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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호] 고전에 빠지다- <슬픈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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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혁

 고전이 죽음과 만나는 방법

여행으로 본 구조주의,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슬픈 열대>

 

MODU 친구들 주목! 2015년에 국어 교과에 ‘고전’ 과목이 생긴다는 것 들어봤어? 발 빠른 친구들은 벌써 알고 있겠지만, 모르는 친구들도 있겠지? 고려가요나 시조 같은 고전 문학이 아니라 진짜 세계의 고전을 읽어야 한다는 것! 루소의 <사회계약론>이나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같은 책들을 공부해야 한다니,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지끈하지? 고전 과목이 생긴 건 여태껏 고등학교 수업이 사고력을 길러내지 못한 데 대한 반성 때문이라고 해. 그리고 ‘물수능’이 계속되면서 수시가 점점 중요해지기 때문이기도 하지. 아무튼 고전읽기는 이제 피해서는 안 되고, 피 할 수도 없는 현실이야. 그런데 갑자기 안 읽던 책을 읽으려니 막막하지? 그래서 MODU가 준비했어! ‘MODU, 고전에 빠지다’ 대학에서 좋아하는(!) 고전을 엄선해서, 함께 읽고 해 볼만한 생각도 공유하는 코너야. 혹시 MODU와 함께 고전 읽기 토론을 해 보고 싶은 사람은 contents@modumagazine.com으로 연락 줘~ 신청자가 많으면, 너희들을 토론 내용을 이 코너에 소개하려고 해 ^^

 

대망의 첫 번째 책은 프랑스의 인류학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가 쓴 <슬픈 열대>야. 1955년에 출간됐는데, 14개 국어로 번역될 만큼 호평을 받았지. <슬픈 열대>는 레비-스트로스가 브라질을 여행하고 쓴 기행문 형식의 글이야. 그래서 어마어마한 두께에도 불구하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고전으로 손꼽혀. 많은 사람들이 레비-스트로스를 ‘구조주의’의 선구자라고 해. 구조주의는 사회 현상을 연구할 때, 겉으로 드러난 부분만 볼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숨어 있는 거대한 흐름까지 파악해야 한다는 이론이야. 그래서 레비-스트로스는 그 많은 곳을 여행하면서도 그 안에서 공통적인 질서를 발견하려고 했어. 이런 생각은 우월한 문화도 없고 열등한 문화도 없다는 생각을 발전시키는 데 큰 도움을 줬어. 그럼 레비-스트로스의 <슬픈 열대>속 이야기를 같이 한번 읽어보자.

슬픈열매-책-이미지

 

한 가지 이야기를 먼저 들려줄게. 아프리카 지역의 부족인 아잔데족의 이야기야. 어느 날 아잔데족 한 사람이 여름에 낮잠을 자다 죽었어. 창고 옆 그늘에서 자고 있었는데, 갑자기 창고가 무너져서 압사하게 된 거지. 죽음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부족의 다른 이들은 질문을 던지기 시작해. “왜 거기서 낮잠을 자고 있었는가? 유난히 더운 날이었기 때문이다.” “왜 창고가 무너졌는가? 흰 개미가 기둥을 파먹었기 때문이다.” “왜 하필 그때인가?” 질문은 끝나지 않았지. 무한히 소급되는 질문 속에서 아잔데족은 하나의 답을 찾아. “그것은 주술 때문이다.” 이건 지금 우리의 언어로 풀이하면 “그것은 신의 뜻이다”와 비슷한 맥락이야. 죽음은 너무나 큰 사건이고, 이해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절대적인 해답을 찾게 되는 거지. 이 이야기를 한 건 죽음을 다루는 방식은 모든 문화가 다르면서도, 또 비슷한 점도 많다는 말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야.

<슬픈 열대>에는 이런 문장이 나와. “아마 경의를 갖고 죽은 자를 대하지 않는 사회란 없을 것이다. 우리가 아는 바로는, 인류가 아직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을 무렵에도 이미 네안데르탈인은 몇 개의 돌멩이를 쌓은 무덤 속에 죽은 자를 묻었다. 물론 장례식은 집단마다 서로 다르게 거행된다. 그렇지만 우리가 이 같은 ‘다름’에 내재하는 보편적인 감정을 생각해본다면, 이 다름을 무시할 수 있을 것인가?”(<슬픈 열대>, 박옥줄 옮김, 한길사) 레비-스트로스가 보로로족을 관찰하고 쓴 부분이야. 그는 이 부족을 통해 죽은 자와 산 자의 경계에 대한 관심을 표현했어.

