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호] 기업가정신- 네오위즈, 장병규
글/SNUSV
편집/권태훈, 이진혁
자료제공/<어떻게 창업하셨습니까?>21세기북스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실행은 빠르게”
장병규 – 네오위즈 창업자, 현 본엔젤스 대표
한 번도 성공하기 힘들다는 창업을 무려 네 번이나 성공한 사람이 있다. 그것도 모두 쟁쟁한 기업들이다. 장병규 현 본엔젤스 대표는 1997년에는 벅스 뮤직, 게임 피망, 국내 최초의 웹 기반 채팅 서비스 세이클럽을 만든 ‘네오위즈’ 설립했다. 2005년에는 검색 서비스 회사 ‘첫눈’, 2007년에는 게임 테라(TERA)를 만든 ‘블루홀 스튜디오’를 만들었다. 2010년부터는 벤처투자 회사 ‘본엔젤스’를 설립하여 ‘배달의 민족’, ‘틱톡’, ‘스피킹 맥스’ 등 많은 후배 기업들을 육성하고 있다. 태어날 때부터 창업가의 기질을 갖고 태어나 학창시절 엄청난 준비를 했을 것 같지만 그는 결코 그렇지 않았다고 말한다. 우연한 고등학교 선택과 이후 주어진 환경에 최선을 다하다 보니 어느덧 네오위즈 성공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네오위즈의 큰 성공 이후 자신의 삶과 진로에 대해 새롭게 고민하고, 자신의 의지를 통한 선택으로 오늘날에 이르렀다는 장병규 대표. 그의 이야기는 성공하기 위해 빨리 꿈을 찾을 것을 종용하는 현 사회에 새로운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장병규 대표님의 어린 시절은 어땠나요?
특별하진 않았어요. 과학고를 진학한 것이 남들과 좀 달랐던 정도겠네요. 과학고를 선택한 계기는 단순해요. 우선 부모님께서 한번 과학고에 가보지 않겠냐는 이야기를 하셨고, 거기에 그 당시 여자친구가 과학고를 간다고 해서 저도 시험을 친 거거든요(웃음). 당시에는 과학고가 지금과는 달리 흔하지 않은 선택이었어요. 그 길을 우연히 선택하게 된 것이 어떻게 보면 지금의 삶을 만들게 된 거죠. 그렇게 과학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카이스트로 진학했어요. 좋은 환경을 얻은 거죠. 인터넷 시대 초창기의 수혜를 다 받을 수 있었거든요. 오늘날 카이스트 출신 중에 닷컴 쪽으로 창업한 사람들이 많은데, 왜 그런지를 생각해보면 그 사람들이 훌륭한 것도 물론 있지만 새로운 환경을 남들보다 빨리 받아들일 수 있었던 이유도 있어요.
대학 진학 후 진로에 대해선 어떤 생각을 갖고 계셨나요?
저희 때는 사실 지금보다는 좋은 시절이었던 것 같아요. 솔직히 졸업하고 취직 걱정은 전혀 안 했던 것 같고요. 취업이 안 되는 경우는 없었으니까요. 병역에 대한 고민은 좀 했죠. 그냥 졸업하면 군대에 가야 하니까 석사나 박사 과정을 밟아 병역특례를 받는 것에 대해 고민했죠. 그렇지만 그렇게 많은 고민을 한 것 같진 않아요. 남들이 가는 길을 갔죠. 어떻게 보면 우연하게 과학고에 간 것이 창업까지 쭉 이어진 것 같아요.
그럼 네오위즈 창업 이야기로 넘어가겠습니다. 대표님은 1997년에 석사 과정을 마치고 창업하셨는데요. 그 계기에 대해 말씀해 주세요. 그리고 창업하면서 구체적인 목표나 비전 같은 걸 세우셨었는지요?
네오위즈의 경우 정확하게는 기술팀이 먼저 만들어졌어요. 그 후에 따로 있던 경영팀이 합쳐졌죠. 기술팀이 처음 모일 때는 “3년 고생해서 어떻게든 10억 정도를 벌자”는 목표가 있었어요. 불법적인 일이나 나쁜 짓은 하지 말자는 다짐도 있었죠. 창업하게 된 계기도 어떻게 보면 단순해요. 네오위즈 공동창업자가 보통 여덟 명으로 알려져 있는데 사실 한 명이 더 있었어요. 그분이 기술팀을 모았고 저는 그것을 지원했죠. 곧 박사과정을 마치는 그분이 창업을 강하게 원했기 때문에 그걸 실행에 옮길 수 있도록 제가 도운 거였어요.
처음 멤버들 중에서 기억에 나는 사람이 있으신가요? 기억에 남는 사건은요?
