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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호] 친구의 친구를 싫어했네-네 남자 넉 달 반의 차량 여행 이야기 vol.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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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윤민재,박윤성

친구의 친구를 싫어했네

아프리카15,000Km, 네 남자 넉 달 반의 차량 여행 이야기-4

 

스캇이 온다_민재

스캇에게서 메일이 왔다. 오토바이를 팔아 케이프타운으로 오는 비행기 표를 샀다고 했다. 드디어 오는구나 싶어 안심이 되면서도 행여 스캇과 윤성이 잘 어울리지 못할까봐 걱정이 되었다. 친한 친구들끼리 해도 싸우기 쉬운 것이 여행이라는데 생판 모르는 사람 둘을 그것도 아프리카에서 붙여놓는 것이 잘하는 짓인지.

케이프타운 공항으로 마중 가는 길, 내 걱정과는 달리 윤성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새로운 친구를 만나는 것에 대한 기대감일까? 운전대를 잡고 신나게 밟아대는 모습에 덩달아 내 기분도 즐거워졌다. 가는 길 내내 농담을 섞어가며 윤성에게 스캇에 대해 이야기했다.

 

 

외국인 친구_윤성

외국인 친구라니 생각만 해도 신이 났다. 민재 덕에 좋은 경험을 하게 될 것 같다. 스캇이란 친구, 사진으로 봤는데 헤어스타일이 예사롭지 않았다. 레게 스타일의 흑인 퍼머, 일명 드레드 락을 하고 있었다. 독특하고 재미있는 친구일 것 같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첫 인사를 하지? 머리가 멋지다고 할까? 오토바이를 팔고 오다니 성격이 화끈하구나! 하고 칭찬을 할까? 아니면 만나서 반가워 하고 담백하게 끝낼까? 민재는 조수석에서 뭐라 뭐라 끊임없이 떠들어 댔지만 귀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처음 만나는 외국 친구를 어떻게 맞이할까 하는 생각에 정신이 없었다.

 

 

스캇이 왔다_민재

공항을 한참 지나치는 바람에 도착 시각에 늦어버렸다. 서둘러 주차를 하고 뛰어들어갔는데 나의 긴 머리 친구는 보이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나 싶어 휴대전화와 게이트를 번갈아 보는데, 한 눈에도 여행자임을 알아볼 수 있는 일본인이 걸어 나왔다. 여행자끼리는 쉽게 알아보는 법. 간단하게 인사를 하고 혹시 저 안에서 긴 드레드 머리를 한 수염 많은 백인을 보지 못 했느냐고 물었다. 잠시 생각하던 그는 한 명을 본 것 같은데 무언가 문제가 있어 보였다고 답했다. 아 저기 있구나.

 

스캇이 나온다. 재회의 순간은 언제나 좋다. 이 친구가 정말로 와주었구나. 포옹을 하고 가방을 받아 드는 나를 박윤성이 캠코더로 찍고 있었다. 나는 웃으며 스캇에게 윤성을 소개했다. 싱글벙글 인사하는 이들을 보니 기분이 좋았다. 늦은 이유를 묻자 리턴 티켓이 없어 입국을 시켜주지 않길래 10,000 란드를 보증금으로 내고 나왔다고 했다. 남아공의 대사관 어디에서든지 찾을 수 있다고 했다. 이런 방법이 있었구나. 어쨌든 드디어 스캇이 왔다.

 

 

스껏_윤성

적당히 큰 키에 떡 벌어진 어깨, 그리고 튀는 헤어스타일까지. 한 번에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 그가 민재와 포옹을 하고 내 쪽으로 왔다. 대한민국은 동방예의지국이라 했다. 나는 미소를 잃지 않고 최대한 반가운 표정으로 그를 맞았다. 그가 내게 오른손을 내밀었다.

“스껏.”

“응? 나는 윤성이야.”

스캇은 이름을 말하고는 홱 돌아섰다. 나는 멍하니 자리에 서 있었다. 당황스러웠다. 나에 대해 얘기를 많이 들었다든가, 만나게 되어 반갑다든가, 하다못해 ‘굳투씨유’ 정도는 할 줄 알았다. ‘스껏!’ 이라고 힘주어 이름을 한번 말하는 것으로 모든 인사를 끝낼 줄은 몰랐다. 낯을 가리는 건지 나와 눈을 제대로 마주치지 않았다. 기분이 썩 유쾌하지 않았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으려고 했다. 처음이라 그런 거겠지, 앞으로 친해질 기회가 많을 테니 괜찮아, 하고 스스로 위안을 삼았다.

