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5월호] 시계 수리 전문가
멈춰진 시계에 생명을 불어넣는 직업
인내심과 섬세함이 필요한 직업… 시계 수리 전문가를 만나다
“시간은 인간이 쓸 수 있는 가장 값진 것이다.” 그리스의 철학자 테오프라스토스의 말이다. 그의 말처럼 시간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시간은 억만금의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루를 최고의 선물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런 시간이 멈추면 어떻게 될까? 대구광역시 중구 교동의 귀금속 거리에는 멈춰진 시간을 깨우는 사람이 있다. 바로 박준덕(1949년생) 시계 수리 명인이다. 그는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한결같은 곳을 향해 걷는다.
그곳은 ‘공인사’다. 공인사는 시계 수리점으로 박준덕 명인이 1987년 개원해 29년째 운영하는 곳이다. 4평 남짓한 작은 공간, 이곳에서 죽은 시계에 생명을 불어넣는 명인의 하루가 시작된다. 멈춰진 다른 이의 시간을 고치며, 자신만의 시간을 굳건히 달리는 박준덕 명인을 만났다.
시계 수리 명인의 하루는 어떨까?
오전 11시, 그의 시계 수리가 시작되는 시간이다. 박준덕 명인이 오늘 수리할 시계는 ‘오메가 씨마스터’. 1980년대 결혼한 부모님의 예물이라며 손님이 맡긴 시계다. 박 명인은 먼저 시계의 소리를 듣는다. 시계를 흔든 뒤, 귀에 대고 소리를 들어본다. 마찰음에 이상이 있는지 검진하는 것이다. 그 뒤, 시계 뚜껑을 열어본다. 아주 작은 톱니바퀴가 부러져 있었다. 부품은 이미 단종된 터. 하지만 걱정하지 않는다. 직접 부품을 만들면 된다. 황동으로 톱니바퀴를 만든다. 초근접 촬영을 해야 보일 정도로 톱니바퀴가 작다. 0.2㎜ 정도다. 그는 1000분의 1의 오차도 용납하지 않는다.
시계는 굉장히 민감한 물건이다. 자칫 수리한다고 분해했다가 오히려 기계를 더 망가뜨릴 수 있다. 조그마한 시계 하나에 들어가는 부품은 90여 개. 소위 고급 명품이라 불리는 시계는 130~150개까지 달한다. 이렇게 많은 부품이 서로 맞물려 움직이기 때문에 하나라도 고장이 나면 시계는 멈춰버린다. 대부분의 부품은 육안으로 구별하기 힘들 정도로 작다. 전문 확대경은 필수다. 그만큼 시계 수리 기술인에게는 ‘인내심’과 ‘섬세함’이 필수다.
오버홀 작업… 분해뒤 점검, 수리
오버홀(Overhaul) 작업이 시작됐다. 오버홀 작업은 기계류를 완전히 분해해 점검하고 수리하는 것을 말한다. 시계에 생명을 불어넣는 작업이다. 5년마다 한 번씩 이 작업을 하지 않으면 시계는 멈추고 만다.
기계식 시계는 무브먼트 안에 작은 부품들이 많다. 마모 없이 잘 작 동하도록 윤활유를 넣는다. 5년 정도가 지나면 이 윤활유가 증발해 마른다. 그러면 부품의 마모가 급속히 진행돼 시계의 정확도가 떨어진다. 부식되거나 더러운 부분은 비행기 연료와 같은 성분의 세정제에 담근 뒤 닦는다. 하나하나 정성껏 손질해야 한다.
박준덕 명인을 찾아오는 시계는 하루에도 수십 개가 넘는다. 기자가 찾아간 날은 토요일, 그럼에도 그의 책상 서랍 안에 많은 시계가 쌓여 있다. 그러나 수리하는 내내 인상 한 번 찌푸리지 않는다. 오히려 거침없이 손을 움직인다. 톱니바퀴를 깎아 만들고, 시계에 잘 맞는지 재어본다. 시계를 살리는 그의 모습은 흡사 수술실의 의사 같다. 생명을 위해 힘쓰는 모습이 닮아 보였다.
마무리 단계… 시계 뚜껑 조립
이제 마무리 단계인 시계 뚜껑 조립에 들어간다. 그 전에 시계 무브먼트 안쪽에 자필 사인을 남긴다. 그가 시계 수리를 마치면 꼭 하는 일이다. 오늘의 날짜도 적는다. 일종의 그만의 보증서인 셈이다. 시계 뚜껑 조립에 박차를 더한다. 이로써 그의 손에서 또 하나의 시계가 살아나는 순간이다.
