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로와 꿈

[27] ‘한기범 희망나눔’ 대표 한기범

/이진혁

사진 /씨네21 백종헌

나누는 삶에서 희망을 보다

‘한기범 희망나눔’ 대표 한기범 (전 농구 국가대표)

 

시험기간이면 유난히 딴짓이 하고 싶은 사람 손! 갑자기 안 하던 청소가 하고 싶고, 뉴스가 궁금하고, 매주 보는 웹툰을 새벽 두 시까지 정주행하기도 하고… 그러다 보면 책은 두 페이지 읽었는데 새벽 세시의 피곤함이 몰려오지. 그런다고 자책하지는 말길. 사람은 누구나 그러니까. 나도 6월호를 만들면서 유난히 딴짓으로 지새운 밤이 많았던 것 같아. 기사 쓰기 싫어서 오래된 농구 만화를 읽었어. 시합 중 부상을 당한 주인공이 “내 전성기는 바로 지금입니다”라고 말하는 장면을 보는데 떠오르는 이 사람! MODU가 만난 6월의 롤모델은 왕년의 농구스타 한기범 선수야. 농구를 통해 ‘나눔’을 실천하고, 나눔 속에서 ‘희망’을 보는 한기범 선수의 전성기는 바로 ‘지금’. 그의 이야기를 이제부터 들려줄게.

 

 

와, 정말 키가 크시네요… (한기범 선수의 키는 2미터 7센티미터) 큰 키 때문에라도 어렸을 적부터 농구선수의 꿈을 가졌을 것 같아요

키가 큰 건 집안 내력이에요. 키가 커서 농구선수를 선택했냐면 사실 그게 맞아요. 어릴 때 학교에서 무조건 하나씩 동아리에 가입하게 했는데 저는 큰 키 때문에 고를 것도 없이 농구부가 됐으니까요. 그렇지만 농구선수가 어릴 적부터 꿈이었냐면 그건 아니에요. 저는 전투기 조종사를 꿈꿨어요. 군인이 되고 싶었죠. 오산 공군 비행장 근처에 살았는데, 전투기가 날아가는 게 참 멋있어 보였거든요. 그런데 공군에서 조종사가 되기 위해서는 신체조건이 맞아야 해요. 제 큰 키는 농구를 하기엔 적합했지만 파일럿이 되기엔 무리였어요. 결국 전투기조종사의 꿈은 포기하고 농구에 집중했죠.

 

전성기 한기범 선수는 정말 대단했다고 들었어요. 오랫동안 국가대표도 하셨고요. 그렇게 되기 위해서 엄청난 노력을 하셨겠죠?

그거야 당연하죠. 아시아 청소년대회, 아시아 선수권대회, 86년 아시안게임, 88년 서울 올림픽, 세계 유니버시아드…. 안 나가 본 국제 대회가 없어요. 오랜 기간 국가대표로 활동했어요. 연습을 많이 했으니까 가능했죠. 그런데 또 연습만 하는 학생은 아니었어요. 젊을 때잖아요. 놀고 싶기도 하고, 여자친구도 만나고 싶고 그랬죠. 그래도 단 하루도 연습에 빠진 적은 없어요. 쉴 땐 쉬고, 할 땐 하자는 주의에요. 그렇게 해야 더 열심히 잘할 수 있더라고요.

 

그렇다면 농구를 하며 가장 좋았던 때는 언제인가요? 소녀팬들의 인기를 한몸에 받을 때?

하하. 저 때부터 농구 선수들에게 소녀팬이 생기긴 했죠. 저를 보세요, 소녀팬들이 많았을 것 같나요?(웃음) 제 후배인 허재 선수 같은 경우가 소녀팬이 많았고 저는 1년에 팬레터를 10통 받을까 말까였어요. 소녀팬 때문에 농구가 좋았던 적은 거의 없죠. 농구를 하며 제일 기뻤던 때는 대학시절 처음 우승을 했던 때에요. 제가 중앙대 출신이잖아요. 그런데 저 전까지는 고려대, 연세대가 번갈아 가면서 우승했어요. 농구가 시작된 이래로 70년 동안 두 팀만 우승을 한 거죠. 우리가 처음으로 그 아성을 깨고 우승을 했어요. 연고대를 물리치고 중앙대 시대를 열었던 그 순간이 제일 기억에 남죠. 그게 1984년이에요.