 

쇼핑게임_윤성

케이프타운 시내 한가운데 위치한 ‘GAME’ 쇼핑센터. 플레이스테이션이나 닌텐도 게임기를 파는 곳인가 싶었으나 홈플러스 같은 대형 할인마트였다. 그저 이름이 ‘GAME’일 뿐이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식품 매장을 거쳐 3층으로 올라가니 커다란 층 전체가 아웃도어 용품들로 가득했다.

나는 물건 고르는 재주가 있다. 취향이 괜찮고 눈썰미가 좋다. 거기에 가성비가 좋은 물건들을 잘 찾아낸다. 가족들과 함께 대형마트에 가도 주로 내가 물건을 고르는 편이다. 실력 발휘를 할 시간이 왔다. 슬슬 쇼핑 게임이나 즐겨 봐야지. 나는 성실하게 이동하며 품질, 디자인, 사이즈, 가격 등을 신중하게 체크했다. 석쇠며 야영 의자며 아이스박스며, 까다로운 비교분석과정을 통과한 캠핑용품을 한데 모았다. 뿌듯하다.

그런데 이건 뭐지? 까다로운 비교분석과정을 통과하지 않은 석쇠가 보인다. 내가 고른 4인용 구리도금 석쇠 옆에 손바닥만 한 석쇠가 놓여 있었다. 누가 가져다 놓은 거지 하고 있는데 스캇이 내 옆으로 왔다. 손에는 의자 뭉텅이가 들려있었다. 그리고는 내가 가져다 놓은 팔걸이 달린 2단 접이식 야영 의자 옆에 던져 놓았다. 어린이용 삼발이 의자였다.

‘저, 저 자식이?’

나의 안목에 대한 도전인가? 기선을 제압하려는 시도인가? 설마 여분 물품으로? 순간적으로 많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여분 물품은 아닌 것 같고 아무래도 나에게 도전하려는 것 같았다.

스캇은 도발을 멈추지 않았다. 석쇠, 의자에 이어 램프, 아이스박스 등 싸구려 물건들을 계속해서 집어 왔다. 불편한 쇼핑이 계속되던 중, 결국 나의 신경을 건드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내가 고심 끝에 가져다 놓은 무쇠 냄비 옆에 스캇이 싸구려 양은 냄비를 가져다 놓은 것이다.

‘저, 저놈이!’

냄비는 안 된다. 의자도 석쇠도 버너도 참을 수 있다. 하지만 냄비만은 무쇠여야 한다. 캠핑의 로망은 뭐니뭐니해도 시커멓고 묵직한 무쇠 냄비 아닌가? 모닥불 위에 무쇠 냄비를 걸쳐놓고 통조림 레드빈과 갖은 야채를 보글보글 끓여 먹는 낭만을 이 녀석은 왜 모른단 말인가! 내가 고른 것이 냄비라면 스캇이 고른 것은 은박지다. 이 훌륭한 쇼핑센터에서 저딴 물건은 어디서 주워온 거지? 나는 무쇠 냄비와 은박지 냄비를 들고 스캇에게 갔다. 심호흡을 하고 최대한 정중하게 말을 꺼냈다.

“저기 스캇. 이렇게 얇은 냄비 말고 좀 이렇게 튼튼한 냄비로 하면 어떨까?”

“왜? 백만 년 동안 쓰려고?”

백만 년? 백만 년? 그걸 농담이라고 하는 거야? 저놈이 지금 나 공격하는 거지? 각자 골라온 냄비 들고 한판 붙을까? 얼굴이 화끈거리고 분통이 터졌다. 백만 년이라는 말이 귀에서 맴돌며 내 자존심을 후벼 팠다. 다시 인도로 가버려, 비행기 표 줄 테니까 가버리라고! 앞으로 함께 여행을 할 생각을 하니 눈앞이 캄캄했다. 저놈이랑 같이 차를 산 것이 후회스러웠다. 아, 전부 관두고 트럭투어라도 알아볼까?

 

첫 캠핑_민재

해 질 녘이 되어 캠프 사이트에 도착했다. 우리의 첫 캠핑이다. 적당한 곳에 차를 세우고 자리를 골랐다. 스캇은 평평한 땅을 고르고 돌을 치우며, 나와 윤성에게 잠자리의 좋은 조건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다지 특별할 것이 없는 이야기에 살짝 웃음이 나왔지만 그래도 호의적인 스캇의 태도가 고마워 귀담아들었다. 윤성은 스캇이 시키는 대로는 하였지만 눈을 잘 마주치지 않았다. 아마도 가르치는 듯한 스캇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 같다. 또 살짝 웃음이 나왔다. 도대체 이 녀석들은 언제쯤 쓸데없는 자존심을 부리지 않게 될까?

