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로와 꿈 직업인 인터뷰

[25호] 기업가정신- 다음커뮤니케이션, 이택경

“자신을 믿어야 성공할 수 있다”

인터넷 시대의 시작: 다음커뮤니케이션, 이택경

한국의 인터넷 시대는 다음(DAUM)과 함께 시작했다. 한국 최초의 무료 웹메일 서비스 한메일은 많은 이들의 첫 이메일 계정이었다. 한메일은 포털 사이트 다음이 되어 IT혁명의 한가운데서 큰 성공을 거뒀다.

이택경 대표는 전산학(현 컴퓨터공학과)을 전공한 뒤 같은 과 선배 이재웅 대표와 함께 (주)다음커뮤니케이션을 공동 창업해 14년간 최고기술책임자를 역임했다. 2010년에는 벤처 인큐베이팅 전문 투자회사 ‘프라이머’를 설립해서 지금까지 활발히 활동 중이다. 인터넷 시대의 선두 주자로서 그 시대를 쟁취했던 이택경 대표를 만나보았다.

 

중학교 소년과 컴퓨터의 만남

Q: 대표님의 중고등학교 시절은 어땠나요?

초등학교 때부터 이과 체질이었던 것 같아요. 요즘은 어릴 때부터 다들 ‘사’자 붙는 직업이나 전문직을 꿈꾸지만, 저희 때는 꿈이 좀 다양했어요. 나는 과학자가 될 거야, 대통령이 될 거야, 사장님이 될 거야, 유명한 운동선수가 될 거야 처럼요. 저는 과학에 관심이 많아서 어릴 때부터 과학자가 꿈이었어요. 중학교 때부터 과학 잡지들도 많이 봤죠.

그러다 우연한 기회에 컴퓨터를 접하게 됐어요.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이 나는데 중학교 3학년 봄에 서점에서 우연히 <컴퓨터학습>이라는 잡지를 읽었어요. 그때까지는 컴퓨터가 보편화되지 않았는데 그 잡지에 당시 인기 있던 게임에 대한 내용이 실려 있었어요. 충동적으로 책을 사서 읽었죠. 그때부터 컴퓨터에 관심을 갖게 됐어요. 그리고 컴퓨터를 사달라고 졸라 중3 때 첫 컴퓨터를 갖게 되었어요.

한때는 컴퓨터를 압수당하기도 했었어요. 프로그래밍을 통해 뭔가를 창조하는 게 정말 재밌었지만, 너무 거기에만 빠져 있었거든요. 중독이 된 거죠. 프로그램 공모전에도 출품하려고 했는데, 압수를 당해서 못 냈던 적도 있어요. 고등학교 2학년 때는 스스로 컴퓨터를 안 만지기도 했어요. 그때 담임선생님께서 가정방문을 오셨는데 수험생이 컴퓨터나 만지고 있다고 뭐라 하셨거든요. 부모님께서 그 말씀을 들으시고 “대학교 가면 마음껏 만지게 해주겠다”고 하셔서 저도 컴퓨터를 안 하겠다고 약속한 거죠. 그런데 못 하면 더 하고 싶은 게 있잖아요. ‘그러면 대학교 전공도 아예 컴퓨터 쪽으로 하자. 내가 좋아하는 일이니까.’ 그렇게 컴퓨터 관련 학과로 진학했어요.

Q: 대표님 대학 시절 이야기도 듣고 싶어요.

전산학과 진학 후 컴퓨터는 전공이면서 취미였죠. 컴퓨터를 좋아하고 또 게임을 좋아하다 보니까 1~2학년 때는 게임을 개발했어요. 취미로 하던 프로그래밍과 전공으로 공부하는 건 또 다른 재미가 있더라고요. 전공을 좋아하다 보니 결국 대학원까지 가게 됐죠.

대학교 때 PC통신 동아리 ‘이글넷’이란 곳에서 활동했어요. 제가 2학년 때 모뎀과 전화선을 통한 PC통신이 도입됐어요. 정말 PC통신 초창기였죠. 이때 경험이 다음을 창업한 것과 제일 관련이 큰 것 같아요. 1989년 말에 천리안이 1,000명을 돌파했다는 공지를 본 것으로 기억해요. 그때는 대학생이 주로 이용한 게 아니라 연구기관에 있거나 통신회사에 있는 사람들이 주로 가입해서 이용했어요. 처음엔 주로 이런 사람들만 이용하다가 어느 땐가부터 갑자기 이용하는 사람들이 팍팍 늘기 시작했죠.