보로로족 이야기를 좀더 살펴보자. 보로로족에는 ‘모리’라는 개념이 있어. 보로로족은 인간과 자연은 서로 대립하고 있는데, 인간이 죽으면 자연으로 돌아가게 된다고 생각했어. 이것은 인간에겐 손해이고 자연에겐 이득이지. 그래서 보로로족은 누군가가 죽으면 자연이 그 답례로 사냥감을 준다고 생각했어. 말하자면 자연이 ‘빚을 갚는 것’이지. 이때 사냥물로부터 얻은 것들을 모리라고 해. 표범의 이빨이나 발톱 같은 것들 말이야. 보로로족은 죽음을 통해 인간과 자연이 균형을 이룬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 거야. 어때, “신의 뜻”만큼이나 죽음을 설명하는 참신한 방법이지?

또 우리가 죽음을 대하는 방법으로는 장례식이 있어. 레비-스트로스가 “현생 인류가 없었던 시절에도 네안데르탈인은 몇 개의 돌멩이로 무덤을 만들었다”고 말한 것에서도 알 수 있지. 장례식은 지역적으로는 다른 형태로 치러지지만, 보편적인 문화라는 뜻이야. 물론 인간들은 장례식 없이 시신을 안치할 수도 있고, 인간 유해를 전시할 수도 있지만 그런 일은 품위가 없거나 타락했다고 인식되기 쉬워.(마이크 파커 피어슨, <죽음의 고고학>) 따라서 장례식은 살아 있는 자들의 몫이 되고, 그래서 장례식은 ‘죽음의 시작’이 아니라 ‘삶의 마지막’에 가까운 거지.

물론 모든 죽음 앞에서 살아 있는 자들이 견딜 수 없는 큰 고통을 받는 건 아냐. 세상에는 ‘좋은 죽음’이라 불리는 죽음도 있으니까. 살아서 크게 고통 받은 이들에겐 죽음이 ‘안식’일 수도 있잖아. 이건 내 이야기야. 작년에 외할머니가 돌아가셨어. 10년 가까운 시간을 병상에서 보내셨지. 장례식에서 누구도 ‘호상’이라는 말을 꺼내지 않았지만, 대체로 그 단어를 마음 속에 품고 있는 듯 보였어. 물론 모두가 슬퍼했지만, 외할머니의 죽음은 고통의 끝처럼 보였어. ‘좋은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어. 필립 아리에스는 자기 책에서 하나의 편지를 소개하는데, 그 편지에는 죽음이 신의 축복이라고 적혀 있었어. 편지를 쓴 사람은 온몸을 뒤덮은 염증으로 큰 고통을 받고 있었거든. 어때, 너희는 ‘좋은 죽음’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해? 한번 생각해 볼 만한 문제지?

물론 죽음에 대해서는 ‘불결하다’는 생각도 있는 것 같아. 일본 영화 <굿바이>에는 갑자기 시신을 관 속에 넣는 일을 하게 된 전직 오케스트라 단원이 나와. 돈을 많이 벌 수 있어서 일을 시작했지만, 그는 그 사실을 숨겨. 그리고 그게 밝혀졌을 때 그의 아내는 “불결하니까 만지지 마”라고 소리를 지르기도 하지. 시체를 만지는 일이 더럽게 여겨졌기 때문이야. 그래서 인간은 보통 삶과 죽음을 분리해. 한국에는 장례식장에 다녀온 이에게 소금을 뿌리는 풍습이 있었지. 이는 죽음이 ‘내 집’으로 들어오는 걸 막기 위해서였어. 그리고 죽은 이들을 모아 공동묘지를 만드는 것도 이런 이유였지. 죽음의 영역과 삶의 영역을 분리해야 했으니까.

“어떤 사회에서는 죽은 자를 쉬게 내버려둔다. 어떤 사회는 쉬게 하지 않고 오히려 불러낸다. 죽은 자의 장점과 능력을 물려받고 싶다며 시체를 먹는 풍습을 행하기도 한다. 이런 사회에서는 자신들이 죽은 자를 이용했기 때문에, 그 죽은 자가 사회의 안녕을 무너뜨린다고 느낀다.”(<슬픈 열대>) 너희는 죽음을 어떻게 대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생각해? 세상에 흩어진 죽음에 관한 많은 풍습 가운데 이런 방법이 좋겠다고 여겨지는 것들이 있어? 한 가지 명심해야 할 건, 어떤 풍습도 우월한 건 없고 미개한 것도 없단 거야. 더 우월한 문화가 없는 것처럼. <슬픈 열대> 속 죽음을 통해 그런 걸 느낄 수 있다면 더 좋을 것 같아.

 

생각해봅시다

1. 글에 소개되지 않은 죽음에 관한 풍습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2. 이슬람의 ‘명예살인’이나 ‘히잡 강제착용’처럼 비판 받는 문화적 관습이 많다. 이런 것들도 존중해야 할까?

3. 한국의 이주 노동자와 결혼 이주의 문제점에 대해 아는 것을 말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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