은 희망의 거름

 

오사카 히라가타 역 앞에 위치한 츠타야 본점(위)과 티사이트 다이칸야마점(아래).

오사카 히라가타 역 앞에 위치한 츠타야 본점(위)과 티사이트 다이칸야마점(아래).

 

마스다 무네아키는 어릴 적 내성적이고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아이였다. 교통사고로 생긴 얼굴의 큰 흉터 때문에 초·중학교 시절 내내 집단 따돌림을 당하기도 했다. 거기다 부모님의 사업이 실패하면서 가세도 기울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마스다를 바라지하는 데에 여념이 없었다. 마스다는 그런 어머니를 위해서라도 돈을 많이 벌어야겠다는 야심을 품었다. 그때부터 그는 연약한 자신을 바꾸기 위해 고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레슬링부에 가입해 몸을 단련했다. 체력이 생기자 점점 자신감이 붙어 따돌림을 주도한 친구들에게 당당히 맞설 수 있었다. 이때 마스다는 ‘자기 의지로 주어진 환경을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패션 회사에 들어간 뒤에는 그 의지를 발판으로 배경지식이 전혀 없는 건축개발 분야에서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마스다는 회사를 그만둔 뒤 츠타야를 설립해 승승장구했지만 그렇다고 그가 손댄 모든 사업이 늘 성공했던 것은 아니다. 츠타야 2호점을 열었을 때는 1호점의 성공 방식에만 기대어 똑같은 전략을 사용했다가 실패만 맛보고 문을 닫았다. 미국의 다채널 위성방송을 도입한 ‘다이렉트 TV’ 사업에도 뛰어들었다가 끝내 철수하고 말았다. 당시에는 재산과 신용은 물론 사업 자신감까지 모두 잃었지만 마스다는 “모든 실패가 성공의 기반이 됐다”고 말한다. 무모한 도전으로 사원들의경험과 지식이 늘었고, 서툴러도 진지하게 임한 것이 회사의 재산이 됐다는 것이다. 능력 이상의 일에 도전하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다는 마스다 무네아키. 그는 오늘도 고객의 입장으로 거리를 걷는다.

 

[글로벌 롤모델] 대통령에서 인권 운동가로

미국 제39대 대통령 지미 카터

글 김현홍 ●사진 위키미디어커먼즈

지미 카터는 미국에서 존경받는 대통령이자, 퇴임 후 더욱 사랑받는 대통령이다. 18년간의 정치 활동 기간에도, 대통령 임기가 끝난 이후에도 눈앞의 이익이나 인기보다 도덕적으로 옳은 일을 위해 힘썼기 때문이다. 그가 대통령직에 있을 당시에는 외교나 국익을 챙기는 데는 실패한 지도자라고 비판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지미 카터는 암 투병 중에도 자원봉사 활동을 했을 만큼 인권과 평화, 민주화 등 자신의 도덕적 신념을 실천하는 사람으로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존경받고 있다.

조지아주 인종차별 문제 해결을 위해

지미 카터는 1924년 미국 조지아주에서 농장 일을 하는 아버지와 간호사인 어머니 아래에서 자랐다.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에게 농사일을 배웠지만, 부모님의 뜻에 따라 해군이 된다. 해군으로서 경력을 쌓아가던 지미 카터는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돌아오면서 귀향을 결심한다.

고향인 조지아주로 돌아온 후 지미 카터는 농사와 사업을 병행하며 지역사회를 운영하는 일에 참여한다. 특히 그는 교육위원회 일을 맡아 교육 분야에서 인종차별적 요소를 없애기 위해 노력했다. 조지아주는 백인을 위해서만 통학 버스를 운영하고, 흑인은 백인 학교에서 쓰고 난 손때 묻은 교과서를 사용할 만큼 인종차별이 심한 지역이었다.

당시 사회 전반적으로 인권 운동이 활발해지는 추세였지만 조지아주는 여전히 인종에 따라 생활공간을 분리해야 한다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그래서 흑인을 위한 셔틀버스가 마련됐음에도 버스 앞쪽에 검은색으로 표시를 해야만 운행이 가능했으며, 인종 분리 정책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교사가 될 수 없었다. 지미 카터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인종 간 통합을 위한 집회를 열기로 한다. 그는 신문광고와 라디오, 영화를 통해 집회를 홍보하고 참가자를 모집했다. 이러한 지미 카터의 노력으로 백인들은 인종차별을 반대하는 집회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조지아주의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인종차별을 없애는 것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지미 카터는 이에 굴하지 않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계 진출을 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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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중국이 함께하는 행사에 참석한 덩샤오핑(왼쪽)과 지미 카터(오른쪽).

 

인기는 없었지만 옳았던 결정  

인종차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계에 진출한 지미 카터는 주 상원의원과 주지사를 거쳐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다. 이후 그의 도덕성과 청렴함을 유권자들에게 인정받아 39대 대통령으로 선출돼 1977년부터 1981까지 4년간 재임했다. 대통령직에 있는 동안 그는 평화 유지와 인권 강화를 위한 정책을 폈다. 특히 중동 평화, 남아프리카에서의 인종차별 종식, 핵무기 감축, 중국과의 외교관계 정상화, 파나마운하 분쟁 해결, 알래스카 환경보호 등의 안건을 위한 노력을 기울였으며, 인권 문제를 외교정책의 기조로 삼았다. 이 정책들은 모두 합리적이고 윤리적이었지만, 지미 카터의 모든 정책이 인기 있던 것은 아니었다.