영국 시계학회 최고급 등급 Fellow Membership BHI에 임명되다
스위스는 시계의 나라라고 불릴 만큼 곳곳에 다양한 시계 학교가 있다. 배움의 과정은 2년, 4년, 6년 등으로 학생이 선택해 학교를 다닌다.
시계 학교에선 시계 메이킹, 시계 수리 등 시계에 대한 모든 것을 듣는다. 6년 과정을 선택하면 스위스는 물론 전 세계에서 알아주는 시계 전문가로 활동할 수 있다. 그런 전문가들도 선뜻 가지지 못한 자격증이 있다. 6년의 시간 동안 시계만을 배운 전문가들도 취득하기 어렵다고 한다. 그것은 바로 BHI(The British Horological Institute)다.
BHI는 영국 시계학회란 뜻으로 1858년에 설립한 이래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시계 자격증이다.
박준덕 명인은 1984년 BHI Final Grade(최고급 등급)에 합격했다. 1984년 그가 응시할 당시, 전 세계에서 내로라하는 베테랑 기술자 300여 명이 응시했다고 한다. 그중 Final Grade 최종합격자는 단 8명뿐이었다. 그리고 동양인은 박준덕 명인 단 한 명이었다.
그는 최고 등급 단계에 응시하기 위해 36권의 시계 이론과 실기, 제도에 관한 책을 이수해야 했다. 시험은 시계학 이론, 시계학 제도, 실기 테스트 등으로 총 3과목당 40점 이상이면 합격할 수 있다. 60점 이상이면 영예의 합격, 80점 이상이면 신의 경지라고 불릴 정도로 어려운 시험이다.
모든 시험은 영어로 본다. 이론시험은 머릿속에서 구상한 뒤 종이에 그리며 설명해야 한다.
‘시계의 방수는 어떤 원리로 작동되는지 정의를 밝히시오’, ‘시계탑 안에 들어간 부품은 무엇인지 설명하시오’ 등이 시험 문제로 나온다. 실기시험은 톱니바퀴 이상의 입체적인 부품을 만드는 것이었다. 정확히 만들어도 전체적으로 오차가 생기면 어김없이 탈락하고 만다. 마지막은 시계를 만들어보는 제도시험이다. 스스로 시계를 구상하고, 설계해 만들어보는 시간을 갖는다.
박준덕 명인은 두 번째 실기시험에서 눈부신 두각을 보였다. 주로 많은 응시자들이 고배를 마시는 단계다. 그는 실기시험에서 80점을 맞았다. 앞서 말한 신의 경지에 등극한 것이다. 단 한 번의 응시로 BHI 자격을 취득했지만, 그 과정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첫째, 언어적인 측면이다. 모든 교재와 시험은 영어로 치러졌다. 번역은 알음알음 도움을 받았다. 대부분 전문용어가 많아 그나마 수월했다고 한다. 둘째, 거리상의 문제다. 영국과 한국의 거리만큼이나 대구까지의 거리도 무시 못했다. 그런 이유로 박 명인은 통신교육 과정에 등록해 시험을 치렀다. 마지막으로 시간상의 문제. 가정형편상 영국에서 유학생활을 할 수 없었던 그는 BHI를 위해 오랜 시간을 독학했다. 가장으로서 시계 수리를 병행해야 했기에 10년을 준비할 수 밖에 없었다. 그 고초 끝에 단번에 합격이라는 놀라움을 보여준 것이다.
BHI란 무엇일까?
BHI는 ‘The British Horological Institute’의 약자로 영국 시계학회란 뜻이다. 영국 시계학회는 영국 국가검정시험을 주관하는 곳이다. 시험은 3단계로 나뉜다. 단계별로 초급(Preliminary Grade),중급(Intermediate Grade), 최고급(Final Grade)단계가 있다.
시계에 관심 있는 사람 누구나 회원으로 가입할 수 있다. 대신 무자격 회원(Associate, Licentite)과 유자격 회원(Graduate, Member, Fellow)으로 등급을 구분한다. 유자격 회원은 시계 학위 취득자와 영국 시계학회에서 시행하는 시험에 통과한 사람, 공적이 있는 현업 전문가에게만 주어진다.그들에게는 이용 자격이 부여되는데, GradBHI, MBHI, FBHI이 그것이다.
자격증은 색상마다 다르다. 초록색이 BHI에서 명장 칭호를 들을 수 있는 최고급 등급 자격을 의미한다. BHI 자격증은 시험에 합격한다고 수여하지 않는다. 시험을 본 뒤 학회에 가입하고, 학회에 가입한 뒤 10년을 훌쩍 넘어서 재평가한다. 10년이 지난 뒤에도 시계 수리를 계속해서 하고 있는지, 그동안 얼마만큼의 경력을 쌓았는지를 분별해 다시 평가하는 것이다. 1999년, 박준덕 명인은 그렇게 세계적인 명장 칭호 최고급 등급인FBHI(Fellow Membership BHI)의 자격증을 받았다. BHI 시험에 합격한 한국인은 박준덕 명인이 두 번째다. 첫 번째는 1980년대 스웨덴으로 이민 간 김창모 씨였다. 그의 등급은 초급 단계, 그럼에도 故김창모 씨는 BHI 때문에 예순을 넘긴 고령에도 시계회사에 취직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만큼 BHI 자격증은 시계 부문의 노벨상이라 불릴 정도 영광스러운 자격증이다.
