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로와 꿈 직업인 인터뷰

[2016년 4월호] 이 시대 시인으로 산다는 건 ‘안도현 시인’

이 시대 시인으로 산다는 건

안도현 시인

베스트셀러에 시집이 들어선 지 오래, 사람들은 종이책보다 스마트폰을 많이 들여다보고, 인간이 인공지능 컴퓨터와 바둑 대결을 하는 요즘. 언젠가부터 낭만이 사라진 이 시대에 시인으로 산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봄날이 다 가기 전, 안도현 시인을 만나 시와 시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글 지다나·사진 이동훈

WHO IS?

1961년 경북 예천에서 태어나 원광대 국문과, 단국대 대학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1981년 대구매일신문 신춘문예에 시 ‘낙동강’,

198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서울로 가는 전봉준’이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같은 해

전북 이리중학교에서 국어 교사로 지내면서 1996년 어른을 위한 동화 <연어>를 펴냈다. 이후 <그리운 여우>,

<나는 당신입니다> 등 시집과 산문집, 동화책 등을 썼다. 지금은 우석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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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끝까지 살아남을 것이다, 바퀴벌레처럼

알파고와 이세돌 기사가 마지막 대국을 펼치는 날, 시인을 만난다는 사실에 혼자 재밌어했다.(웃음) 아무리 인공지능이 발달해도 시인은 로봇으로 대체할 수 없는 직업 중의 하나이지 않을까.

글쎄… 과연 그럴까. 로봇이 시를 쓰는 것, 어느 정도는 가능하다고 본다. 생략이나 어순 등 시 쓰는 법을 프로그램화하면 될 것 같다.

 

맙소사, 시인에게 그런 말을 듣다니 충격적이다.(웃음) 하긴 그 전에 시 읽는 사람이 사라지는 건 아닌지 걱정된다. 최근 영화 <동주> 덕분에 시집을 찾는 사람이 좀 늘긴 했지만, 예전에 비해 시를 읽고 즐기는 사람이 많이 줄어들었다.

시보다 재미있는 게 너무 많은데 누가 시를 읽겠나.(웃음) 사실 따지고 보면 시는 예전부터 많은 이들이 널리 즐기는 문학작품이 아니다. 몇몇 사람이 즐겨온 시가 세상에 천천히 알려진 거지. 대신 그렇게 생명력을 가진 시는 오래간다. 시를 즐기는 사람의 영역이 점점 넓어지는 거다. 반면 게임은 수많은 사람이 동시에 즐기는 콘텐츠다. 그런데 어느 순간 흥미가 떨어지면 우수수 나가떨어진다. 다른 게임으로 옮겨 가는 거다. 하지만 시는 그렇지 않다. 한번 생명력을 가진 시는 오랫동안 사랑받는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시는 바퀴벌레처럼 끝까지 살아남을 거다.(웃음)

 

어떻게 보면 대중의 시에 대한 욕구는 남아 있는지도 모르겠다. 최근에 ‘SNS 시인이라 불리는 이들이 등장한 걸 보면. 그런데 이들도 시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들의 글은 시의 모양을 갖추고는 있지만 엄밀히 말하면 시라고 하기 어렵다. 우리 주변에는 노래 가사나 광고 카피처럼 시의 형태를 가진 것이 많다. SNS 시라고 불리는 글도 마찬가지다. 다만 그것을 ‘시’라 이름 붙이고 널리 알려지고 있으니 소설처럼 ‘장르 시’로 분류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시는 시인의 세계관과 자의식이 담긴 글이다.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이 시인을 통해 걸러 나오는 글이 시라고 생각한다. 시인의 자의식이 너무 지나치면 난해한 시, 자의식이 너무 모자라면 상업적인 시가 된다. 그 중간 지점을 지켜야 시가 품격을 지닐 수 있다.

 

요즘 사람들이 시를 제대로 즐기지 못하는 건 시가 가진 낭만을 허세라고 치부하는 분위기도 한몫하는 것 같다.