특히 파나마운하를 반환하는 결정은 가장 많은 반대에 부딪힌 사안이었다. 역사적으로 미국은 파나마에 운하를 건설한 뒤 그 일대를 미국 영토로 한다는 조약을 맺고 약 80년간 어마어마한 수익을 얻었다. 파나마는 약 50년간 이 운하를 되찾기 위해 노력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미국이 계속해서 파나마로부터 얻는 이익을 포기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미 카터는 이 문제를 연구한 끝에 파나마운하를 파나마에 영구적으로 반환하는 것이 옳다고 판단해 재협상을 추진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상원의원이 재협상에 반대했고, 미국인의 34%만이 재협상에 찬성했다. 이에 지미 카터는 각 주에서 영향력 있는 인물 200여 명을 백악관으로 초대해 그들을 설득했다. 상원의원에게 파나마를 방문해 얼마나 많은 이들이 파나마운하에서 일하고 있는지 직접 확인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러한 노력 끝에 상원의원들을 설득해 파나마운하를 영구 반환하는 협정을 통과시켰다.

 

성공적인 전직 대통령으로서의 삶

지미 카터가 대통령직에 있으면서 해결한 문제도 많았지만, 이란에 있는 미국 인질 구출 작전에 실패하면서 유약한 정부라는 비판을 받았다. 여기에 2차 석유파동으로 인한 경제 위기까지 겹치면서 미국 대통령 최초로 재선에 실패하고 만다.

비록 재선에는 실패했지만 지미 카터는 전직 대통령으로서, 인권 활동가로서 인권과 평화를 위한 활동을 계속 해오고 있다. 대통령 임기를 마친 후 1982년, 지미 카터는 아내 로잘린 스미스 카터와 함께 ‘카터 센터’를 설립한다. 이 센터는 평화, 인권, 민주주의, 자유, 보건 증진을 위한 사업을 진행하며 “가치 있는 목표라면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 것”이라는 원칙 아래 지금까지 활발히 운영되고 있다.

인권 활동가로서 지미 카터가 했던 활동 중에는 한반도 평화와 관련된 일도 있다. 1994년 북한의 핵 문제로 한반도의 평화가 위협받고 있을 때, 지미 카터는 민간인 신분으로 방북해 김일성을 만나 대화를 통해 문제를 평화롭게 해결했다. 이처럼 지미 카터는 평생에 걸쳐 세계 주요 문제 해결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했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2002년에는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지금까지도 지미 카터는 인권과 세계 평화를 위한 활동을 펼치고 있으며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는다.

[글로벌 롤모델] 따뜻한 독설가, 열정을 말하다

스타 셰프 고든 램지

 글 박성조 ●사진 위키미디어커먼즈

고든 램지, 스코틀랜드 출신의 스타 요리사이자 레스토랑 경영인. 그러나 인터넷 인물사전의 분류만으로는 그를 설명할 수 없다. 대중에게 고든 램지는 ‘열정’을 보여주는 아이콘이다. 미슐랭 가이드 3스타를 가장 오랫동안 유지하고 있는 스타 셰프이자 수백만 달러 규모의 글로벌 외식사업을 이끄는 탁월한 경영자. 다른 한편으로는 TV 프로그램에서 변화를 거부하는 식당 주인들에게 욕설을 퍼붓고, 반대로 기가 죽은 요리사 지망생에게는 따뜻하게 격려를 건네는 방송인. 10대 시절 무릎 부상으로 축구선수 생활을 마감했던 이 남자는 음식을 매개로 소통하며 많은 이들에게 ‘열정의 맛’을 전해왔다.

 

배울 수만 있다면, 어떤 상황이든 감수하는 열정가

 

고든 램지는 1987년 노스옥슨 기술대학에서 호텔 경영을 전공한 뒤 주방에서 일을 시작했다. 처음부터 화려한 레스토랑 경영자의 모습은 아니었다. 주방의 가장 허드렛일부터 시작해 하루 17시간을 일해야 했다. 그렇게 주방 일을 하며 마르코 피에르 화이트와 알베르루 등 유명 셰프들에게 기본기부터 배워나갔다. 런던에서 일을 하던 고든 램지는 ‘요리의 고향’에서 더 배우겠다는 목표로 프랑스 파리로 건너간다. 프랑스어는 한마디도 못 하고, 프랑스에 아무 연고도 없는 상태였지만 배움에 대한 집착이 그를 프랑스로 이끌었다. 급여나 근무 여건 등은 고든 램지의 ‘배움의 여정’에 고려되는 조건이 아니었다. 그는 훗날 자신의 자서전에 당시를 돌아보며 “월급 인상을 요구하는 일은 꾀병을 부리며 하루 병가를 내달라고 전화하는 것만큼이나 나와는 거리가 먼 일이었다”고 쓰기도 했다.

프랑스에서 영국 런던으로 돌아온 고든 램지는 영국 최초로 미슐랭 3스타를 받은 셰프 피에르 코프만의 주방에서 일하며 더욱 성장한다. 이후 1993년에 그는 처음으로 레스토랑 주방을 책임지는 수석 셰프 자리를 제안받는다.