호기심으로 시작한 시계, 전국 고장 난 시계들의 의사가 되다
박준덕 명인은 가난한 세탁소 집 아들로 태어났다. 경제적 어려움으로 초등학교까지만 졸업했지만 그의 상상력과 추진력은 멈추지 않았다. 그가 자란 마을은 라이터 전문 수리점이 즐비한 대구 골목이었다. 박준덕 명인에겐 그곳이 놀이터였다. 분해하고 조립하는 걸 좋아한 그의 호기심을 자극시키기엔 충분했다. 기계에 대한 호기심은 날로 커져만 갔다.
당시 그는 가스라이터를 휘발유 라이터로 개조시켜보기도 했다. 손재주는 날로 늘어만 갔다.
라이터 수리점의 주인들이 그를 찾아오는 건 시간문제였다. 초등학교 4학년, 어린 나이에 불과했던 그는 라이터 수리 하나로 교동에서 유명한 아이가 됐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박 명인에게 부친이 가져온 시곗줄은 최고의 장난감이었다. 당시 손목시계는 귀한 물품이었다. 시곗줄을 마음대로 줄이고 늘리며 시계에 눈을 떴다. 마침 집 앞에 시계 수리점이 있었다. 점포 주인을 겨우 졸라 어깨너머로 시계 수리를 배웠다. 석 달이 지나자 10년의 수리 경력을 가진 주인에겐 더 이상 배울 게 없었다. 어린 박 명인은 시계를 배우고자 하는 욕심이 있었다. 그 욕심은 시계를 위해 대구와 서울을 비롯해 전국을 돌아다니게 한 촉매제였다. 뛰어난 시계 수리 전문가가 있다면 어디든 찾아다녔다. 그렇게 시계에 몰두한 결과 25세 무렵, 전국적으로 유명한 시계 수리사가 됐다. 전국에서 유명한 시계 기술자들이 수리하다 포기한 시계가 돌고 돌아 그에게 찾아왔다.
1950년 숨 멎은 시계, 바다를 건너 그의 손에서 다시 생을 얻다
박준덕 명인은 국내에서만 유명한 것이 아니다. 전 세계에서 고장 난 시계가 그를 만나기 위해 한국으로 온다. 이탈리아, 스위스에서도 고치지 못한 시계가 박 명인을 만나러 온다. 유독 그에게 오는 시계는 사연이 많다. 2014년 12월 29일 박 명인을 만나기 위해 찾아온 시계도 꼭 그랬다. 이 시계는 손 안에 들어오는 작은 회중시계로 이탈리아, 스위스, 만주를 거쳐 박 명인에게까지 왔다.
시계의 주인은 수리를 맡긴 이호준 고객의 외할아버지. 그는 한국전쟁 당시, 군인으로 참전중이었다. 안타깝게도 전쟁에서 의사했고, 시신은 찾지 못했다. 그때, 겨우 회중시계가 증거가 돼 외할아버지를 찾을 수 있었다. 그만큼 호준 씨의 가정에서는 회중시계가 소중하고 귀한 물품이었을 터. 하지만 고장 난 채 돌아온 회중시계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수리할 수가 없었다. 외할머니가 수리하기 위해 애썼지만 고치지 못한 채 돌아가셨고, 그 딸에게로 다시 그 아들에게로 대물림됐다. 3대의 염원이 담긴 회중시계는 호준 씨 대에 와서야 수리할 수 있었다. 바로 박준덕 명인을 만나면서 말이다.
기자가 박준덕 명인을 만나러 간 당시, 회중시계는 깨끗하게 수리돼 있었다. 호준 씨는 “제발 초침만이라도 움직이게 해달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박 명인은 초침이 움직이는 것은 물론 회중시계의 시간도 제대로 맞춰놓았다. 시계 수리기간까지 꼬박 4개월이란 시간이 걸렸지만, 그만큼 소중한 시계이기에 박 명인은 온 힘을 다했다고 말한다.
“시계의 부품이 모두 부서지고 망가졌었지. 생명이 다한 시계나 마찬가지였어. 그래도 어떡하나, 그만큼 가족에겐 소중한 시계였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어. 그래도 뿌듯해요. 시계 수리를 마쳤다고 전화했을 때 그이(이호준 씨)가 느낀 벅참이 나한테도 느껴졌거든.”
