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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호]현대저널리즘의 아버지 – 조셉퓰리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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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7년, 헝가리 출신의 한 청년이 미국으로 가는 배에 몸을 실었다. 돈벌이를 위해서였다. 유복했던 집안은 아버지를 여의자 파산에 이르렀고, 어머니는 재혼을 했다. 도망치듯 집을 나온 그
는 군인이 되고자 했지만, 물거품이 됐다. 중개인이 그를 팔아버린 것이다. 미국에 도착한 그는 어둠을 틈 타 도망쳤다. 우여곡절 끝에 독일인들이 많이 사는 세인트루이스로 향했다. 그곳에
서도 삶은 녹록지 않았다. 어렵게 소개받은 일자리와 그동안 모은 돈 마저 사기를 당하게 된다.
영어에 서툰 이민자 청년은 사기꾼의 먹이가 되기 십상이었다.
청년은 사기꾼을 잡아야겠다는 일념으로 독일어 신문사 <베스트리헤 포스트·Westliche Post>에 사건의 전말을 폭로했다. 글 솜씨에 놀란 편집장은 그를 단번에 고용했다. 당시 발행인 칼
슐츠는 그를 “분통이 터질 만큼 꼬치꼬치 캐묻는 모습이 타고난 기자였다”고 말했다. 그 청년이 바로 현대 저널리즘의 창시자라 불리며, 퓰리처상을 만든 조셉 퓰리처(Joseph Pulitzer,
1847~1911)다.

 

[신문의 고정관념을 깨다]

기자로서 온갖 활약을 펼치던 퓰리처는 1878년, 파산 직전의 신문사 <세인트루이스 디스패치>와 <세인트루이스 포스트>를 합병해 <세인트루이스 포스트-디스패치>를 창간한다. 대중에게 ‘읽히는 신문’을 만들고 싶던 그는 생생한 문체와 파격적인 기사를 원했다. 표지 제목에는 ‘충격폭로’, ‘대 특종’이란 단어로 가득 찼다.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건 순식간이었다. 발행부수는 3년만에 4천부에서 2만3천부로 크게 늘었다. 퓰리처는 여기서 만족하지 않았다. 마음은 벌써 저널리즘의 중심인 뉴욕에 가 있었다.
퓰리처는 매년 적자를 내던 <뉴욕 월드>를 사들였다. ‘재미없는 신문은 죄악’이라고 여기며 대중적인 신문을 만들어야 한다는 평소의 소신을 굳건히 지켰다. 정부와 사회의 부패를 거침없이 폭로했으며, 세상 사람들의 관심을 끌만한 스캔들과 선정적인 내용을 1면에 실었다. 결국 <뉴욕월드>는 미국 최대 판매 부수를 올리게 됐다.
퓰리처 이전의 신문은 단순히 정부의 새로운 정책이나 소식을 전하는 매체였다. 하지만 퓰리처는 달랐다. 그는 신문에 대한 고정관념을 완전히 깼다. 스포츠를 실었으며, 여성 기자를 배출했다. 신문에 만화나 삽화를 넣기도 했다. 또한 사람들이 즐길 거리만 모아 일요판을 따로 발행했다. 신문에 오락성과 상업성을 접목한 것이다.

 

[두 얼굴을 가진 퓰리처, 황색 언론 VS 도덕교사]

