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호] 평정심을 유지하며 하던 일 계속하기
평정심을 유지하며 하던 일 계속하기
Keep Calm and Carry on
글 손보미
빙그르르… 콧노래를 부르며 나도 모르게 춤을 추고 싶은 화창한 날이었다. 오랜만에 영양가 있는 치즈가 가득한 뉴욕의 명물인 베이글을 먹어서일까? 서울에서처럼 주변 사람들 의식하지 않고 맨 얼굴에 아주 낮은 플랫을 신고 자유로운 복장이어서 그럴까? 구름 한 점 없는 파랗고 청명한 하늘 아래 조깅하는 사람들을 따라 작은 보트를 타는 사람들을 따라 센트럴 파크를 걸어서일까? 자유로움이라는 단어가 음악처럼 내 몸을 흔들어놨다.
저기 먼 곳에 우아한 것은 백조인가? 나의 몸짓이 부끄러울 정도로 아름답게 몸을 움직이는 새하얀 오브제. 녹음이 짙은 푸르름 속 하얀 백조 같은 한 여인이 발레 마임을 선보이고 있었다. 주변에 사람들이 점점 모여 그녀의 몸짓 하나하나에 반응하더니 어느덧 그녀를 둘러싸고 있었다. 여기는 센트럴 파크 동쪽 72번가 5th Avenue.
영국에서 Therisa Barber Shaw는 8년째 센트럴파크에서 공연을 한다고 했다. 막 짐을 정리하던 그녀는 구부렸던 허리를 피며 잠깐 먼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빛을 냈던 연극처럼 다시 그녀의 삶을 회고하는 듯했다. 하얀 분장 아래 잔뜩 주름진 얼굴이 눈부시게 밝았다.
“맞아. 그 연극처럼 내 인생에도 많은 교훈들이 있었네. 8년 전에 공부를 하러 영국에서 뉴욕으로 무작정 찾아왔었어. 벌써 8년이 훌쩍 넘어버렸지만 이렇게 오래 있을 거라고는 생각 못 했는데 말이야. 언어도 같은 국가인데 아는 사람이라고는 없는 뉴욕이 사실 무서웠어. 낯설었다는 것이 맞을까? 뭔가 실체를 알 수 없기 때문에 두려운 것 있잖아.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설명해주지 않고, 알려주지 않는 그런 미지의 세계를 떠난다는 것. 너무도 두려웠어.”
“아니, 그런데 어떻게 지금까지 뉴욕에 계신 거에요? 앞으로도 더 있을 거에요?”
“그러게. 나도 이렇게 뉴욕에 오래 있을 줄은 몰랐어. 가끔 내 고향인 영국에 가고 싶기도 하지. 뉴욕의 물가는 정말 살인적이거든. 누군가는 나를 센트럴파크 길거리의 가난한 혹은 흔한 거리의 아티스트로 생각할 수도 있어. 나도 언제까지 이 일을 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고. 사실 그런 두려움과 의문이 생길 때마다 보는 것이 2개가 있어. 하나는 조셉 M. 마셜의 《그래도 계속 가라 Keep Going: The Art of Perseverance》는 책이야. 거기 이런 구절이 나와.
‘사람들은 모두 무언가를 두려워하고 있단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날마다 살아가는 일을 멈추지는 않아. 우리가 양지 쪽에 있는 동안 늘 음지쪽을 두려워하면서 걷고 있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 역경과 고난의 시간이 언제, 어떤 식으로 닥칠지 모르는 건 확실하다만 그래도 그게 언젠가는 찾아오리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정말 그런 일이 닥쳤을 때 한결 쉽게 맞설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난 그저 지금 하는 일을 묵묵히 하며, 좋은 기회들이 왔을 때 최선을 다하려고 하지. 덕분에 브로드웨이는 아니지만 오프-브로드웨이에서 공연도 하고, UN 같은 곳이나 유명 호텔에서 공연을 하는 기회를 얻기도 했지.”
“와, 멋지네요. 다른 하나는 뭔데요?”
“다른 하나는 영국에서 가져온 포스터야. 아마 보면 알 듯 싶은데… 잠깐만.”
그녀는 공연 도구 안에서 작은 포스터를 꺼냈다. 거기엔 Keep Calm and Carry On이라고 적혀있었다. 나도 본 적 있는 이 유명한 포스터. ‘평정심을 유지하고 하던 일을 계속 하라.’ 심플한 디자인 안에 왕관과 단어가 나열되어 있는 그 포스터.

“고향 영국에서 세계 제2차 대전이 일어난 후 사람들이 너무 동요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정부에서 만든 포스터였어. 난 비록 전쟁을 겪은 세대는 아니지만, 뉴욕에서의 삶이 힘들어 고향이 생각날 때면 이 포스터를 봐. 나에게 꼭 엄마가 들려주는 말 같다는 생각이 들거든. 두려워하지 말고, 진정하고, 가던 길을 계속 가라, 딸아. 하고 말이야. 여기에 벌써 추억이 많아. 그간 어려운 시절 다 겪으면서 어린 아이였던 한 친구는 성인 되어서 나를 찾아오곤 해. 자기 엄마가 너무 좋아했던 공연이라면서 나에게 인사를 하곤 하지. 아차차, 왜 뉴욕이냐고 물어봤었지? 뉴욕은 말이야 자유로움Liberty 그 자체야. 괜히 자유의 여신상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나는 발레로 마임을 하는 동안 자유의 여신상, 그리고 내가 두려움을 포기하고 적극적으로 얻은 자유를 생각해. 그 순간 너무 행복하거든. 숨통이 탁 트인 것 같고. 내가 두려움을 고단함을 다 견뎌내는 힘이기도 하고 말이야. 이만하면 충분한 답이 되었어? ”
“그럼요! 너무 재밌는 이야기였어요!”
그녀의 아름다운 이야기들에 고개를 연신 끄덕이던 나는 생각에 잠겼다. 특히 이렇게 날씨가 좋은 날, 그녀의 몸짓은 현실과는 다른 차원의 세계에 있는 듯 가볍고도 리드미컬한 움직임을 선보였던 것을 떠올려보며, 그녀가 자유를 위해 날아온 이유를 되새겨 보게 된다. 두려움에 맞설 수 있는 용기, 떠날 수 있는 용기, 그리고 평정심을 갖고 자신의 길을 묵묵히 나아가는 것. 그녀가 나에게 속삭였다.
“있잖아, 내가 즐기면 세상도 같이 춤을 춰. 그러니 두려워 말고 즐겨.”
손보미 www.sonbomi.com / @KatieBomiSon
“불투명한 미래로 방황하는 청춘들에게 세상을 만나는 또 하나의 방법을 알려준다” 며 서울시장 박원순 씨가 청춘멘토로 손꼽은 저자. 대학재학 중 5년간 25개국 여행, 6개국 봉사여행을 통해 넓은 세상과 사람들을 만나며 성장했다. EBS ‘공부의 왕도’, KBS World 프랑스어 방송, KBS 3 라디오 여행기에 출연, 다양한 대학에서 강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