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로와 꿈

[22호] 휠라 글로벌&아쿠쉬네트 컴퍼니 회장 윤윤수

글로벌 브랜드들을 
한국 것으로 만들고 있는, 샐러리맨의 신화
휠라 글로벌&아쿠쉬네트 컴퍼니 회장 윤윤수
인터뷰/글 권태훈 사진 전한얼 (스케치북 스튜디오)
2007년과 2011년, 세계를 놀라게 한 일이 두 번 있었어.
한 번은 세계적인 스포츠 브래드 FILA 코리아가 이탈리아 FILA 글로벌 본사를 인수했다는 것이었고, 또 한 번은 FILA가 세계 1위 골프공 브랜드인 아쿠쉬네트를 인수했다는 것이었지. 특히 FILA의 아쿠쉬네트 M&A 사례는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에서도 비결을 궁금해하며 연구하고 있다고 해. 이 두 뉴스의 주인공이자 중심에 바로 지금부터 만나볼 자랑스러운 한국인 윤윤수 회장님이 있어. 가난한 시골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오늘날 세계적인 글로벌 기업들을 인수하여 한국 브랜드로 만드는 CEO가 되기까지 드라마틱한 스토리! 지금부터 만나보자.
안녕하세요. 윤윤수 회장님, MODU 독자들을 위해 소개 한번 부탁 드리겠습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휠라 글로벌 & 아쿠쉬네트 컴퍼니 회장을 맡고 있는 윤윤수입니다.
FILA는 나이키, 아디다스와 함께 세계적인 스포츠 브랜드인데 지금은 이 브랜드가 한국 것이라고 들었습니다. 
네, 맞습니다. 원래 FILA는 이탈리아에서 탄생한 회사였고 전 세계에 지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중의 하나인 FILA 코리아의 CEO로서 경영하고 있었고요. 제가 CEO일 당시 FILA 코리아는 전 세계 FILA 지사 중에서 순이익률이 1위였고 가장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1996년에 전 세계 FILA를 총괄하던 엔리코프레시 회장은 “전 세계 휠라인이여, 휠라 코리아를 본받아라”고 말하기도 했었죠 (웃음). 그런데 2007년에 휠라 본사가 경영 부진을 겪으면서 큰 어려움을 겪게 되었죠. 이때 제가 경영하던 FILA 코리아에서 자금을 모아 휠라 글로벌 본사를 인수함으로써 세계적 브랜드인 FILA가 한국 기업이 되었죠.
 
엄청난 사건이었네요. 지사가 본사를 인수하다니요. 그때의 이야기를 조금 더 들려주시겠어요?
저는 우리 자본이 외국에 적극적으로 많이 나가 글로벌 기업의 인수에 나서야 한다고 생각해요. 외국에 나가보면 경영 부실로 시장에 나온 브랜드들이 수두룩해요. 꼭 처음부터 우리가 만든 것만이 우리 기업은 아니에요. 그걸 사서 우리가 경제적으로 주인이 되면 한국 기업이 되는 것이죠. FILA 본사가 위기에 빠졌다는 말을 들었을 때 저는 이게 오히려 기회라고 판단했어요. 비록 단기적으로 위기지만 FILA 브랜드의 장기적인 가치를 믿고 전략을 다시 짜나간다면 충분히 수익을 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인수에 도전했죠.
당시 휠라 브랜드 가치가 4억 달러에 이르렀는데 이 금액은 어떻게 조달하셨나요?