Q: PC통신 동아리와 컴퓨터에 대한 흥미가 창업으로 이어진 건가요

이재웅 대표가 곧 인터넷 시대가 올 것이라 말했어요. 컴퓨터가 단순히 계산을 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커뮤니케이션에 큰 힘이 될 것이라 생각했죠. 저도 그 비전에 공감했어요. PC통신 동아리를 하면서 인터넷 시대가 올 것이라고 저도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그때는 웹의 아주 초기 단계였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무엇이 어떻게 변해갈지 정확하게 예측할 수는 없었죠. 그렇지만 무언가 큰 변화가 있을 거라는 확신은 어느 정도 있었어요. 비유를 하자면, 그 당시 인터넷 공간은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이었어요. 저는 어떤 건물들이 어떤 디자인으로 개발될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떤 형태로든 이 장소가 개발될 것이라 생각했죠.

Q: 그럼 다음을 창업할 때 어떻게 돈을 벌 수 있으리라 생각했나요. 또 회사의 비전은 어떤 것이었나요?

인터넷이 아직은 광활한 황무지지만 곧 발전하여 도시가 될 거라는 생각이 있었어요. 그러니까 구체적인 비즈니스 모델은 미리 정하지 말고 상황을 보면서 정하기로 했죠. 일단 웹과 인터넷 분야에서 뭔가 시작을 하는 데 의미를 뒀어요. 그렇게 창업을 하게 된 거죠. 물론 지금은 예전 저처럼 추상적인 생각만으로 창업하면 안 돼요(웃음). 지금은 이미 인프라가 다 깔려 있고 관련 비즈니스 모델들도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나온 상태니까, 훨씬 더 구체적이어야 하죠. 처음에는 크게 인터넷 관련 ‘솔루션’과 ‘서비스’ 그 두 가지를 생각했죠. 선택과 집중을 하기보다는 둘 다 시장에서 테스트를 해봤어요.

매출은 주로 인터넷 관련 솔루션에서 나왔어요. 개발을 대신해주고 돈을 받는 거죠. 거기서 나온 돈으로 서비스 쪽에서 다양한 시도를 해볼 수 있었어요. ‘버추얼 갤러리’, ‘패션넷’, ‘싸이네마’, ‘투어월드’ 등 정말 다양한 시도를 했죠. 싸이네마와 투어월드는 시대를 너무 앞서 간 느낌이 있어요. 영화와 여행 관련 사이트가 지금은 많이 활성화됐지만, 그 당시에는 불모지였거든요. 그러한 서비스를 시도하다가 1997년 5월 한메일이 시작됐어요. 이후에는 다른 서비스는 포기하고 한메일에 선택과 집중을 했어요.

 

한메일의 도약과 10년간의 여정

Q: 찾아보니 한메일 가입자가 1998년 12월에 100만 명을 돌파했더라고요. 처음 시작할 때는 이렇게 빨리 성장하리라고 예상하지 못하셨지요?

그렇죠. 전혀 생각 못 했습니다. 다음에서 가장 높은 성장률을 보인 건 한메일이 아니라 ‘다음 카페’였어요. 그래서 항상 한메일과 카페에 서버를 투입하고 고치는 게 일이었어요. 대한민국 인구 중에 인터넷을 쓸 수 있는 인구는 한계가 있잖아요. 그래서 나중엔 어느 정도 천천히 증가했는데, 처음 1,000만 명까지는 정말 정신이 없었죠.

Q: 결과적으로는 한메일이 다음이 성공하는 데 큰 밑거름이 되었지만, 처음에는 어떻게 돈도 잘 벌리지 않는 이메일 서비스에 집중할 생각을 하셨는지요?

당시가 무료 인터넷 서비스를 제공하고 온라인 광고로 이익을 얻는 구조가 처음 시도되던 시기였어요. 저희도 그런 시대가 곧 올 거라 믿고 집중을 했죠. 물론 실제 온라인 광고로 수익을 낸 것은 예상보다 훨씬 늦어서 참 힘들었지만요. 무료 웹메일 서비스를 시작했던 이유 가운데 하나가, 인터넷이 되는 곳이기만 하면 어디서든 메일을 확인하고 보낼 수 있는 서비스를 제대로 만들어보자는 것이었어요. 이제는 너무 당연한 일이 됐지만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어요. 이메일 전용 프로그램이 따로 있어서 그런 걸 설치해야 이메일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었거든요.