요즘 말로 오글거린다고 하더라.(웃음) 요즘 친구들은 진지한 걸 못 견디는 것 같다. 가벼워지는 게 꼭 나쁘다는 건 아니다. 나도 가볍게 살고 싶다. 생애 과정이 가벼운 건 좋지만 인생 목표까지 가벼운 건 아닌 것 같다. 목표에 도달했는데 남는 게 아무것도 없다면 얼마나 허무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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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 한 편에는 가슴 뛰는 설렘이 담겨 있다

시는 산문이나 소설보다 이해하기 어렵지만, 전달하는 메시지는 굉장히 강렬한 문학작품이다.

세상에 감동을 주는 것이 여러 가지 있겠지만, 그중 시는 복잡한 측면이 있는 게 사실이다. 감동받기가 단순하지만은 않다는 거다. 언어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몇 줄 안 되는 글, 즉 시로 감동받는 건 어려운 일이다. 그래도 사람들이 시로 인해 설레는 순간을 맛보았으면 한다. 모든 사람을 다 감동시킬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시를 읽는 사람들이라면 가슴 두근거리는 설렘을 느꼈으면 좋겠다. 좋은 시를 읽으면 밥을 안 먹어도 배가 부르다는 걸 알려주고 싶다. 마치 공중 부양하는 느낌이랄까.(웃음)

 

시인이 된 계기도 그 때문인가?

중학교 때까지는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다. 화가의 꿈을 키우며 교지에 들어갈 삽화를 그렸는데, 어느 날 선생님께서 그림 그리는 속도가 느리다고 귀뺨 두 대를 때렸다. 억울했다. 때린 선생님은 국어 담당이었는데, 내가 그림을 그린다고 해서 무시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시를 쓰기로 작정했다. 내가 쓴 시가 교지에 실리면 선생님도 놀라겠지 하는 마음에서였다. 그렇게 억울함을 풀기 위해, 선생님에게 복수하기 위해 시를 썼는데 안타깝게도 교지에 실리지 못했다. 고등학교 입학하고 나서도 혼자만의 복수전은 계속돼 문예반에 들어가 시를 배우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웬걸, 이 고등학교는 교지를 안 만들었다.(웃음) 그런데 이미 시를 읽기 시작했고, 어느새 그 재미에 푹 빠져버렸다. 수학 문제 푸는 것보다 시 읽고 쓰는 게 더 재미있는 걸 어떡하나. 1학년 말부터는 백일장 대회에 나가기만 하면 상을 휩쓸었다.

 

그때 만난 시인은 누구였나?

신경림, 고은, 황동규, 정현종, 김종성 시인이었다. 중학교 때까지는 어른 말 잘 듣는 모범생이었는데, 시를 읽기 시작하면서 좀 달라졌다. 성적도 뚝뚝 떨어지고. 가만히 있으라는 말에 가만히 있지 않았다.

 

지금도 그때 쓴 시를 갖고 있나?

물론이다. 지금 다시 봐도 잘 썼다.(웃음) 농담이고, 당시에는 상을 받기 위한 시를 썼다. 심사위원이 좋아할 만한 시를 쓴 거다.

 

스무 살에는 백석 시인에 푹 빠졌다. 그에 대한 애정을 바탕으로 <백석 평전>까지 펴냈다. 어떤 점이 마음을 흔들었나.

그동안 읽은 시들이 여성스러운 이미지에 가까웠다면, 백석의 시는 남성적이었다. 이전에는 미사여구를 사용하며 시를 썼고, 그런 게 시라고 여겨왔다. 하지만 백석은 표현이 정제돼 있고, 자기를 드러내지 않아도 할 말을 다 하더라. 그게 참 좋았다.

 

이후 교직 생활을 하다가 전업 작가가 되었다.

스물다섯 살, 국어 교사가 됐다. 당시에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 글 쓰는 일을 인생의 두 바퀴로 삼아 평생 살겠다고 다짐했다. 교직 생활을 하며 <연어>를 썼는데, 요즘 말로 ‘대박’이 났다. 교무실에 매일 전화가 울렸다. 거의 나를 찾는 전화여서 왠지 학교에 민폐를 끼치는 것 같았다.(웃음) 지금 생각해보니 <연어>의 상업적인 성공이 전업 작가를 하라고 부추긴 것 같다. 8년 정도 글만 쓰다가 우석대학교에 문예창작학과가 생기면서 다시 학생을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다. 가르치는 건 참 좋은 일인 것 같다. 누군가의 성장을 돕는 거니까. 물론, 때로는 망치기도 하지만.(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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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 시를 쓴다는 건 세상 물결에 휩쓸리지 않고 산다는 것