창의성, 그리고 신뢰가 원동력이었어요. 저 역시 큰돈이 없었기 때문에 인수 금액 마련을 위해 발상의 전환이 필요했죠. 보통 FILA와 같은 세계적인 스포츠 브랜드들은 세계 각지의 FILA 지점들로부터 매년 브랜드 사용 로열티를 받아요. 그런데 해외 지점들은 일반적으로 약자로서 매년 본사에 내야 하는 로열티 부담이 상당하고, 계약 기간이 끝날 때마다 재계약을 안 해줄까 봐 걱정도 많죠. 저는 이들에게 평생 FILA 브랜드 사용권을 주어서 안정성을 보장해주는 대신에 평생 로열티의 일부를 선불로 달라는 제안을 했어요. 이런 방식의 인수금액 마련은 한국 금융사에 최초였고, 해외 법인들이 휠라 코리아와 나를 신뢰해야만 가능한 방식이었죠. 이밖에 돈을 빌려주는 투자자들에게는 3년 후 주식시장에 사장해서 꼭 수익을 안겨주겠다고 약속했죠. FILA 해외 지사들과 투자자들은 저를 믿어주었고 결국 자금 조달에 성공해서 FILA 본사를 인수할 수 있었어요. 인수에 성공하자 ‘꼬리가 몸통을 삼켰다’면서 전 세계 언론으로부터 주목을 받았죠.
 
지난 2011년에도 전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하는 도전을 하셨다고 들었는데요, 세계 1위의 골프용품 기업인 아쿠쉬네트가 매물로 나오자 이 역시 휠라 코리아가 인수했다고요. 이때는 인수 경쟁사로 아디다스도 있었는데 이를 제치고 인수했을 뿐만 아니라 금액도 무려 13억에 달러에 이르렀다고요?
아쿠쉬네트는 세계 1위의 골프공 브랜드인 타이틀리스트, 마찬가지로 세계 1위의 골프화 브랜드인 풋조이를 보유한 글로벌 기업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뿐만 아니라 아디다스도 높은 관심을 가지고 우리보다 더 많은 금액에 사겠다고 했었죠. 하지만 휠라 코리아는 단순히 돈뿐만 아니라 경영 능력, 그리고 사업을 성장시킬 비전을 내세워 인수에 성공하였습니다. 한국 M&A 역사상 전례 없던 일이었고 2011년 세계 골프 업계 최대의 뉴스였죠.
 
어린 시절, 가난과 삼수 실패, 
무기정학 등 고난의 연속
정말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자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네요! 문득 회장님이 현재의 위치에 이르기까지 과정이 궁금해집니다. 
어린 시절에는 어떤 학생이셨나요?
공부는 잘했었는지가 궁금한 거죠? (웃음) 나름대로 잘하는 편이었어요. 시골이기는 했지만 초등학교 때는 1등을 했고 중학교를 대도시인 수원으로 진학했으니까요. 그리고 고등학교는 서울로 진학했는데 이때는 1등은 못했지만 10등 안에는 들었었어요. 그런데 지금 돌이켜보면 저의 어린 시절과 20대는 정말 수많은 실패의 연속이었고 앞이 캄캄했던 거 같아요.
저는 1945년 경기도 화성군 비봉면이라는 산골짜기에서 태어났는데 시골이라 의사도 없었고 해방 직후라 의료시설이 열악하기 짝이 없었어요. 그곳에서 제가 태어난 지 100일도 채 안 되어 저희 어머니는 장티푸스라는 전염병에 걸리셔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한번도 어머니의 사랑을 경험해보지 못한 채 고모님 손에서 자랐어요. 시골에서 다니기에 학교가 너무 멀어서 결국 고모와 함께 수원으로 갔는데 아버님은 농사를 지으셨기 때문에 고향을 떠날 수 없었죠. 그런데 고모 또한 매우 불행한 분이셨어요. 결혼 후 고모부가 일본으로 공부하러 간다고 하고는 돌아오지 않으셔서 평생을 과부로서 혼자 생계를 유지하며 살아가셨거든요. 먼 타지에서 고모와 단둘이 살다 보니 항상 사랑 결핍증을 가졌고 외로움도 많았던 학생이었어요.
그 시절 회장님의 꿈은 무엇이었나요?