여러 사람이 함께 지내는 것은 어렵다. 집이건 회사건 여행이건 간에 그러하다. 수컷들만 모여있으면 더욱 그렇다. 이런 것을 쉽게 해결하는 방법은 위계질서이고 어렵게 해결하는 방법은 친구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저마다 다른 삶의 궤적을 그리며 살아간다. 그 궤적은 각자의 몫이어서 동일한 시간과 공간에 함께 있던 사람들이라도 같을 수는 없다. 따라서 상대방의 경험과 생각을 완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게다가 감정은 하루에도 열두 번씩 바뀌는데 어떻게 상대방이 곱게만 보이겠는가? 그 와중에 마음에 들지 않는 상대방의 행동과 말에 집중하게 되면 그야말로 문제다. 서로에게 생긴 크고 작은 불만이 뭉쳐서 부적인 이미지를 만들고 거기에 제멋대로 이유를 붙여 내 마음속의 상대방을 규정해버리기 쉽다. ‘이러이러한 행동을 보니 쟤는 원래부터 고집불통인 것 같아. 아니면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아 저렇게 행동하는 거겠지. 아 정말 나와 맞지 않아!’ 라고 말이다.

나의 경우에는 상대방을 하나의 개체로 보면 도움이 될 때가 많았다. 상대방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로 만들어진 이미지들을 마구 뭉쳐서 머리 뒤편으로 던져버리고 그를 지금 이 시간, 공간을 함께하는 사람 한 명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심술 났던 것이 누그러지고 마음이 편해진다. 그리고 상대방에게 한번 더 다가갈 힘이 생긴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다 보면 차츰 친구가 된다. 내 나름의 처세술이다.

상황을 봐서 윤성이와 스캇의 묘한 갈등을 해소해볼까 생각했다. 하지만 캠프장의 아름다운 석양에 그런 시도는 집어치우기로 했다. 이곳은 정말이지 아름다운 아프리카고 윤성이와 스캇은 모두 좋은 사람들이다. 나는 나의 역할에 충실하면 된다. 결국은 모든 것이 잘될 것이라 생각했다.

 

스테이크_윤성

“고기가 좀 아쉬운데? 많이 퍽퍽하겠어.”

얇게 낀 비계와 쫄깃한 살코기, 가운데로 살짝 드리운 힘줄이 고기의 첫인상이었다. 남아공 첫 캠핑을 자축하기 위한 바베큐 파티에 고기 상태가 약간 아쉬웠다. 그래도 숯불에 구우면 먹을만하겠지 하는 생각으로 고기를 구웠다. 치익 하는 소리와 함께 그윽하게 번져오는 훈연의 향이 코를 자극했다. 딱 한 번 고기를 뒤집었다. 알맞게 익은 고기를 각자의 접시에 한 덩어리씩 올렸다.

“맛있게 먹어.”

“야, 냄새 죽이는데?”

한입에 먹기 적당한 크기로 썰어 입으로 가져갔다. 미세한 감탄사가 입술 사이로 새어나왔다.

“어?”

동네 가게에서 아무거나 집어온 그냥 소고기였다. 근본도 없는 동네 소고기 말이다. 강원도 횡성 투쁠(A++) 한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꽃송이 마블링 같은 것은 없었다. 투박한 살코기와 얇은 비계층, 가는 힘줄이 전부였다. 당연히 질기고 퍽퍽할 줄 알았다. 그것은 오해였다. 남아공의 근본도 없는 동네 소고기는 정말 고소했다.

“야! 소금, 소금 어딨어? 후추도!”

“고기 대박인데? 왜 이렇게 맛있어?”

“빨리빨리!”

그라인더가 달린 천일염과 통후추를 고기 위에 흩뿌렸다. 잔잔하게 스며드는 짠맛과 후추의 톡 쏘는 매콤함이 고기의 맛을 건드리지 않으면서도 고소한 향내를 더욱 증폭시켰다. 그 순간 침샘이 터졌다. 왼쪽 귀밑에 달린 스프링클러가 격렬한 속도로 타액을 분출했다. 마치 레몬을 먹은 것처럼 왼쪽 눈이 찡그려졌다.

“아!”

입에서 격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이것이 진정한 소고기의 맛인가? 여태껏 먹어온 것은 전부 소의 탈을 쓴 염소였나? 무조건 한우가 최고인 줄 알았는데 속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도 안 돼!”