 

 

항상 4강권에 머물렀던 중앙대를 우승시키는데 기여한 한기범 선수! 그 이후 10년은 중앙대의 시대였어. 지금 프로농구 전주 KCC 감독인 허재 선수나, 김유택 선수 같이 뛰어난 선수들이 들어왔기 때문이지. 너희에겐 생소한 이름이지? 그렇지만 지금 야구나 축구보다 농구가 더 인기 있던 시기가 있었다는 사실, 놀랍지 않아? 믿기지 않는다면… <응답하라 1994>를 보세요.

 

 

그렇다면 농구를 하며 가장 힘들었던 때는 언제인가요?

부상당했을 때가 제일 힘들었죠. 1989년에도 저희팀이 우승을 했는데, 제가 MVP였어요. 사실 그때부터 몸이 안 좋았어요. 우승을 하자마자 바로 무릎과 발목을 수술했을 정도니까요. 1년 동안 힘들게 재활훈련도 했어요. 그런데 수술하고 복귀하니까 실력이 절반도 안 되는 거예요. 마음 먹은 대로 몸도 안 움직이고 농구도 안 되니까 참 힘들더라고요. 그래도 1996년까지 선수생활을 한 게 대단한 것 같아요. 그 몸으로 농구를 하다가 1996년에 은퇴했으니까요.

 

오랜 기간 선수로 생활하다가 은퇴할 때 슬펐을 것 같아요.

하나도 슬프지 않더라고요. 아파서 뛸 수도 없는 상태였는데요 뭐. 슬프다는 생각도 못 할 정도였어요. 예전에 강력한 진통제가 있어서 그걸 한 번 맞으면 반년은 안 아프고 그랬어요. 시합에도 나갈 수 있었죠. 그걸 자꾸 맞으니 진통제 효과가 없더라고요. 그래서 은퇴를 결심한 거기도 하고요. 다행인지 불행인지, 슬프지는 않게 선수생활을 마무리한 거죠.

 

은퇴 이후에는 어떤 생활을 하셨나요?

바로 지도자 생활을 조금 했어요. 구로고등학교에서 시작했죠. 첫 대회에서 준우승을 시켰으니까 지도자로서도 나쁘진 않았던 거겠죠?(웃음) 그리고 중앙대학교 농구부 코치로 갔어요. 센터 김주성 선수가 있을 때였죠. 또 제가 센터다 보니까 후배 센터 선수들에게 많은 조언을 했어요. 득점력 높은 센터를 키워내는데 제가 한몫을 했다고 생각해요. 물론 당시 감독님이 가장 큰 역할을 하셨지만, 제가 가르친 소소한 것들도 도움이 됐을 거예요.

 

 

아파서 은퇴가 슬프지도 않았다는 한기범 선수의 이야기가 왠지 짠하게 들렸어. 평생 동안 좋아한 농구를 그만두면서도 아쉬운 마음이 들지 않았다니, 그 고통이 상상도 안 되더라고. 그런데 한기범 선수의 아픔은 그게 끝이 아니었어. 더 큰 병이 한기범 선수에게 찾아와.

 

이후에 마르판 증후군이라는 희귀병을 앓았다고 들었어요.

저는 심장 수술을 두 번 받았어요. 2000년에 한 번, 2008년에 한 번. 말씀하신 마르판 증후군이라는 병 때문이죠. 인터넷에 마르판 증후군을 치면 제가 제일 먼저 나올 걸요?(웃음) 마르판 증후군이 걸리는 사람들은 신체적 특징이 뚜렷해요. 저처럼 키가 크고, 손발이 길고, 시력도 안 좋은 사람들이 주로 걸리죠. 희귀병이에요. 그리고 이 병이 50%의 확률로 유전이 돼요.

저희 아버지가 1980년대 초반에 심장 수술을 받고 딱 1년 만에 돌아가셨어요. 남동생도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죠. 그래서 혹시 이게 유전인가 싶어서 검사를 받았더니 마르판 증후군이라고 하더라고요.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충격이 엄청 컸을 것 같아요.