아버님께서 제가 판검사가 되길 원하셔서 법대를 가서 법조인이 되려 했어요. 그런데 동시에 아버님 때문에 제 꿈이 다시 바뀌었어요. 제가 고등학교 2학년 때 폐암으로 돌아가셨거든요.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다 위독하시다는 말을 듣고 시골에 내려왔는데 투병 중이시던 모습이 너무 안타까웠어요. 내가 장가가는 것은 보고 죽어야 한다면서 너무나 살고 싶어 하셨는데 가난한 형편에 제대로 된 치료도 받지 못하고 결국 돌아가셨어요. 어린 나이에 큰 충격이었죠. 그때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을 하는 건 의사라고 생각하고 목표를 의대로 바꾸었어요. 의사가 되어서 아버님을 고생하게 만든 암을 정복해보겠다고 결심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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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꿈이 뭔가가 중요한 게 아니라, 
내가 처해있는 환경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고, 최선을 다하는 자세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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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대학은 의대에 진학하신 건가요?
서울대 의대에 도전했는데 떨어졌어요. 아버님의 삶에 대한 애착이 강했기 때문에 한 번 실패로 포기할 수는 없었죠. 재수를 시작했는데 환경이 너무 열악했어요. 부모님 두 분 다 돌아가신 상황에서 집안에 여유도 없고, 서울에서 머물 곳도 마땅찮아서 친구들 집을 전전긍긍했는데 공부가 될 리 없었죠. 결국 의대 재수에 실패했죠. 그런데 당시 입시제도에는 2지망이라는 게 있어서 서울대 치의예과에 지원했었는데 거기에는 합격이 되었어요. 주위에서는 서울대 치의예과니깐 당연히 다녀야 한다고들 했고 그래서 한 학기는 다녔어요.
그런데 1학기를 다녔는데 너무 재미가 없는 거에요. 게다가 원래 의대를 목표로 했던 이유가 단순히 의사가 되어서 부유하고 편하게 살기 위함이 아니라 암 연구가가 되어 아버지의 한을 풀어주기 위해서였는데, 치과의사가 되어서는 그렇지 못할 게 분명했죠. 결국 꿈을 이루기 위해 무작정 치의예과를 그만두고 다시 삼수로 서울대 의대에 도전했고, 이때는 2지망을 적지조차 않았어요. 어차피 붙어도 치의예과 때처럼 다니지 않을 거 같았기 때문에요. 그런데 세 번째 도전마저 실패로 끝났어요.
큰 후회와 불안감이 몰려들었죠. 재산도 없고 부모님도 없는 환경에서 빨리 졸업해서 먹고 살 길을 찾아야 했는데 쓸데없는 고집과 꿈 때문에 이십 대 초반이 모두 날아간 것이니까요. 그때부터 어디든 빨리 대학을 가야겠다는 생각으로 아직 원서를 받고 있는 2차 대학교를 물색하기 시작했고 그 중 한국외국어대학교를 발견했어요. 당시 한창 세계화라는 용어가 보편화되고 영어의 중요성이 뜨던 시기여서 영어과를 가고 싶었는데 외대에서 커트라인이 제일 높았죠. 고민이 시작되었어요. 이번에도 떨어지면 4수를 해야 된다고 생각하니 너무 겁이 났죠. 그래서 무엇을 배우는지도 몰랐지만 그때 외대에서 막 신설되었던 정치외교학과를, 커트라인이 낮을 것 같아서 하향 지원했어요. 그런데 막상 들어가 보니 제가 수석 입학이더라고요 (웃음). 하향 지원에 대한 후회가 막심했죠.
 
정말 대학에 가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네요. 그렇게 힘들게 들어간 대학교 생활은 어떠셨어요?
대학생활이라는 게 없었어요. 1년도 안 되어 정학을 당했거든요. 외대에 들어가 보니 고등학교 동기가 한 명 있었어요. 고등학교 다닐 때부터 조금 놀던 친구였는데 이 친구가 시험 볼 때마다 내 뒤에서 컨닝을 하는 것이었어요. 한번은 컨닝만 하는 게 아니라 시험지를 아예 바꿔달라고 했는데 소리가 나서 감독교수님에게 걸렸죠. 보통 잘못했다고 빌면 봐줄 수도 있는데 얘가 또 무엇을 잘못 먹었는지 잘못한 걸 모르겠다고 대드는 거였어요. 감독교수님은 화가 나서 둘 다 무기정학을 시켜버렸어요. 그때 정말 너무나 황당했을 뿐 아니라, 삼수를 했는데 무기정학으로 1년을 또 날린다고 생각하니 앞이 캄캄하고 세상이 나를 안 도와주는구나 싶었죠. 그때만큼 절망을 느낀 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할 수 없이 군대라도 가야 되겠다 싶어서 입대를 했죠.