“아름다워! 최고야!”

“미쳤다. 미쳤어. 야, 와인 빨리 따봐!”

2만 원짜리 이름 모를 남아공 와인이 곁들여지자 미슐랭 3스타 저리 가라였다. 민재도 스캇도 감격에 겨운 얼굴로 인생 최고의 소고기라고 말했다. 우리는 연신 소리를 질러대며 고기와 와인을 먹어댔다. 이보다 더 완벽한 순간이 있을 수 있을까. 아프리카의 밤하늘 아래에서 조용한 음악을 깔아 놓고 좋은 사람들과 생애 최고의 스테이크를 맛보는 것. 민재는 지금 정말 행복하다고 했고 무뚝뚝한 스캇 녀석도 입이 귀에 걸려 있었다.

 

서구화_윤성

스캇은 소고기 덕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설거지를 자청했다. 그런데 설거지를 하러 가는 스캇의 준비물이 의심스러웠다. 그의 손에 파란색 빨랫비누가 들려 있었다. 설거지랑 빨래를 같이 하려는 것인가 싶었다.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들어 랜턴으로 빛을 비춰주는 척하며 따라가 봤다. 그런데 맙소사, 스캇 놈이 빨랫비누로 설거지를 시작했다. 빨랫비누, 그것은 비누 중에서도 가장 하급에 해당한다. ‘퐁퐁’을 미리 사왔어야 하는데 깜빡했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라도 해결하려는 것은 알겠지만 손비누도 있고 샴푸도 있는 상황에서 빨랫비누가 웬 말인가. 그나저나 저 빨랫비누는 도대체 어디서 사온 거지? 혹시 게임쇼핑에서 사왔나? 게임쇼핑센터에서의 악몽이 되살아나려고 했다. 당장에라도 저 빨랫비누를 발로 차버리고 싶었으나 힘들게 좋아진 분위기를 다시 망쳐버리고 싶지는 않다. 나는 심호흡을 크게 내쉬고 꾹 참았다.

스캇 놈의 설거지 방법은 더 가관이었다. 하나, 빨랫비누를 푼 물에 그릴과 접시와 포크 나이프를 담근다. 둘, 젖은 행주로 비빈다. 셋, 마른행주로 비눗물을 대충 닦아낸다. 끝이다. 그릴 사이에는 파란색 빨랫비누의 잔해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고 접시는 기름기가 흥건해서 반짝거렸다. 초고속으로 설거지를 끝냈다는 자신감인가? 스캇은 의기양양하게 식기를 플라스틱 통에 담았다. 내가 차분한 말투로 스캇에게 물었다.

“근데 이거 한 번 더 헹궈내야 되지 않아?”

“왜?”

“비눗기가 좀 남아있는 것 같아서.”

“하하, 뭐라고? 네가 나보다 더 서구화됐구나!”

‘서구화? 저놈이 지금 나에게 서구화라고 했어? 설거지도 똑바로 못하는 주제에 동양인이 깔끔 떤다고 무시하는 거야? 위생 관념도 없는 더러운 놈이? 깔끔한 것이 서구적이라면 더러운 것이 동양적인 것이란 말이야? 뭐 이런 불순한 사상 덩어리가 다 있지?’

화를 내도 되는 상황 같았다. 아니, 화를 내야만 하는 상황이다. 그러나 타이밍을 놓쳤다. 스캇 놈은 설거지를 마치고 유유히 사라져 버렸고 나는 캄캄한 수돗가에서 랜턴을 들고 덩그러니 서 있었다.

‘아, 또 당했구나!’

게임쇼핑, 퍼스트드라이버에 이어 서구화, 이번이 3연패다. 화를 내기 애매하게 조금씩 꼬아서 들어오는 스캇 놈의 공격에 나는 이번에도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저놈을 데려온 민재 놈은 또 어디 간 거야! 스캇이 없는 사이 비눗기 가득한 식기를 수돗가로 다시 가져가서 흐르는 물에 벅벅 닦았다. 미끌거리는 식기를 부여잡고 절대로 저놈에게 설거지를 맡기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희망봉_민재

꼭 희망봉에서 시작하고 싶었다. 북상은 최남단에서 시작하는 것이 멋있다는 나의 주장에 윤성과 스캇이 흔쾌히 동의해주었다. 우리는 아프리카 최남단으로 향했다.