고공행진을 달리던 퓰리처에게 도전장을 내민 신문이 마침내 나타났다. 퓰리처의 신문을 복제하고선 말이다. 바로 <뉴욕 저널>이다. 신문사의 경영인은 한때 퓰리처의 수습기자로 활동했고,퓰리처의 신문을 격찬하던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William Randolph Hearst)였다. 바로 옆 건물에서 퓰리처의 복제판을 만들던 허스트는 퓰리처의 <뉴욕 월드> 절반 가격으로 <뉴욕 저널>을팔았고, 퓰리처의 직원들을 고액으로 스카우트했다. <뉴욕 월드> 일요판에 실려 뉴욕을 풍자해엄청난 인기를 누리던 노란아이(The Yellow Kid)의 작가 아웃콜트(Richard Felton Outcault)마저말이다. 그렇게 두 신문사간 과열 경쟁이 시작됐다. 퓰리처는 아웃콜트에게 더 많은 금액을 제시하며 다시 스카우트했다. 결국 아웃콜트는 <뉴욕 저널>로 다시 옮겨갔다. 퓰리처는 멈추지 않고‘노란 아이’ 캐릭터를 미리 특허신청 해놨다며 다른 작가에게 그리게 했다. 두 신문사 간의 양극화는 더욱 심해졌다. 과장된 기사, 기사 빼돌리기는 물론 함정을 설치해 잘못된 정보로 상대 기자를 유인하기도 했다. 사람들은 두 신문사의 과열된 경쟁보도와 선정적인 내용을 두고 노란 아이를 빗대 ‘황색 언론(Yellow Journalism)이라고 불렀다.
지나친 취재비용과 과도한 스카우트에 두 신문사는 엄청난 타격을 받았다. 이후 신문의 방향을다시 바꾼 퓰리처는 “내가 부패와 타협하면 나를 무시해라. 신문은 옳은 것과 그른 것을 가르
치는 도덕교사”라는 말을 하며 끈질긴 고집으로 진실을 밝혀냈다. 국가권력, 정치인, 로비스트,악덕 기업인들의 공격에 맞서 부패 추방 캠페인을 벌였다. 파나마 운하 건설과정에서 부정행위를 감추려는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대통령에 맞선 사건은 유명하다. 또한 선거 연임에 나선 루스벨트 대통령이 정권을 연장하기 위해 전쟁 위기설을 확산시켰다고 폭로해세간을 놀라게 했다. 루스벨트는 퓰리처에게 “구속 시키겠다”며 협박했지만 퓰리처는 물러서지 않았다. 결국 루스벨트는 낙선했다. 언론인으로서 전투적 저널리즘을 지킨 것이다.
퓰리처는 지금도 두 얼굴을 지닌 인물로 기억된다. 현대 저널리즘을 창시했지만, 언론의 역기능까지 탄생시킨 장본인으로 말이다.

 

[퓰리처상, 언론계의 노벨상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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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최고의 언론인에게 수여되는 퓰리처상 메달.

미국의 4월은 ‘언론의 달’이라 불린다. 전 세계 저널리즘의 축제라고 불리는 퓰리처상 수상자가 발표되기 때문이다. 퓰리처상은 언론계의 노벨상이라고 불릴만큼 권위 있는 상이다. 퓰리처상은 퓰리처 자신이 제정했다. 황색 언론의 대명사가 된 퓰리처는 속죄의 의미로 바른 언론인을 양성하고 싶었던 것이다. 퓰리처상은 그렇게 시작됐다.
1917년을 첫해로 매년 4월에 수상자를 발표해 5월에 시상한다. 언론에 관련된 상은 뉴스, 보도,사설, 만평 등 14개 부문이 있고, 문학·드라마·음악 부문에는 총 7개의 상이 있다. 특히 언론에
관한 뉴스와 보도사진 부문은 큰 영향력을 끼친다. 퓰리처상 저널리즘 부문은 해외 국적을 가진 기자도 미국 언론에서 활동한다면 퓰리처상을 받을 수 있다.
한국인 수상자도 있을까? 영광스럽게도 있다. 지금까지 4명의 한국인(한인 포함) 기자가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1999년 빌 클린턴 대통령의 스캔들을 추적 보도해 특집 사진부문에서 수상한강형원 기자(AP 워싱턴지국)를 시작으로, 최상훈 기자(AP통신 서울특파원), <뉴욕타임스>의 이장욱 기자, <시카고 선타임스>의 존 김(한국명 김주호) 기자가 그들이다.
최상훈 기자는 2000년, ‘노근리 사건’을 집중 취재해 탐사보도 부문을 수상했다. 이장욱 기자는2개 부문에서 상을 받는 쾌거를 이뤘다. 9·11테러 당시의 처참함을 담은 사진과 아프가니스탄
전쟁 현장의 사진으로 2002년 ‘속보뉴스 사진부문’과 ‘기획 사진부문’에 선정된 것이다. 존 김 기자는 2011년 ‘지역보도 부문’ 수상자로 선정됐다. 1년 동안 시카고 지역 총기사건을 심층 취재한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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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02년 속보뉴스 부문 퓰리처상 수상작(이장욱 기자)
▲2·3 2011년 지역보도 부문 퓰리처상 수상작(존 김 기자)

 

 

[자유의 여신상 발가락에 퓰리처의 이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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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독립 100주년을 기념해 프랑스로부터 자유의 여신상을 선물 받는다. 하지만 뉴욕 시의 재정난으로 자유의 여신상을 세울 받침대를 마련하
지 못했다. 이때 퓰리처는 자유의 여신상을 시민의힘으로 세우자는 기금 참여 캠페인을 신문에 게재했다. 마침내 1886년 10월 28일 맨해튼의 리버티
섬에 자유의 여신상이 세워졌다. 그 공로를 인정해자유의 여신상 발가락에 퓰리처의 이름이 새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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