군 제대 후 다시 1학년으로 복학을 하셨죠. 이때 꿈을 바꾸셨다고 들었습니다.
우선 제대를 하고 나니 등록금을 마련할 길이 없었고 잘 곳도 변변치 않았어요. 세수할 때가 없어서 친한 분이 근무하시던 조선호텔 화장실에서 씻고 그곳 급식을 먹기도 했고,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도와달라는 연락도 많이 돌렸죠. 그렇게 고생을 하다 보니 공부를 열심히 해서 빨리 졸업하고 일을 시작해야겠다 싶었죠. 내가 잘하는 게 뭘지 생각해보니 그나마 영어였고 주위 정치외교학과 친구들이 외무고시를 많이 보기도 해서 외교관을 목표로 삼았죠. 그리고 친구들 8명이 정도 모여서 외무고시 공부를 시작했어요.
학년이 비슷해서 친구기는 했지만 제가 삼수에 정학까지 했으니깐 사실상 나이는 저보다 5~6살 어린애들이었죠. 그런데 이 나이 콤플렉스가 계속 공부 집중을 방해하고 마음에 걸렸어요. 같이 시험을 붙어서 외교관 동기가 되면 나이 어린애들하고 경쟁에 어려움이 많을 것 같았고, 게다가 공무원 사회는 능력이 좋다고 혼자 승진하는 구조도 아니라 기본적으로 근속연수에 비례해 비슷하게 승진하잖아요. 외교관이 되더라도 뭔가 답이 나오지 않을 것 같았죠. 그럴 바에 그냥 일반 기업에 들어가서 비즈니스나 자유스러운 필드에서 뛰면서 실력만으로 내가 잃어버렸던 시간을 되찾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1차에 합격을 한 상황이었지만 2차에 응시하지 않고 외무고시를 포기했어요. 그리고 학교 공부에 전념해서 겨우겨우 외대 졸업을 했는데 이때 제 나이가 무려 30살이었어요. 결국 이룬 것 하나 없이 하는 일마다 실패로 얼룩진 채로 20대를 마무리한 것이죠.
  
삼십 대, 전자레인지 신화와 최연소 임원의 역사를 쓰다
외교관의 길은 아니라고 판단하시고 서른 살부터 새롭게 비즈니스 쪽으로 진로를 정하신 거네요. 그러면 첫 직장은 어디였나요?
해운 공사에서 근무했는데 사실 가고 싶어서 간 곳은 아니었어요. 그 당시 취직하기가 무척 어려웠었는데 특히 제 전공은 정치외교학이다 보니 원서조차 내지 못하는 곳이 많았어요. 게다가 나이가 30살이니 나이 제한에 걸리는 곳도 많았죠. 그래서 지원 가능한 곳 중에서 찾다가 해운 공사를 간 것인데 들어가 보니 저랑 잘 맞지 않았죠. 수출입하는 우리 기업들의 해양 운송을 보조해주는 회사였는데 그곳의 일은 안정적이기는 했지만 도전적이지 않았고, 제가 담당한 역할도 운송 거래가 끝난 후 돈을 잘 받아온다거나 하는 등의 제한적이고 사소한 일이었어요.
그래서 제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진지하게 고민을 시작했죠. 당시 70년대는 범국가적으로 경제 개발과 수출을 위해 온 힘을 쏟던 시기였어요. 수출을 많이 해서 외화를 많이 벌어오는 게 국가를 위하는 일이었고 박정희 대통령도 수출입국을 핵심 정책으로 펼쳤죠. 이런 분위기 속에서 저도 막연히 국가를 위해 일하고 싶었고, 영어를 좀 잘했기 때문에 이를 활용해서 수출에 이바지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해운 공사를 나오기로 결심하고 이력서를 수백 장 쓰기 시작했죠.