어렸을 적, 사회과부도 보는 것을 좋아했다. 손으로 해안선을 따라가면서 커다란 배를 타는 상상을 했다. 방구석에 틀어박혀 눈을 감은 채, 머릿속 무역선을 타보고 해적선의 선원이 되어보면 왠지 모르게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지고 참 좋았다. 그곳엔 고래와 별이 있고 바다 노을이 있었다. 그런 나에게 아프리카 끝자락에 있다는 희망봉은 그 이름 그대로 공상 속에 들어와, 정말이지 낭만적인 장소가 되었었다. (당시에는 희망봉이 바다에 솟아있는 굉장히 높은 봉우리인 줄 알았었다.)

새파란 하늘과 스캇의 경쾌한 운전, 차창으로 지나가는 풍경 속에서 ‘Cape Good Hope’라고 쓰여 있는 안내문을 발견했을 때 가슴이 벅차오르던 것이 기억난다.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스캇도 기분이 좋았는지 활짝 웃으며 차를 더 빠르게 달렸고 윤성은 소리를 지르며 사진을 찍었다. 나는 그 순간 우리가 이번 여정의 시작점에 있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가 그곳을 함께 통과하였다는 사실은 분명했다. 삐걱거리던 윤성과 스캇의 사이에도 순풍이 불어 줄 것 같았다.

희망봉-등대

 

Are you a guide? 또 다른 백인 친구가 필요하다._민재

“형제여, 준비되었는가? 하나 둘 셋 뛰어!”

“으악!”

높이는 216m, 낙하시간은 7초. 점프를 했다고 생각한 것도 잠시, 저 밑의 땅이 엄청난 속도로 다가온다. 피가 어찌나 몰리는지 눈알이 튀어나와서 얼굴에 주렁주렁 매달릴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한참을 떨어지다가 ‘뎅’하고 튀어 오른다. 그제야 비디오로 본 것이 생각나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서 하늘을 보았다가 땅을 보았다가 이리저리 나름대로 멋져 보이는 자세도 취해보았다. 그것도 잠시 결국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리게 되었고 이윽고 위에서 줄을 당기는 흑인 친구들의 박자에 맞추어 원래 자리로 끌어올려 지기 시작했다. 이건 정말이지 해볼 만한 야외 활동이다.

“스캇! 찍었어?”

“그럼! 확인해봐.”

“와, 잘 찍었네!”

스캇은 먼발치에서 우리의 번지점프를 찍어주기로 했는데 짧은 순간을 카메라에 그럴듯하게 담아내었다. 나와 윤성이의 번지점프 때문에 이곳 ‘치치카마’까지 하루를 달렸는데, 불평불만 없이 지내는 스캇이 새삼 고마웠다. 하지만 그 모습이 어딘가 쓸쓸해 보여서 걱정이 되었다. 사실 번지점프 전, 매표소에서 있었던 사소한 사건 때문에 괜히 마음이 쓰이는 것 같기도 했다.

“번지점프 성인 세 명인가요?”

“아뇨, 저는 안 하고 이 두 친구만 할 거예요.”

“그래요? 당신은 왜 뛰지 않아요?”

“음, 나는 별로 뛰고 싶은 생각이 없어요.”

“그렇군요. 혹시 당신은 가이드인가요?”

나는 화들짝 놀라 스캇의 어깨를 감싸며 대답했다.

“아뇨. 우린 친구예요!”

당시만 하더라도 내 영어 실력은 스캇과 심도 깊은 이야기를 편안하게 나누기에는 턱없이 부족했었다. 윤성이는 스캇의 뉴질랜드 억양에 적응이 채 되지 않아 계속해서 되묻기 일쑤였다. 나는 언어 차이 때문에 생겨나는 소통의 벽 때문에 스캇이 종종 약간의 좌절감과 외로움을 느낄 수 있다는 생각을 했었다. 셋이 있을 때에는 절대 한국어로 윤성에게 이야기하지 않는 등 나름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되지 않았다. 그러던 중에 스캇에게 가이드냐고 묻는 사람까지 나타나니 적잖이 신경이 쓰였다. 나미비아로 향하는 길 내내, 나는 스캇의 외로움을 달래줄 한 명의 영어권 친구를 더 끌어들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다.

민재점프

나미비아로_민재

남아공은 이민을 오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름다운 나라지만 체류비가 높은 까닭에 마음 놓고 여행하기가 어려웠다. 여행 준비에만 3주가량을 소모했는데, 특별한 구경을 하지 못하면서 하루에 3-40달러가 소모되는 것은 여행자로서 결코 반가운 일이 아니다. 나는 빠르게 다음 국가로 이동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고 스캇과 윤성 역시 같은 생각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우리는 아프리카의 두 번째 나라로 내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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