마침내 자신이 이끄는 주방 팀을 가지게 됐지만, 고든 램지가 마주한 현실은 ‘인기 없는 낡은 레스토랑’이었다. 그러나 고든 램지는 ‘오베르진’이라는 이름의 이 레스토랑을 살려낸다. 훌륭하고 현대적인 유럽식 요리를 저렴한 가격에 내놓는 콘셉트로 인기몰이를 하며 언론의 관심을 끌었다. 맛으로도 인정받으며 미슐랭 가이드 3스타를 두 번이나 받기도 했다. 그 중심에 있던 수석 셰프 고든 램지가 유명해진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오베르진에서의 성공은 단순히 고든 램지라는 이름을 알린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이 레스토랑에서 훗날 자신의 글로벌 브랜드를 함께 세워갈 동료들을 얻었다. 런던과 파리에서 하루 17시간의 고된 노동을 하며 일을 배워왔다는 수석 셰프의 경험에 주방 직원들은 유대감을 느꼈고, 이후 고든 램지가 자신의 비즈니스를 꾸릴 때 기꺼이 손을 잡는 관계로 남았다. 그의 열정이 사람들을 자신의 편으로 만든 것이다.

 

영국에서 세계로, 레스토랑에서 미디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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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고든 램지는 자신의 이름을 건 레스토랑을 오픈한다. 옛 스승인 피에르 코프만이 자신의 레스토랑을 옮기면서 매우 싼 가격에 그 자리에 가게를 낼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줬다. 그렇게 스승의 배려로 고든 램지 앳 호스피털 로드’가 시작됐고, 레스토랑은 이내 명소로 떠올랐다. 장인어른이 비즈니스를 이끌어주는 사이 셰프인 고든 램지는 음식과 레스토랑 관리에 집중해 3년도 채 되지 않은 시기에 미슐랭 3스타를 획득한다. 이후 그는 영국 곳곳에 자신의 레스토랑을 늘려나갔고 2001년에 아랍에미리트 두바이에 ‘베르’를 열면서 해외로 진출했다. 2006년엔 미국 지점 ‘고든 램지 앳 런던’을 세우면서 뉴욕에도 깃발을 꽂았다.

고든 램지가 본격적으로 미디어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도 셰프이자 외식 사업가로 성공한 이 시기 즈음이다. 자신의 레스토랑을 늘려나가던 2004년 이후 <헬스 키친>, <키친 나이트메어>, <마스터 셰프> 등에 출연하며 외식업계가 아닌 일반 대중에게까지 영향력 있는 스타 셰프로 떠올랐다. 허드렛일부터 시작한 주방 경험과 훌륭한 셰프들에게 배운 탄탄한 기본기가 방송에서 더욱 빛을 발했다.

방송에서 그는 어릴 때 좋지 못했던 가정환경을 비롯해 자신의 지난날을 종종 언급하기도 한다. 축구선수로서의 좌절, 고된 주방 생활, 무작정 요리를 배우기 위해 감행한 프랑스 생활 등이다. 고든 램지의 거침없는 욕설이 열정 넘치는 모습으로 이해되는 것은 이와 같은 삶의 경험과도 무관하지 않다.

“Stop doubting yourself. Be bold(스스로를 의심하지 말아요. 담대해지세요.).”

요리 오디션 프로그램인 <마스터 셰프>에서 시각장애인 도전자에게 따뜻하게 건넸던 말이다. 스스로를 의심하지 않고 도전하는 열정, 곧 그가 삶에서 보여준 모습이다. 그 모습 때문에 세계의 많은 이들이 이 독설가 요리사를 롤 모델로 삼고 있다.

 

[글로벌 롤모델]

영상 스트리밍 서비스의 왕좌 넷플릭스 창업자

리드 헤이스팅스

글 이수진 ● 사진 위키미디어커먼즈

넷플릭스는 미국의 멀티미디어 엔터테인먼트 기업이자 세계 최대의 동영상 스트리밍 서비스 기업이다. 넷플릭스에 가입해 일정 금액의 돈을 지불하면 영화, 드라마, 애니메이션, 다큐멘터리 등의 영상을 무제한 시청할 수 있다. 미국에서는 넷플릭스의 시청률이 가장 높은 프라임타임에 전체 인터넷 트래픽의 3분의 1이 사용될 정도로 그 인기가 어마어마하다. 올해 7월에는 전 세계 가입자 수 1억 명을 돌파해 동영상 스트리밍 서비스 기업 중 1위 자리를 놓치지 않고 있다. 넷플릭스는 1997년에 리드 헤이스팅스와 심리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조카 손자인 마크 랜돌프가 설립했다.

 

귀차니즘이 새로운 세계를 열다

 