또 저희는 광고를 주 수익 모델로 고려했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기 때문에 전략은 명확한 편이었습니다. 두 번째 수익 모델로는 서비스 부분 유료화(프리미엄 서비스)를 계획했는데 생각보다는 잘되지 않았어요. 지금도 다음이나 다른 포털 사이트들 수입의 대부분은 광고죠. 프리미엄 서비스는 아직도 마이너하고요.

 

Q: 그럼 수익 모델 외에 그 당시 어떤 고민을 하셨나요?

서비스 측면에서 한메일과 카페를 밀고 나갈 것이냐, 아니면 그 당시 야후와 같이 포털로 갈 것이냐를 고민하던 중 1999년 포털로 방향을 잡고 포털 서비스 체계로 개편했습니다. 거기에 맞춰 서비스 확장 작업을 했어요. 기존 주력 서비스인 한메일과 카페 외에 어떤 서비스가 향후 킬러 서비스가 될 것인지, 어떤 쪽에 더 중점을 두어야 할 것인지 고민을 많이 했죠.

당시 야후가 미국 주식시장에 상장하면서 자금이 많았어요. 공격적으로 사업을 확장할 수 있었죠. 국내에도 야후코리아가 진출했고요. 온라인 서비스의 경우 선점이 중요한데 다음이 한국을 대표해 야후코리아와 국내 넘버원 자리를 놓고 전면전을 벌여야 한다는 비장함이 있었죠. 그래서 더 빨리 포털 사이트로 전환했어요. 당시 다음은 검색 서비스가 상대적으로 약했기 때문에 메일과 카페를 주력으로 삼았죠.

Q: 초기에 다음은 야후코리아와 경쟁을 했고, 이후에는 네이버와 경쟁을 했습니다. 경쟁사들과의 경쟁에서 다음이 잘했던 것과 잘하지 못했던 것은 어떤 것들이었습니까?

제 생각에 먼저 야후코리아와 경쟁을 할 때 포털 체제로 변신한 것은 옳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카페가 저희의 큰 장점이었던 것 같아요. 말씀드렸듯이 카페는 한메일보다도 급성장했는데, 야후코리아는 커뮤니티 서비스가 상대적으로 약했죠. 또한 야후는 전 세계에 진출한 지역 서비스들을 직접 관리하다 보니 현지화와 발 빠른 대응에 취약했던 점도 있었던 것 같아요. 결국 야후코리아와의 경쟁에서는 저희가 이길 수 있었죠.

이후 네이버와의 경쟁은 뼈아프게 생각합니다. ‘넘버원’의 자리를 뺏기게 된 이유를 크게 두 가지로 생각해요. 첫 번째는 선택과 집중의 문제이고 두 번째는 인터넷 서비스의 중심이 검색으로 넘어갔기 때문이에요. 다음이 확장을 너무 많이 하면서 선택과 집중을 못 한 측면이 있어요. 포털 서비스를 위한 서비스 확장, 쇼핑과 금융 및 여행을 위한 확장, 또 해외 확장까지 시도했거든요. 이 세 마리 토끼를 한 번에 잡는 시도는 무리수였다고 생각해요. 이에 비해 네이버는 상대적으로 선택과 집중을 잘했죠. 패커드의 법칙이란 게 있어요. ‘기업은 적은 기회로 인한 굶주림보다는 많은 기회로 인한 소화불량 때문에 죽을 가능성이 높다’는 거예요. 다음이 여기에 해당하는 거죠.

인터넷 서비스의 중심이 검색으로 넘어간 데 따른 문제도 있었어요. 야후가 시작한 포털의 개념은 인터넷 이용자를 안내하는 관문 역할이었어요. 그 관문 역할의 중추가 검색 서비스죠. 서비스의 진화 과정을 보면 초창기 다음은 메일과 커뮤니티가 강한 포털이었고, 이에 비해 네이버는 검색 기능이 강한 포털이었죠. 네이버의 지식서비스가 대표적인 예에요. 이것이 네이버가 국내 최고가 된 이유인 것 같아요. 미국에서도 마찬가지죠. 구글이 야후를 앞서게 된 것은 검색 서비스가 앞섰기 때문이에요. 인터넷상에 정보들이 점차 방대해지면서 검색 기능이 주도권을 가지게 됐죠. 네이버는 검색 서비스를 잘 마련해놓고 그 이후에 카페를 만들고 블로그 서비스를 시작했어요. 그것이 다시 검색 서비스와 연계되면서 우위를 점하게 된 거죠.