2000년에 이 사실을 알게 됐는데 당시 중앙대학교 코치 시절이었어요. 남들 보는 데서는 드러낼 수 없으니까 화장실에서 엉엉 울었어요. 아버지도 심장 수술을 받았는데도 돌아가셨잖아요. 나도 이제 죽는구나 싶었죠. 그때는 마르판 증후군이 치료가 가능한 병인지도 몰랐으니까요. 그렇다고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어요. 의사가 “언제 심장이 멈출지 알 수 없다”고 할 정도로 급박한 상태였으니까요. 바로 13시간이 넘는 수술을 받았어요. 어떻게 보면 기적적으로 살아난 거죠.

 

지금은 생활하는데 불편함이 없으신가요?

세 개의 대동맥 중에 두 군데를 수술했어요. 걱정이 아주 없다면 거짓말이지만 그래도 많이 편하게 살고 있죠. 심장 수술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인공판막을 이식하는 수술이고, 다른 하나는 판막을 성형하는 수술이에요. 인공판막 수술은 부작용이 심하죠. 평생 약을 먹어야 하고, 지혈이 안 돼서 피가 조금이라도 나면 병원에 가야 하고요. 저는 판막성형 수술을 받았어요. 이 수술은 부작용과 후유증이 훨씬 덜 하죠. 저는 약도 안 먹어도 되고, 등산도 하고, 농구도 할 수 있어요. 생활하는 데는 거의 불편함이 없어요.

 

지금 다양한 자선활동을 하고 계시는데, 이 병을 이겨낸 경험과 관련이 있나요?

아주 큰 관련이 있죠. 제가 두 번째 수술을 받을 때가 2008년이에요. 그때는 정말 최악의 상황이었어요. 사업에 실패해서 집도 없을 때고 가진 돈도 없었죠. 제 돈으로는 심장 수술을 받을 수가 없어서 심장재단의 도움을 받았어요. 그래서 전 항상 빚을 지고 사는 기분이에요. 이걸 평생 동안 갚아야겠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시작한 게 희망농구 자선경기예요. 사실 이런 행사를 제가 제일 처음 시작한 건 아니에요. 지금 축구 국가대표 홍명보 감독이 비슷한 활동을 하고 있었죠. 홍명보 자선축구대회는 유명하잖아요. ‘농구에서도 이런 걸 해보자’는 제안이 들어와서 시작하게 됐어요. 생각해 보세요, 축구는 경기장을 채우려면 수만 명의 관객이 필요하지만 농구는 체육관 하나만 채우면 되잖아요. 훨씬 더 수월하게 진행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할 줄 아는 게 농구밖에 없잖아요. 이 재능으로 여러 활동을 하자고 생각한 거죠.

 

 

죽음의 공포를 이겨내고 나눔을 실천하는 한기범 선수가 대단해 보였어. 살아 있음에 감사하기 때문에 나눔을 실천한다는 생각, 아무나 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 한기범 선수에게 나눔의 의미에 대해서 조금 더 질문을 해봤어.

 

 

지금 자선농구대회 말고도 많은 활동을 하는 걸로 알고 있어요.

어린이 심장병, 다문화 가정, 농구 꿈나무 후원을 하고 있어요. 아까도 말했지만 제가 워낙에 힘들어 봤잖아요. 힘든 어린이들을 돕기 위해 이런 후원 활동을 많이 하고 있죠. 또 요즘 다문화 가정이 많으니까 이들을 모아서 캠프를 열기도 하고요. 농구도 가르치는데, 가르치다가 발전 가능성이 있는 친구들을 선수로 만들기 위한 노력도 하고 있어요.

 

아이들에 대한 관심이 특히 많으신 것 같아요. 한기범 선수는 지금 두 아이의 아버지이기도 하잖아요? 자녀를 키우는 특별한 철학 같은 건 있으신가요?

저는 무조건 방목해요. 풀어놓고 하고 싶은 걸 하라고 하죠. 그랬더니 큰 아이는 판타지 소설가가 되겠다고 해서 글을 쓰고 있고, 작은 아이는 아이돌이 되겠다며 준비하고 있어요. 큰 아이는 어릴 때부터 뭘 쓰는 걸 좋아했어요. 제가 컴퓨터를 일찍 가르쳐줬는데 혼자 블로그에 글도 올리고 그랬더라고요. 고등학교 졸업하고도 그쪽으로 가고 싶다고 하기에 그러라고 했죠. 작은 아이는 지금 드럼을 배우고 있어요. 아이돌이 되려면 악기 하나쯤은 할 수 있어야 한다나요.(웃음) 아이들이 공부의 중요성은 사실 별로 생각을 안 하고 있죠.