몇 명은 이미 대학교 때부터 호흡을 맞춰봐서 일을 잘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요. 그 외에 개발팀 두 명이 더 있었는데 사실 ‘사람 많으면 좋지’하는 마음으로 함께했어요. 그 둘은 노는 것을 좋아해서 학점도 낮은 카이스트의 문제아들(웃음)이었죠. 그런데 그 ‘문제아’ 두 명이 네오위즈가 발전하는 데 큰 역할을 했어요. 그중 한 명은 1주일 동안 사무실 밖에 안 나간 적도 있어요. 자고 일어나면 개발하고, 또 자고 일어나면 개발하는 식으로 하루종일 일했어요. 계산해보면 거의 일주일에 110시간씩 일을 한 거예요. 저는 1주일에 40시간 일하자고 주장하는 사람인데, 그것보다 세배 가까이 일한 거잖아요. 그런데 실제로는 세배가 아니라 열 배 넘게 차이가 나요. 엄청나게 몰입해서 일을 했거든요. 다른 일은 전혀 안 하고 개발만 했으니까요.
그렇게 1997년 시작한 네오위즈는 금세 그 잠재력을 나타냈다. 네오위즈를 성공한 벤처기업 반열에 올려놓은 서비스는 ‘원클릭 서비스’였다. 원클릭은 번거로운 통신환경 설정이나 프로그램 설치 없이 누구나 컴퓨터와 모뎀, 전화선만 갖추고 있으면 쉽게 인터넷을 이용할 수 있게 해주는 프로그램이었다. 당시는 인터넷에 접속하려면 컴퓨터 통신환경을 세팅하는 복잡한 작업들이 많았는데 이를 한 번에 해결해주는 프로그램을 개발한 것이다.
많은 벤처기업이 문을 닫기도 하는데 네오위즈가 훌륭한 아이템을 개발하고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빠르게 대처한 게 가장 컸던 것 같아요. 어떤 아이템을 하다가 조금 이상하면 “다른 투자를 하자”고 빠르게 판단했고, 원클릭을 해보니 “잘 되는구나. 빨리하자”며 밀어붙였죠.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빠르게 실행한 것이 성공의 요인인 것 같아요. 어떤 결정을 내릴 때 내부에서 치열하게 고민하고, 실행하고, 문제가 생기면 빨리 보완하고. 그런 응집력이 큰 경쟁력이었던 것 같아요.
세이클럽을 시작하게 된 과정에 대해서도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사실 우연한 계기로 시작했어요. 한 대학생이 네오위즈를 찾아왔어요. 학교에서 공부를 2년 반 해보니 재미가 없다는 이유였어요. 그래서 뭔가 일거리를 달라고 했는데 사실 적당한 일을 찾아 주기가 힘들었어요. 그래서 그 아르바이트생에게 그냥 “하고 싶은 거 아무거나 해도 된다. 경험이니까 무엇이든 개발해보라”고 말했어요. 그래서 만들어진 게 채팅 프로그램이에요. 그 아르바이트생이 채팅을 만들겠다고 하길래 공동창업자 한 명이 조언을 해주고 방향을 잡아줬죠. 하지만 실제 일은 아르바이트생이 다 했어요. 그런데 만들어놓고 보니 다른 채팅 서비스보다 훨씬 빠르고 별도로 설치해야 하는 프로그램이 없어 간편했죠. 무섭게 성장해서 서너 달 만에 시장점유율이 30%나 됐어요. 엄청난 인기였죠. 이후 1999년에 ‘세이클럽’이란 이름으로 정식 오픈했어요.
사용자가 급격히 늘어나면서 음란 채팅 문제나 서버 부족처럼 예측하지 못한 문제도 생겨났어요. 우리는 그런 일에 누구보다도 빨리 잘 대응한 것 같아요. 아직도 기억나는 일들이 많죠. 돈이 부족하니까 서버 구하러 다니고, 비용 낮춰달라고 협상하고… 이후 아바타 판매 등 부분 유료화 모델을 개발해서 더욱 성공할 수 있었어요. 사실 당시에 아무도 그렇게 잘 될 거라고 생각을 못 했죠. 지금 넥슨이나 카카오가 부분 유료화를 하고 있는데 그것보다 훨씬 앞선 거였거든요. 2000년에 주식 시장에 상장할 때도 세이클럽이 큰 도움이 됐어요.
네오위즈에서 원클릭, 세이클럽 외에도 많은 서비스를 시도했지만 실패한 서비스도 많다고 들었습니다.
네. 실패한 것도 상당히 많아요. 특히 세이클럽에서 게임 서비스 피망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실패한 것들이 많죠. 처참하게 실패한 게임도 있고, 세이클럽 홈피도 싸이월드보다 늦어서 결국 경쟁에서 졌어요. 세이클럽 내에서 시도한 유료화 모델 가운데 돈을 내면 좀 더 빠르게 로그인을 할 수 있는 서비스도 있어요. 당시에는 인터넷 속도가 느릴 때라 사용자가 몰리면 엄청 느려졌거든요. 이 유료 서비스는 욕을 심하게 먹고 중단했죠(웃음). 어떻게 보면 네오위즈는 그런 시도가 정말 자유로웠고, 그런 시도 자체를 잘 허용하는 문화가 있었어요.