 

다음 그 이후, 벤처 생태계를 위한 새로운 도전: 인큐베이팅 회사 프라이머

1995년 다음커뮤니케이션을 창립하여 2003년까지 근무한 이택경 대표는 2003년 12월 다음커뮤니케이션의 이사직에서 사임하고, 미국으로 2년간의 연수를 떠난다. 미국에서 돌아와 2008년 6월에는 다음에서 완전히 퇴사했다. 이후 2010년, 인큐베이팅 회사 프라이머를 설립한다. 프라이머는 유망한 창업팀에게 초기자금을 지원하고, 멘토링을 통해 성공을 돕는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벤처 꿈나무들을 지원하고 있다.

Q: 그때는 어떤 이유에서 새로운 창업을 결시하게 된 건가요?

다음을 창업할 때 처음 생각했던 것이, 여기에서 10년 동안 일한다는 것이었어요. 10년만 일하고 그만두겠다는 뜻이 아니라 일단 10년까지는 일을 하고 그때 가서 여기에서 계속 일을 할지, 아니면 다른 길을 갈 것인지를 결정한다는 것이었지요.

 

해외에 있으면서 다음을 좀 더 객관적으로 보게 되었어요. 다음이라는 조직이 정말 커졌는데, 그게 저한테는 부담스러운 면이 있었어요. ‘그런 조직에서 내가 더 잘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 결국 사임을 하게 됐죠.

 

Q: 돌이켜볼 때 창업 초기에 가장 힘든 점은 어떤 점이었는지요?

돈이 없는 것도 힘들지만 결국 제일 힘들었던 건 비전 문제였던 것 같아요. 인터넷 시장에서 빠르게 시작하면서 주력 아이템을 고민하고, 나름대로 개발 대행도 했지만 실패했어요. 온라인 서비스가 다른 비전이었는데 결과를 낼 수 없던 초창기에는 많이 초조했던 게 사실이에요. 그러다가 어느 정도 가능성을 본 것이 한메일의 급성장이었죠. 한메일이 잘되면서 수익 모델은 여전히 숙제로 남았지만 온라인 서비스 쪽에 비전이 있다고 확신했어요. 믿음이 중요한 것 같아요. 지금도 후배들에게 항상 말하거든요. 믿음이 필요하다고요.

Q: 현재 대표님께서는 프라이머에서 엔젤투자자로 활동하고 계십니다. 지금 시점에서 대표님의 꿈과 비전은 무엇인가요?

미국에서 돌아와 다음을 그만두기 전에 엔젤투자를 여덟 번 했어요. 초기기업에서 느낄 수 있는 순수함이나 열정을 간접적으로라도 다시 느끼고 싶었거든요. 이런 것들은 중독성이 있어요. 그러다가 프라이머에 대한 구상을 시작했어요. 다음에 있으면서는 개인적으로 엔젤투자를 하고, 틈틈이 가벼운 조언 정도만 하다 보니 참여하는 데 한계가 있었어요. 좀 더 체계적으로 멘토링을 하고 다른 파트너와 조직적으로 참여하고 싶기도 했어요. 그래서 프라이머를 공동 창업하게 됐어요. 지금은 단순한 투자자가 아니라, 한 번 창업해 본 선배로 후배들의 멘토 역할을 하고 있어요. 저는 많은 이들이 성공하는 것도 좋지만, 후배 창업자가 회복할 수 없는 실패로 재기 불능이 되는 것을 멘토링을 통해 막는 게 더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중간중간 자신들의 가설이 맞는지 단계별로 검증하면서 사업을 진행해도 되는데 그러지 않는 경우가 많아요. 예를 들어 어떤 창업팀은 사전조사를 제대로 하지도 않고, 사업 가능성이 있는지 검증조차 해보지 않고 사업을 시작했어요. 그런 걸 보면 안타깝죠. 결국 그 팀은 재기가 힘들 정도로 큰 실패를 했는데, 그런 경우를 막을 수 있도록 도와주자 싶었어요.

개인적으로는 이런 식으로 엔젤투자와 멘토링을 통해 국내 창업 생태계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이에요. 이렇게 이야기하면 좀 거창하게 들릴 수도 있겠네요. 소박하게 이야기하자면 ‘조금 더 경험해본 선배로서 후배 창업자가 크게 실패하는 것을 조금이나마 막아보자’라는 뜻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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