1960년 미국 매사추세츠에서 태어난 리드 헤이스팅스는 보든 대학에서 수학을 전공한 뒤 스탠퍼드 대학교에서 컴퓨터공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컴퓨터공학을 공부하기 전에는 스와질란드에서 수학 교사로 평화봉사단 활동을 했는데, 이 경험을 통해 안정적인 교사보다는 도전과 모험을 즐기는 일이 자기 적성에 더 맞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후 리드 헤이스팅스는 컴퓨터공학 전공을 살려 어댑티브 테크놀로지에서 개발자로 근무한다. 그러던 중 1991년에 개발자를 위한 개발툴을 만드는 ‘퓨어 소프트웨어’를 설립해 개발자이자 기업 CEO가 되었다. 퓨어 소프트웨어는 빠르게 성장했지만 리드 헤이스팅스는 자신이 CEO보다 개발자로서의 정체성이 더 강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결국 기업 CEO로서 한계를 느낀 그는 퓨어 소프트웨어를 떠나기로 결심한다. 리드 헤이스팅스는 회사를 매각한 후 집에서 여유로운 시간을 보낸다. 그러던 어느 날, 대여점에서 빌린 <아폴로13> DVD의 반납 기한을 놓쳐 연체료 40달러를 내야 했다. 집에서 멀리 떨어진 대여점까지 가는 것도 귀찮은데 반납이 늦었다고 연체료까지 물어야 한다니, 리드 헤이스팅스는 이 구조가 불합리하다고 느꼈다. 그리고 작은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거실에서 원하는 드라마와 영화를 감상하고 바로 반납할 수는 없을까? 인터넷과 컴퓨터 기술이 좀 더 발달하면 가능하지 않을까? 이 사소한 아이디어가 넷플릭스의 첫 시작이었다.

 

비디오 우편 서비스에서 월간 구독 서비스로

 

리드 헤이스팅스는 이 아이디어를 실현하기 위해 퓨어 소프트웨어에서 함께 일했던 마크 랜돌프와 새로운 회사를 설립한다. 회사 이름은 인터넷을 뜻하는 ‘넷(Net)’과 영화를 뜻하는 ‘플릭스(Flix)’를 합친 ‘넷플릭스’라고 지었다. 리드 헤이스팅스의 아이디어는 1997년 당시에는 획기적이었지만 인터넷 환경이 지금처럼 발달하지 않아 어쩔 수 없이 DVD 임대 서비스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인터넷에서 대여 신청을 받은 뒤 우편을 통해 DVD를 빌리거나 반납하는 서비스를 제공한 것이다. 덕분에 일단 비디오를 빌리기 위해 직접 오가는 불편함은 사라졌다. 넷플릭스를 설립한 지 1년 뒤, 리드 헤이스팅스는 넷플릭스의 핵심서비스라고 할 수 있는 월간 구독 서비스를 구축했다. 월 1회 일정 요금을 내면 언제 어디서든 넷플릭스가 보유한 모든 콘텐츠를 대여해 볼 수 있는 서비스를 시작한 것이다. 마침내 리드 헤이스팅스가 꿈꾸던 연체료 없는 대여 서비스가 구현되었지만 넷플릭스의 수익은 2000년대 초반까지 적자를 면치 못했다. 기업 형편이 어려워지자 리드 헤이스팅스는 미국 최대 규모의 비디오 대여점인 ‘블록버스터’에 넷플릭스를 팔아넘길 계획이었다. 그러나 그의 제안은 단칼에 거절당한다.

 

넷플릭스는 초기에 우편 배송을 통한 DVD 대여 서비스를 펼쳤다.
넷플릭스는 초기에 우편 배송을 통한 DVD 대여 서비스를 펼쳤다.

사용자 중심의 서비스를 구현하다

 

그 후 리드 헤이스팅스는 스스로 성장하는 길을 선택했다. 자금을 확보하고 미국 각 주에 물류센터를 만드는 등 구조적인 변화를 꾀하며 새로운 길을 모색한 것이다. 또 시청 기록을 빅 데이터로 분석, 개인취향에 맞는 영상을 추천하는 ‘콘텐츠 추천 시스템’을 도입해 사용자의 마음을 더욱 사로잡게 된다. 이러한 노력이 결실을 맺어 2003년에는 넷플릭스가 흑자를 기록했고, 2007년 그의 처음 아이디어였던 인터넷 동영상 스트리밍 서비스를 마침내 시작하게 되었다. 시청자는 이제 일방적으로 방송을 내보내는 TV를 켜는 대신 넷플릭스에서 원하는 콘텐츠를 직접 선택한다. 또 시즌을 기준으로 업로드하는 넷플릭스의 시스템 덕분에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다음 편을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 내가 원하는 시간, 장소에서 한 흐름으로 완성된 콘텐츠를 즐기게 된 것이다. 리드 헤이스팅스는 2011년 콘텐츠 유통사에서 콘텐츠 제작사로의도전을 감행했다. 독자적인 성장을 선택한 이후 두 번째 획기적인 변화다. 직접 콘텐츠를 제작하는 업체로서 승부를 보겠다는 것이다. 관점의 획기적 변화와 과감한 선택으로 전 세계 사용자를 사로잡은 넷플릭스. 전 세계인의 채널 주도권을 통째로 옮긴 리드 헤이스팅스의 혁신적 아이디어는 지금도 계속 실현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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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가 행복하다면

호주 장난감 회사 ‘무스’ CEO 매니 스툴

지난 3월, 미국 경제지 <포브스>에서 선정한 ‘억만장자 리스트’에 이름을 올린 매니 스툴의 성공 스토리.