저도 10시, 11시까지 학원에 붙잡아 놓는 성격이 아니에요. 사실 공부를 잘해서 대학에 가도 계속 경쟁의 세계잖아요. 저는 개인적으로 공부보다 다른 길이 경쟁력도 훨씬 높다고 생각해요. 가능성이 많다는 거죠. 다들 공부를 하니까 공부 잘하는 친구는 많지만, 다른 건 그렇지 않잖아요. 제가 농구를 해서 그런 생각을 하는 건지도 모르겠네요. 아무튼, 확률이 높다는 건 확실해요. 그래서 공부 공부하며 스트레스를 주기보다는 좋아하는 걸 시키자는 주의에요. 그렇지만 대화는 자주 해요. 뭘 좋아하는지 물어보기도 하고요. 아이들과는 친구처럼 지내고 있죠.

 

방목이라니, 모든 청소년이 한 번쯤은 꿈꾸는 부모상이네요. ‘친구 같은 아빠’ 말이에요.

그렇죠. 사실 아이들이 친구가 별로 없어요. 어릴 때부터 놀이터에 누가 나와야 친구를 사귀죠. 우리 아이들도 학원에 다닌 적이 있는데, 공부를 하러 간 게 아니라 친구를 사귀러 간 거예요. 안타까운 일이죠. 저라도 아이들에게 좋은 친구가 되자고 생각하고 있어요.

 

한기범 선수에게 ‘나눔’은 어떤 의미인가요?

나눔은 한 마디로 희망이죠. 많은 사람들이 나눔을 실천하면 좋겠어요. 그럼 지금보다 훨씬 더 좋은 세상이 되겠죠. 저는 농구선수였지만, 운동 선수들이 아직은 기부에 대한 의식이 많이 부족하다고 생각해요. 인기도 얻고 돈도 많이 버는 선수들이 많은데 다시 사회에 갚을 줄도 알아야죠. 자기 혼자 잘 나서 좋은 선수가 된 건 아니잖아요. ‘나눔은 특권’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요. 처음에 무슨 말인가 했는데 생각해보니 특권이 맞는 것 같아요. 무언가를 나눠줄 수 있다는 건 무언가를 갖고 있다는 뜻이니까요. 대단하지 않은 거라도요. 여러분도 모두 할 수 있어요. 지금 특권을 한 번 행사해보는 건 어때요?

 

앞으로 이루고 싶은 목표는 무엇인가요?

일단 ‘한기범 희망나눔’이라는 단체가 더 커져서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으면 좋겠죠. 경제적으로 안정되면 더 좋겠고요. 그리고는 다른 나라에 도움이 필요한 어린이들을 돕는 일을 하고 싶어요.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선진국에서 우리를 많이 도와줬잖아요. 물론 지금 우리나라 안에도 혜택을 못 받고 힘든 사람들이 많은데 굳이 다른 나라를 도울 필요가 있느냐고 묻는 사람도 있어요. 저는 그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나눔에는 국경이 없으니까요. 저는 아프리카 오지에서 힘든 아이들을 보고 온 적이 있어요. 그런 곳에서 죽어가는 아이들을 위한 자선사업을 하고 싶어요. 농구도 가르칠 수 있다면 좋겠네요.

 

그 목표가 꼭 이뤄지길 바라겠습니다. 끝으로 MODU를 읽는 청소년들에게 한 마디 부탁해요.

제가 늘 얘기하는 게 있어요. 좋아하는 것을 하라는 거예요. 정말 하고 싶은 것을 찾아서 끝까지 노력하세요. 포기하지 말고요. 늘 듣던 말이라 식상할 수도 있겠네요. 그렇지만 좋아하는 걸 할 때 행복할 수 있어요. 더 열심히 할 수도 있고요. 그렇다고 하나만 열심히 하고 다른 건 하지 말라는 건 아니에요. 저도 놀기도 놀면서 농구했는데요 뭐. 놀 땐 놀더라도, 진짜 자기가 하고 있는 건 잊지 말고 꾸준히 노력하면 좋겠어요. 그리고 나중에 훌륭한 사람이 돼서 꼭 나눔을 실천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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