그래서 다른 직장을 새롭게 구하셨나요?
주로 상사를 썼는데 나이 때문에 쉽지가 않았어요. 그나마 오라는 곳은 신입사원으로 들어오는 조건을 내걸었는데 제 동기들은 이미 회사에서 과장들을 달고 있을 나이다 보니 제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죠. 그렇게 좌절감을 느끼다, 하루는 코리아 헤럴드라는 영자신문에서 사람을 구한다는 광고를 봤어요. 회사 이름과 소개도 별로 없이 수출하는 회사라면서 wanted라는 광고만 덩그러니 있었죠. 무작정 원서를 냈고 면접을 보러 오라고 해서 갔더니, 1명을 뽑는데 무려 80명이 지원한 것이었어요. 뒤늦게 알고 보니 JC Penney라는 미국에서 두 번째로 큰 유통기업이었고 한국 제품을 사서 미국 전역에 판매하는 외국계 회사였죠. 외국 회사는 인터뷰도 많고 인사담당자만 면접 보는 게 아니라 한국 지사장, 아시아 총괄, 본사 책임자가 와서 보는 등 프로세스가 6개월이 넘게 걸렸죠. 그런데 여기서 기적적으로 국내 최고의 무역회사에 다니던 사람들을 모두 제치고 제가 합격을 한 거에요. 직전까지 친구들 사이에 저에 대한 평가는 ‘윤수 인생은 이미 끝났어. 쳐다볼 필요도 없는 꺼진 불이야’ 였어요. 하지만 JC Penny 입사 이후 친구들 사이에 새로운 유행어가 탄생했죠 (웃음).
“꺼진 불도 다시 보자”
JC Penny에서는 담당하는 상품마다 수출에 성공, 미국 시장에서 큰 성공을 거두셨다고 들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전자레인지 신화’가 가장 유명하던데 자세히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미국 출장 도중에 본사 바이어가 지나가는 말로 지금 JC Penny에서 판매되는 전자레인지가 일본 제품인데 경쟁력이 예전 같지 않다, 한국에서 이보다 싸게 수입할 수 있으면 미국에서 엄청난 인기를 모을 텐데 한국에서 가능할까 라는 말을 했어요. 물론 당시 한국 전자회사 기술력으로는 어림없는 일이었죠. 하지만 미국 시장에서 전자레인지 수요가 엄청나게 컸기 때문에 만약 한국 제품으로 JC Penny에 납품만 할 수 있다면 국가를 위해서도 엄청난 이득이 될 거라 생각했어요. 가슴이 뛰었죠. 무작정 바이어에게 가능할 것 같다고 말하고는 한국의 삼성전자에 연락을 했죠. 당시 삼성전자는 전자레인지를 한 번도 만들어 본 적 없는 작은 신생업체였지만 역시나 도전적인 자세로 한번 해보자고 말했어요.
 
아직 만든 적도 없는 전자레인지를 수출해보겠다고 결심하신 거네요. JC Penny를 설득하기 쉽지 않으셨을 텐데요.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JC Penny에게 한국이 전자레인지를 만들 능력이 있다는 입증을 하는 것이었어요. 삼성전자와 나는 아이디어를 내서 급한 대로 일본 전자레인지를 분해, 개조 후 우리가 만들었다며 미국으로 보냈어요. JC Penny에서는 만족하는 눈치였고 이번에는 한국의 전자레인지 생산 공장을 보고 싶어했죠. 이번에는 문제가 좀 심각했어요. 본사 엔지니어가 한국으로 탐방 오는 짧은 시간 동안 없던 전자레인지 공장을 만들어야 하는 상황이었죠.