글 지다나·사진 무스 엔터프라이즈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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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증맞은 고무 인형, 바비 인형을 위협하다

새끼손가락보다 작은 장난감 ‘숍킨스(Shopkins)’가 미국 소녀들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숍킨스는 당근, 오렌지, 브로콜리부터 도넛, 초콜릿, 컵케이크까지 알록달록한 색과 커다란 두 눈이 인상적인 앙증맞은 장난감이다. 크기도 3cm밖에 되지 않아 아이들 손에 쏙 들어온다. 이 작은 장난감이 파란을 일으켰다. 레고와 바비가 굳건히 지켜온 세계 장난감 업계에 새로운 이름이 오른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특히 숍킨스는 미국 초등학생 사이에서 큰 인기를 모았다. 2015년 미국 장난감 시장에서 매출 3위를 기록한 것이다. 1위는 스타워즈 관련 장난감, 2위는 바비를 만드는 너프의 장난감이었다. 이와 같은 성과는 같은 해 미국 장난감산업협회에서 선정한 ‘올해의 여아 장난감’ 수상으로 이어졌다. 그렇다면 숍킨스가 이렇게 선풍적인 인기를 끈 이유는 무엇일까?

포켓몬처럼 모으는 재미가 있는 숍킨스

숍킨스는 소꿉놀이에서 아이디어를 가져왔다. 각각의 재료를 캐릭터화한 뒤, 장바구니와 함께 판매한 것이다. 그리고 각 캐릭터에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초콜릿칩 쿠키는 쿠키쿠키(Kooky Cookie), 브로콜리는 로킹 브록(Rockin Broc.)과 같이 개성 넘치는 캐릭터가 150개 정도 된다. 12개의 캐릭터가 들어 있는 세트가 약 10달러(약 1만 3000원)이니 가격은 저렴한 편이다. 하지만 숍킨스의 가장 큰 특징은 캐릭터를 자기가 원하는 대로 구입할 수가 없다는 점이다. 랜덤으로 구성된 세트만 판매하기 때문이다. 이미 갖고 있는 캐릭터를 친구와 교환하면서도 아이들은 숍킨스 캐릭터를 전부 모으고 싶어 했다. 희귀한 캐릭터를 가지려면 숍킨스를 계속 살 수밖에 없다.

2014년에 출시한 숍킨스는 현재까지 전 세계 80개국에서 약 2억4000만 개가 팔렸고, 숍킨스를 만든 호주의 장난감 회사 ‘무스 엔터프라이즈(Moose Enterprises, 이하 무스)’의 지난해 매출은 6억 달러(약 5133억 원)를 기록했다. 이처럼 세계 장난감 업계에 새바람을 몰고 온 주인공은 누구일까? 바로 ‘무스’의 CEO 매니 스툴이다.

스스로를 믿고 나만의 일을 즐겨라!

매니 스툴은 독일 난민캠프에서 태어났다. 스툴의 부모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일어난 유대인 대학살 사건에서 목숨을 건진 생존자였다. 폴란드가 공산화되자 스툴의 부모는 독일로 도망쳤고, 1949년 독일 난민캠프에서 매니 스툴을 낳았다. 7개월 뒤 스툴의 가족은 호주로 망명해 가난하게 살았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스툴의 부모는 아들이 의사나 변호사가 되길 원했지만, 스툴은 하루빨리 돈을 벌고 싶었다. 그래서 다니던 고등학교를 그만두고 건설 현장에 뛰어들었다. 착실하게 모은 돈으로 매니 스툴은 1974년 ‘스칸센’이라는 유리 제품 제조회사를 창업했다. 약 20년 동안 묵묵히 회사를 경영한 결과, 스칸센은 호주 증권거래소에 상장되면서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에게 장난감 회사 무스가 파산 직전에 놓였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무스를 인수하는 것이 기회라고 생각한 스툴은 스칸센을 정리하고, 2000년 무스의 CEO가 되었다. 당시 무스의 매출은 400만 달러(약 45억 원) 정도였다. 하지만 15년 만에 6억 달러가 넘는 매출을 기록하는 놀라운 성장을 보여주었다.

매년 모나코에서는 ‘기업인 올림픽’으로도 불리는 ‘EY 최우수 기업가상(EY Entrepreneur of The Year)’ 시상식을 연다. 각국을 대표하는 기업가들이 모여 성공을 축하하는 자리다. 지난해 7월 무스의 CEO 매니 스툴은 전 세계 50개국에서 추천된 55명의 후보자를 제치고 호주 기업인 최초로 ‘올해의 세계 기업인’으로 선정됐다. 그는 수상 소감으로 “남을 따라 하는 것이 아닌 스스로를 믿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내가 경영을 즐기고 있는 한 무스는 계속될 것이며, 지금 나는 즐겁게 경영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자신을 믿고 일을 즐기는 것, 그것이 매니 스툴 CEO의 성공 노하우였다.

빅데이터가 만든 취향저격 패션

스티치 픽스 CEO 카트리나 레이크

나의 신체와 취향까지 제대로 파악한 스타일리스트가 매일 아침 옷을 골라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옷을 사고 싶지만 쇼핑하기에는 시간도, 패션 센스도 부족한 이들에게 귀가 번쩍 뜨이는 소식이 있다. 나에게 딱 맞는 스타일링부터 배송까지 책임지는 패션 쇼핑몰이 탄생했다. 바로 스티치 픽스다.
글 지다나·사진 www.stitchfix.com

인간 스타일리스트와 기계 스타일리스트의 합작

스티치 픽스(Stitch Fix)를 창립한 사람은 카트리나 레이크다. 미국 스탠퍼드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그는 졸업한 뒤 컨설팅 회사에 다녔다. 그러던 중 기업전략 컨설팅 회사인 파테논 그룹에서 일하면서 한 가지 의문을 품게 된다. 고객을 상대하는 대부분의 소매상들이 고객의 데이터를 갖고 있지 않거나, 만약 갖고 있다 하더라도 이를 활용하는 방법을 잘 모른다는 점이었다. 사람들이 무엇에 관심이 있고, 무엇을 원하는지 궁금했던 카트리나는 하버드 경영대학원에 입학해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그리고 2011년 온라인 패션 쇼핑몰 스티치 픽스를 설립한다.