2005년 장병규 대표는 큰 결심을 한다. 네오위즈를 그만두고 구글처럼 오직 검색 서비스에만 집중한 새로운 검색 전문 사이트 ‘첫눈’을 설립하기로 한 것이다. 이 서비스는 설립 1년 만에 NHN(네이버)에 350억에 매각되는 성공을 거두었다. 이후 2007년 장병규 대표는 새로운 게임회사 블루홀 스튜디오를 설립하여 게임 TERA를 개발하고, 2010년에는 초기 벤처들에게 필요한 자금을 제공하는 벤처투자회사 ‘본엔젤스’를 설립하여 후배 창업자들을 돕고 있다.
이후 대표님께서는 네오위즈에서 나와 첫눈을 설립하셨고 첫눈은 1년 후 네이버에 매각되었는데요, 이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주실 수 있나요?
함께 일하던 사람들이 각각 회사에 대한 생각이 달랐어요. 회사의 미래 방향에 대한 생각도 달랐죠. 저는 검색 분야에 열심히 투자해야 한다는 의견이었는데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죠. 당시에는 게임이 잘 되고 있었기 때문에 게임에 좀 더 집중해야 하는 거 아니냐는 사람도 있었어요. 회사가 커지니까 미래 전략에 대한 생각 차이, 경영에 대한 철학 차이가 생기더라고요. 그러다가 “제가 나가서 검색사업을 이끌겠다”고 이야기가 된 거죠. ‘첫눈’이 하루아침에 나온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1년 만에 네이버에 팔렸으니까요. 그렇지만 실제로는 네오위즈에 있을 때부터 고민하고 준비한 게 3년 이상이었어요. 사실 저는 새로운 시도가 네오위즈의 원동력이었다고 생각하는데, 회사가 커지면서 고려해야 할 것들이 많아져서 아쉬운 것도 있어요.
한 인터뷰를 보니 그 시기가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라고 말씀하셨는데요. 어떤 점들 때문에 그렇게 힘드셨던 건가요?
제일 힘들었던 건 네오위즈를 나오는 결정이었어요. 그전까지 제가 왜 벤처를 해야 하고 창업을 해야 하는지, 또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이 없었어요. 우연한 기회에 누가 도와달라고 해서 창업을 시작하게 됐고, 하다 보니 잘 돼서 열심히 살아왔죠. 경영에 대한 고민은 있었지만 삶에 대한 고민이 없었던 거죠.
네오위즈를 나오고 ‘첫눈’을 시작한 건 제 삶에 대한 고민이 동반되었던 거죠. 내가 왜 네오위즈에서 나왔으며, 내가 지켜야 하는 것은 무엇이며, 그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같은 것들요. 스스로에 대한 고민이 컸던 거죠. 이건 남이 답을 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에요. 인생을 돌이켜봤을 때, 과학고등학교에 갔던 게 제 의지와는 상관없는 우연한 결정이었고 그게 네오위즈까지 이어졌다고 보시면 될 것 같아요. 그런데 네오위즈를 나오고 난 다음부터는 스스로 고민하고 선택을 해야 하는 과정이었으니까 힘들었죠. 정신적으로 많이 방황한 것 같기도 하고요.
대표님께서 처음 창업하시고 15년이 흘렀는데요. 되돌아봤을 때 후회되는 결정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반대로 자랑스러운 결정이 있다면 무엇인지요?
개인적으로 제가 어떤 결정을 많이 한 건 아니기 때문에(웃음). 제 삶에 대한 결정은 네오위즈를 나올 때 딱 한 번 했죠. 어떻게 보면 그 과정은 그냥 열심히 살아온 결과이기 때문에 특별한 후회도 없고, 특별히 자랑스러워하는 것도 없어요. 모든 결정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고 돌아가더라도 그렇게 했을 가능성이 높거든요. 결과에 대해서 후회하거나 괴로웠던 적은 없는 것 같아요. 그러나 그 과정 자체는 늘 힘들죠. 특히 사람들과 함께 일을 한다는 건 힘들어요. 몇 년을 다르게 살았는데 함께 팀으로 일하고 의견을 조율하는 건 당연히 힘들잖아요. 가끔은 ‘내가 왜 이걸 저 사람에게 설명하고 있어야 하나’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죠. 그런데 그런 과정도 다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해요. 의미 있는 가치니까 실현하기 위해 노력했던 거고, 그렇게 하다보면 조금씩 잘하게 되는 것 같아요.
1. 네오위즈를 나오고 ‘첫눈’을 시작한 건 제 삶에 대한 고민이 동반되었던 거죠. 내가 왜 네오위즈에서 나왔으며, 내가 지켜야 하는 것은 무엇이며, 그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같은 것들요. 스스로에 대한 고민이 컸던 거죠. 이건 남이 답을 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에요.
2. 결과에 대해서 후회하거나 괴로웠던 적은 없는 것 같아요. 그러나 그 과정 자체는 늘 힘들죠. 특히 사람들과 함께 일을 한다는 건 힘들어요. 몇 년을 다르게 살았는데 함께 팀으로 일하고 의견을 조율하는 건 당연히 힘들잖아요. 가끔은 ‘내가 왜 이걸 저 사람에게 설명하고 있어야 하나’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죠. 그런데 그런 과정도 다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해요. 의미 있는 가치니까 실현하기 위해 노력했던 거고, 그렇게 하다보면 조금씩 잘하게 되는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