그가 수리한 회중시계는 이제, 시계 이상의 가치를 지니게 됐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인성 교육, 기술자가 되기 전 사람이 돼라
박준덕 명인을 만나러 오는 것은 시계만이 아니다. 그에게 시계 수리를 배우고 싶은 사람들도 많다. 그가 지금까지 배출한 제자만 해도 수십 명. 현재 시계 수리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 중 대부분은 그를 거쳐갔다. 자신이 스스로 배운 것들을 아낌없이 주는 박준덕 명인. 하지만 아무나 제자로 받지 않는다. 그에게도 제자 선별법은 있다. 시계에 대한 흥미와 재능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더욱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있다. 바로 ‘태도’가 바른 사람이다. 그는 제자를 받을 때 바른 태도를 가지고 끈기 있게 열중할 수 있는 사람인지를 우선 살핀다.
“먼저 기술을 배우기 전에 인간이 되라고 말해요. 의사가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하면서 다시 태어나는 것처럼 말이야. 기술도 마찬가지요. 인성 교육부터 시켜야 하는 기라.” 그는 특히 ‘인성’을 강조했다. 아무리 기술이 뛰어난 사람이라도 인성이 좋지 않으면 좋은 기술자가 되기 힘들다는 점을 한시도 잊지 않았다. 훌륭한 기술자는 돈보다 자신의 기술에 대한 책임과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간다. 돈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기술을 위해 자신을 계속해서 연마하는 것. 그것이 기술자의 태도라고 말한다. 박준덕 명인을 지금 이 자리에 있게 한 가장 중요한 철학이다.
박준덕 명인에겐 아끼는 제자가 있다. 기술자의 올바른 태도를 배우며 그의 철학을 이어간 제자다. 한 명도 아닌 한 쌍, 그들은 바로 서정민 박정배 부부였다.
“서정민, 이 여학생이 어느 날 무작정 시계를 배우고 싶다고 나를 찾아왔어. 딱 보니까 사람 됨됨이도 좋았고, 재능도 있었지. 시계를 배우고자 하는 눈빛이 남달랐어. 그렇게 시계 기술을 알려주니까 금세 유명한 시계 브랜드 회사에 취직도 했어. 결혼도 했고. 남편도 나에게 시계 수리를 배우던 친구야. 그런데 어느 날 이 두 사람이 독일로 떠나버렸어. 자기들도 나처럼 BHI 자격증을 따고 싶다고 말야.”
서정민 박정배 부부는 현재 독일에서 시계제조 학교를 다닌다. 수업을 받으며 시계회사에서 일도 한다. 한국에서 BHI 최고 등급을 받은 사람에게 시계를 배웠다고 하니, 바로 시계회사에 추천을 해준 것이다.시계 수리하는 일을 생명을 고치는 일이라 생각하며, 자신의 길을 묵묵히 가는 제자들을 이야기할 때 박준덕 명인의 눈은 자랑스러움으로 가득했다. 그러다 자녀에겐 왜 시계 수리를 가르치지 않았는가 하는 궁금함이 들었다.
“당연히 가르쳐봤지. 그런데 아들의 적성에 시계 수리는 맞질 않았어. 자기 소질에 맞지 않는 걸 가르치면 안 되거든. 아들의 적성에 맞는 걸 가르쳐줘야지. 흥미가 없으면 재능도 늘지 않아요. 사람들은 저마다 소질이 있어. 사람마다 지문이 다른 것처럼 사람의 특성과 소질도 모두 달라요. 자신의 꿈과 소질에 맞게 배워야 하는데, 요즘은 그게 어려운 것 같아.”
그는 50년 세월 동안 시계 하나만 바라보며 길을 걸었다. 자신이 좋아한 마음이 커, 아무리 힘들어도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달려왔다. 평생을 시계와 살아왔지만, 그는 지금도 시계와의 꿈을 꾼다.
“평생 시계의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고 싶어. 이게 내 천직이야. 사람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아야 해. 한 가지 꿈이 더 있다면, 한국에서 시계 무브먼트를 만들 때 그 자리에 내가 있는 것이오. 시계 만드는 자격증도 있으니 말이야. 계속해서 꿈꾸는 거지.”박준덕 명인은 원대한 꿈을 담은 청년의 눈으로 기자를 바라보았다. 그의 말 한마디에 4평밖에 되지 않는 작은 ‘공인사’가 드넓은 초원처럼 넓어 보였다. “시간은 인간이 쓸 수 있는 가장 값진 것이다.” 앞서 테오프라스토스의 말처럼 여전히 그는 자신의 시간을 가장 값지게 보내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