스티치 픽스는 보통 쇼핑몰과는 접근 방법부터가 달랐다. 소비자가 쇼핑몰을 통해 옷을 고르는 게 아니라 쇼핑몰이 고객에게 어울리는 옷을 제안한다. 빅데이터로 분석한 고객의 취향에 따라 내부 스타일리스트가 옷과 신발, 액세서리까지 스타일링해주는 것이다. 스티치 픽스에는 데이터 과학자 70명 이상, 스타일리스트 3000명 이상이 직원으로 일하고 있다. 그야말로 인간 스타일리스트와 빅데이터 스 타일리스트가 함께 일하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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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 사이즈는 기본, 고객의 취향까지 읽은 패션 제안

스티치 픽스를 이용하려는 소비자들은 키, 몸무게 등 기본적인 신 체 사이즈를 포함한 프로필부터 작성해야 한다. 그리고 자기가 좋아 하는 스타일과 싫어하는 스타일을 선택한다. 유행을 따르는 편이 좋 은지, 자신만의 스타일을 표현하는 편이 좋은지 등 스티치 픽스가 제시하는 질문에 체크하는 것이다. 스타일링이 된 샘플 사진에 ‘좋 아요’ 또는 ‘싫어요’를 표시하는 항목도 있다. 스티치 픽스에 근무하 는 스타일리스트는 신체 사이즈, 취향, 예산 등 고객이 작성한 정보 를 바탕으로 상의와 하의, 신발, 가방, 액세서리 등 5가지 패션 아이 템을 선별한다. 고객이 정한 가격대 내에서 선별한 아이템은 박스에 담아 바로 배송된다. 스타일링 박스를 받은 소비자는 자기가 원하는 아이템은 갖고, 나머지는 돌려보낸다. 만약 5개 아이템을 모두 구입 하면 25% 할인을 받을 수 있다. 아무것도 구입하지 않았을 때는 스 타일링 비용 20달러(약 2만3000원)를 지불해야 한다. 스티치 픽스 에서는 반품을 받는 과정도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이를 통해 고객 의 취향을 더욱 자세히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4차 산업혁명에 딱 어울리는 사업 제시

카트리나 레이크는 무엇을 입을지 늘 고민하는 사람, 쇼핑할 시간 이 부족하거나 쇼핑몰 특유의 복잡한 페이지를 꺼리는 사람들을 타 깃으로 삼았다. 반응은 과연 폭발적이었다. 카트리나 레이크의 스티 치 픽스는 기존 패션 쇼핑몰 시장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빅데이터 를 바탕으로 우리가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좋은 사례를 보여준 것 이다. 현재 스티치 픽스는 제품을 조합하는 스타일링, 서비스에 대한 고객의 만족도 등 수백 가지 알고리즘으로 고객과 회사 내부의 정보를 모으고 있다.

방대한 정보를 바탕으로 카트리나는 스티치 픽스를 창립한 지 4년 만에 연 매출 2억5000만 달러(약 2875억 원)를 달성했다. 처음엔 손가락 안에 꼽혔던 직원 수도 지금은 5000명이 넘는다. 일반 여 성 의류에서 벗어나 임산부 의류, 아동복, 신발도 함께 판매하고 있 으며, 지난해에는 남성을 위한 서비스인 ‘스티치 픽스 맨(Stitch Fix Men)’을 정식 론칭했다. 앞으로도 기계와 전문 스타일리스트가 만 들어내는 스티치 픽스만의 행보가 기대된다.

스티치 픽스는 5개 아이템이 담긴 상자를 배달한다. 그 안에는 카드가 동봉되는데, 보내준 패션 아이템을 다른 아이템과 어떻게 입으면 좋은지에 대한 코디법이 제시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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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도 개인 맞춤형 서비스가 있을까?

학습의 강점과 약점을 짚어주는 클래스큐브

수학 공부에 빅데이터 기술을 접목해, 학생이 푼 문제의 정답과 오답을 바탕으로 강점과 약점을 가려낸다. 만약 인수분해가 부족하다고 판단되면 근의 공식과 2차 방정식을 좀 더 학습하라고 진단한다. 스타트업 클래스큐브는 천재교육과 손을 잡아 서비스하기로 예정돼 있다.

생각을 읽는 키워드 검색 결과 마이셀럽스

인터넷 검색을 하면 원하는 정보만 쏙 얻고 싶지만 언제나 필요 이상의 정보가 나와 곤란할 때가 있다. 이때 검색하기 전 먼저 내 취향에 따른 필터로 정보를 한 번 거르면 어떨까? 마이셀럽스(www.mycelebs.com)는 내가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내 취향이 어떤지에 따라 스타, 영화, 웹툰 등의 정보를 제공한다.

 

커피 한 잔에 문화를 팝니다

스타벅스 CEO 하워드 슐츠

미국 시애틀에서 원두를 로스팅해 유통하던 작은 스타벅스를 세계 굴지의 커피 프랜차이즈 브랜드로 만들어낸 사람이 있다. 기호 식품에 불과했던 커피를 하나의 문화로 만든 인물, 스타벅스 CEO 하워드 슐츠다.