30년 넘게 시를 쓰고, 10권의 시집을 낸 시인이 돌연 시를 쓰지 않겠다고 했다. 이 말에 시인이 시를 쓴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자꾸 곱씹게 되더라. 시인이 시를 쓴다는 건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질문이 참 어렵다.(웃음) 음… 시인의 역할은 여러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남들이 미처 깨닫지 못한 것을 발견하도록 도와준다. 저기 파랗게 핀 꽃 이름이 뭔지 아나? 꽃무릇이다. 시인은 세상에 이런 아름다운 꽃이 있다는 걸 사람들에게 알려준다. 보물찾기처럼 발견의 기쁨을 알려주는 거지. 시인은 혼자서 중얼거리는 재미를 남들과 함께 나누기도 한다. 봄이 왔구나, 새가 우는구나 하는 생각을 글로 표현하고, 사람들은 그 글을 읽으며 시인이 깨달은 생각, 발견한 가치를 함께 나눈다. 마지막으로 시인은 시를 통해 사회의 부조리한 것에 저항하는 목소리를 담을 수 있다. 나는 이 세 가지를 다 해본 것 같다.

 

2013년 여름, “시를 단 한 편도 쓰지 않고 발표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산문이나 칼럼 등 다른 글은 써도, 시인이 만은 쓰지 않겠다는 것이 오히려 결연한 행동처럼 보였다.

군것질을 해도 밥은 안 먹는 것과 같다. 직무유기나 다름없는 거지, 뭐.(웃음) 나는 1961년 5·16군사정변이 일어났을 때 태어났고, 스무 살 되던 해에 5·18민주화운동을 겪었다. 그만큼 우리나라에서 민주주의가 어떤 가치를 지니는지, 민주화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수없이 생각하고 온몸으로 느낀 세대다. 하지만 최근 몇 년 동안 우리나라의 민주주의가 내가 알고 있는 것과 다르게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걸 느꼈다. 다시 거꾸로 간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일제강점기 때의 시인들처럼, 윤동주 시인처럼 시를 쓰며 저항하는 시대는 지났다고 생각했는데 그때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고 느껴졌다. 이러한 현실에서는 그냥 시 쓰기를 포기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시인이 시를 쓰지 않음으로써 사회에 저항하고 있다는 말처럼 들린다.

전라도 표현 중에 ‘너랑 말 섞고 싶지 않아’라는 게 있다. 말 그대로 상대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인정할 수 없고, 대꾸조차 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다. 한번 내뱉은 말이 너무나 쉽게 뒤집히는 시대다. 시인은 말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인데, 이런 상황에서 말을 섞고 싶지 않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도 시인인 채 살아갈 것인가?

지금껏 나는 시인이 된 것을 후회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시인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그나마 세상을 좀 삐딱하게 살 수 있었던 것 같다. 세상의 질서에 온전히 편입한 것이 아니라 약간 비켜서서 살아온 것이다. 세상이라는 물결, 그 흐름에 따라 흘러가는 게 아니어서 다행이다. 예를 들면 이런 거다. 난 돈 많은 사람이 부럽지 않다. 물론 인간적으로야 부러울 수도 있겠지만, 돈을 많이 버는 게 삶의 목표는 아니다. 이게 다 시인으로 살았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본다.

 

앞으로 어떤 시인이 되고 싶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살아야 하나? 그냥 살면 되는 거지. 나중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른다. 다만 지금은 좀 빈둥거리며 살고 싶다. 세상살이 속도에 휩쓸리지 않고 지내고 싶다. 뭐 나중에는 ‘안도현, 괜찮은 시인이었다’라는 말 정도 들으면 괜찮을 것 같다.

 

시인이 꿈꾸는 세상은 어떤 곳인가?

좀 덜 가져도 신났으면 좋겠다. 경쟁이 아예 사라질 수는 없겠지만, 경쟁이 우선인 사회는 싫다. 매일 가슴 뛰는 삶을 사는 세상, 그거면 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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