글 전정아·사진 위키미디어커먼즈

끝없는 모험과 도전으로 기회를 잡다

빈민가 출신이었던 하워드 슐츠는 어릴 때부터 주류 사회에 들어가고 싶어 대학 진학을 꿈꿨다. 슐츠는 전액 장학금을 지원받고 대학에 진학할 수 있는 방법으로 미식축구를 선택했고 특기생으로 노던미시간대학에 들어갈 수 있었다. 대학을 졸업한 뒤에는 복사기 판매업체인 ‘제록스’에서 영업사원으로 일하며 영업 능력을 쌓아 3년 뒤 ‘하마플라스트’라는 가정용품 업체에 부사장으로 스카우트됐다.

하워드 슐츠가 돌연 ‘커피’라는 새로운 사업에 뛰어든 계기는 바로 시애틀에 있는 원두커피 유통회사 스타벅스에서 우연히 마신 커피 한 잔 때문이었다. 그는 커피의 풍부하고 깊은 맛과 스타벅스 창립자들의 커피에 대한 지식과 열정에 반해 스타벅스 마케팅 책임자로 입사했다. 당시 스타벅스는 매장이 불과 4곳밖에 없던 작은 회사였다.

스타벅스에 입사하고 1년 뒤인 1983년, 슐츠는 이탈리아 밀라노 출장 중에 새로운 사업 아이템을 발견한다. 길가에 있는 바에 편히 앉아 에스프레소를 즐기는 이탈리아 사람들의 카페 문화를 미국에 들여오는 것이었다. 하지만 당시 스타벅스 경영진은 사업 규모를 키우고자 하는 슐츠의 의견에 반대했다. 결국 슐츠는 1985년 스타벅스에서 나와 자신만의 커피 프랜차이즈 사업을 시작하기로 결심한다.그는 영업사원 시절의 경험을 살려 242명의 투자자들을 만나 자금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미국 최초로 에스프레소 바 ‘일지오날레’를 열었다.

일 지오날레의 세 번째 매장을 캐나다 밴쿠버에 오픈한 직후, 하워드 슐츠의 귀에 스타벅스 경영진이 스타벅스 브랜드를 팔 거라는소문이 들렸다. 슐츠는 지금이 아니면 스타벅스를 인수하지 못할 거라고 판단했다. 결국 그는 다시 투자자를 물색해 380만달러의 자금을 유치했고 1987년, 스타벅스의 CEO가 된다.

직원의 행복이 우선인 기업

스타벅스가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직원을 중시하는 슐츠 회장의 경영 철학 덕분이다. 스타벅스는 모든 직원을 ‘종업원(Employee)’이 아닌 ‘파트너(Partner)’라고 부른다. 경영진이 직원들을 동반자로 대우해야 직원들 역시 고객 서비스에 최선을 다하는 선순환이이 뤄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특히 스타벅스는 차별화된 직원 복지를 펼치고 있다. 시간제 직원을 포함한 전 직원이 회사로부터 의료보험 혜택을 받는다. 뿐만 아니라 미국 본사 직원에게는 스톡옵션 (기업이 임직원에게 일정 수량의 자기 회사 주식을 일정한 가격으로 매수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는 제도)을 부여하고, 학업에 뜻이 있는 직원에게는 학비도 제공한다. 한국 스타벅스는 한발 더 나아가 전 직원을 정규직으로 채용하는 게 원칙이다. 여느 커피 브랜드 기업의 이직률은 연간 평균 150~400%에 달하지만 스타벅스는60~70% 수준이다. 이렇듯 기업 문화가 만든 직원들의 강한 충성도는 스타벅스의 또 다른 경쟁력이다.

눈앞의 이익이 아닌 미래를 보는 넓은 안목

지난 2000년 슐츠는 커피에 대한 열정이 예전과 같지 않다는 이유로 CEO 자리에서 물러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슐츠가 물러나자마자 스타벅스에는 큰 위기가 닥쳤다. 방문 고객 증가율이 사상 최저치로 떨어졌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금융 위기까지 맞물려 주가는 반 토막 났다.

회사가 추락하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던 슐츠는 8년만에 경영 일선으로 복귀했다. 슐츠는 ‘파트너와 커피, 고객과 함께하는 가치를 실행한다’는 스타벅스의 핵심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600여 개의 매장을 폐쇄하고 전 직원의 재교육을 실시했다. 약 600만 달러(70억 원)의 피해를 감수한 결정이었다. 이에 그치지 않고 1만여 명의 매장 관리자들을 뉴올리언스로 불러 모아 리더십 재점검 콘퍼런스를 열어 스타벅스가 다시 지역사회 일원으로서 충실하겠다는의지를 보였다. 슐츠가 복귀한 지 2년 만인 2010년, 스타벅스는 11조원이라는 사상 최대의 매출을 기록하며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

슐츠는 올 4월 CEO 자리에서 또다시 물러나기로 했다. 그의 두 번째 퇴임인 것이다. 이후에는 스타벅스 커피를 고급화한 매장 ‘스타벅스 리저브 로스터리 앤드 테이스팅 룸’을 강화하는 데 전념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스타벅스의 고급화 전략에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지만 슐츠가 10년 이상을 구상하여 꾸민 시애틀 매장에 대한찬사가 대단하다. 커피를 향한 그의 끝없는 열정과 도전이 또 어떤새로운 커피 문화를 탄생시킬지 기대된다.

지난 8월 15일, 제31회 올림픽이 열린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마이클 펠프스가 공식적으로 은퇴를 선언했다. 올림픽 최다 금메달리스트라는 최고의 찬사를 받으며 떠나는 그의 수영 인생 레이스를 들여다보자.

글 지다나·사진 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위키미디어커먼즈

세계 최고 기록을 세운 자, 박수 칠 때 떠나다

마이클 펠프스는 은퇴를 발표하는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지금 가능한 최고의 자리에 있다. 이것이 내가 원한 선수 생활의 마지막 모습이다.” 사실 펠프스가 은퇴 소식을 전한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012년 런던 올림픽에서 수영계를 떠나겠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는 런던 올림픽에서 금메달 4개와 은메달 2개를 거머쥐며 당시 올림픽 사상 최다 메달 기록을 세웠다. 그때도 최고의 자리에서 이제 그만 물러나겠다고 말했지만 2년이 지난 뒤 다시 돌아왔다. “더 할 게 있을 것 같아서”였다. 수영을 그만두기가 아쉬운 펠프스는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남자 계영 400m, 접영 200m, 계영 800m, 개인 혼영 200m, 혼계영 400m에서 금메달 5개와 접영 100m에서 은메달 1개를 목에 걸었다. 통산 28개의 메달을 손에 쥔 ‘메달 수집광’ 펠프스는 올림픽을 통틀어 가장 메달을 많이 딴 선수로 이름을 올렸다. 펠프스가 세운 올림픽 기록을 다시 펠프스가 깬 것이다. 자신의 실력을 한 번 더 확인한 그는 “이번에는 진짜 마지막”이라며 은퇴를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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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이기는 도전은 끝나지 않았다

물 밖보다 물속에서 더 빠른 펠프스는 ‘펠피시’라고도 불린다. 이런 인간 물고기가 과거에 물 공포증이 있었다고 하면 믿을 수 있겠는가. 1985년 미국 볼티모어에서 태어난 펠프스는 두 살 때 바이러스 때문에 목숨을 잃을 뻔한 적이 있을 정도로 몸이 약한 아이였다. 일곱 살이 되었을 무렵에는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ADHD)라는 진단까지 받았다. 펠프스가 처음 수영장을 찾은 건 ADHD 때문이었다. 펠프스의 어머니가 수영이 몸과 마음을 치료하는 데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얼굴을 물에 담그는 것이 끔찍하게 싫었던 어린 펠프스는 배영부터 배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수경을 던질 정도로 물을 싫어했지만, 물 안에서 몸을 움직일수록 자기도 모르는 사이 수영의 매력에 빠지고 만다. 이후 펠프스는 11세에 보먼 코치를 만나면서 수영 실력을 크게 키웠다. 일찍부터 펠프스의 재능을 발견한 보먼 코치는 그가 올림픽을 통해 유명해지리라는 걸 예감했고, 보다 모질게 훈련을 시켰다. 그렇게 4년이 흐른 뒤 펠프스는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 처음으로 출전한다. 첫 올림픽에서는 메달 하나 없었지만,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는 접영 200m에서 1분54초92를 기록해 ‘최연소 세계 신기록 달성자’로 주목을 받았다. 이는 이전 세계기록보다 0.26초를 앞당긴 놀라운 기록이었다. 아테네 올림픽에서 6개의 금메달을 차지한 펠프스는 이후 올림픽에서도 승승장구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는 8개, 2012년 런던 올림픽에서는 4개, 그리고 마지막 2016년 리우 올림픽에서는 5개의 금메달을 휩쓸며 총 23개의 금메달을 기록했다.

펠프스의 목표는 언제나 ‘세계 신기록 달성’이었다. 이는 자신을 이기는 싸움이나 다름없었다. 매일 1만m가 넘는 레이스를 수영하며 스스로 혹독한 훈련을 하는 이유도 자기 한계를 넘어서고 싶어서였다. 펠프스는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수영에 대한 아쉬움과 샘솟는 도전 의식을 확인하며 되돌아왔다. 그리고 그 결과, 미국의 수영 영웅이자 역대 올림픽 최다 금메달리스트가 되었다. 이제 더 이상 올림픽에서는 ‘수영 황제’ 마이클 펠프스를 볼 수 없지만,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그의 기록은 영원히 남을 것이다.

 

뉴질랜드, 캐나다보다 앞선 펠프스니안

해외 언론은 마이클 펠프스에게 ‘펠프스니안’이라는 별명을 붙이기도 했다. 그가 딴 메달 수가 웬만한 국가보다 압도적으로 많기 때문이다. 2016년 리우 올림픽만 해도 그렇다. 리우 올림픽에 출전한 205개국 가운데 약 70%가 펠프스보다 성적이 낮다. 금메달만을 기준으로 하면, 5개의 금메달을 딴 펠프스는 전체 국가에서 19위에 오른다. 이는 4개의 금메달을 보유한 뉴질랜드와 캐나다, 우즈베키스탄보다 앞선 기록이다. 아무리 경기가 많은 수영 종목 선수라 하더라도 금메달 23개를 딴 펠프스는 ‘펠프스니안답게’ 역대 최고의 성적을 자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