다시 한 번 삼성전자와 머리를 맞대고 논의를 했어요. 그리고 삼성전자의 선풍기 공장을 급히 전자레인지 공장인 것처럼 겉모습만 꾸미기로 했죠. 간판과 외형을 바꾸고, 일본 전자레인지 수백 대를 수입해서 분해하고는 공장 컨베이어 벨트에 조립 전 상태처럼 늘어놓았죠. 정말 무모하기 짝이 없었고 원래는 그렇게 하면 안 되었지만, 그만큼 수출을 통한 외화 획득과 전자산업 육성이 국가적 차원에서 절실하였기 때문에 설득과 계약에 온 정성을 쏟았어요. 결국 기적처럼 JC Penny는 한국이 전자레인지를 생산할 능력이 있다고 믿고 삼성전자와 계약했어요.
 
계약하고 나서 실제 전자레인지 생산도 성공했나요?
다행히 계약 후 수출까지 6개월 정도의 시간이 있었어요. 이 기간 동안 저와 삼성전자는 최선을 다해 기술 연구 및 개발에 힘썼어요. 지금도 대단하지만 삼성전자는 당시 공장과 경험 전혀 없던 상태에서 6개월 만에 전자레인지를 만들어서 결국 수출에 성공하며 모두를 깜짝 놀라게 했죠. 이 전자레인지는 약 3년 만에 1억 달러 넘게 수출하였고 JC Penny와 삼성전자 모두에게 막대한 이익을 안겨다 주었죠.
이 사건은 무역업계에 윤윤수라는 이름을 크게 알렸고 이때의 성과를 인정받아 화승 그룹에 임원으로 스카우트되었어요. 이때 제 나이가 37세였고 사회에 진출한 지 7년 만이었죠. 사회생활을 일찍 시작한 동갑 친구들이 과장, 부장이었음을 고려하면 저의 잃어버린 젊음을 극복해낸 셈이죠 (웃음).
FILA와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되었나요?
화승에서 수출담당 이사로 일했기 때문에 미국 출장이 많았어요. 출장 중에 미국 사람들이 입고 다니던 휠라 티셔츠를 발견했는데 그게 첫 만남이었죠. 브랜드가 세련되고 멋스러워서 문득 의류뿐만 아니라 휠라 브랜드로 신발을 만들어 미국에 팔면 잘 될 것 같았어요. 그래서 당시 미국 휠라의 라이센스를 가지고 있던 호머 알티스에게 제안을 하고 휠라 미국 사업을 돕기 시작했어요. 결과는 대성공이었죠. 미국에서 휠라는 본래의 의류보다 신발이 더 큰 비즈니스로 성장했어요.
그러던 1991년, 휠라 본사에서 한국에 진출하려고 조사를 하다 저의 존재를 알게 되었어요. 미국 휠라 성공에 대한 소문을 익히 들었던 터라 먼저 휠라 코리아 사장을 맡아달라고 제안이 왔죠. 호머 알티스의 강력한 추천 도움이 컸는데 덕분에 연봉 160만 달러를 받으며 휠라 코리아 경영을 시작할 수 있었어요. 이러한 본사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휠라 코리아는 매년 200%씩 매출이 성장하였고, 이후 2007년에는 거꾸로 휠라 본사를 인수하는 데까지 이를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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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는 정직해야 하고 성실해야 하며 
그리고 행운이 같이 해야 됩니다 
아무리 정직하고 성실해도 어느 누구도 
당신의 성공을 보장하지는 못할 겁니다
그러나 행운은 정직하지 않고 
성실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절대로 오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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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들에게 전하는 해주고 싶은 말
  
최근 꿈을 찾아야 한다, 진로가 중요하다 등 사회 전반적으로 꿈에 대한 관심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회장님은 여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저는 꿈이라는 게 수도 없이 변했었어요. 아버지가 계실 때는 판검사가 꿈이었다가 돌아가시면서는 의사가 되겠다는 꿈으로 바뀌었고, 외무고시를 쳐보기도 했다가 다시 수출 쪽에 일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무역회사에 취업을 했죠. 꿈은 언제든지 바뀌는 거더라고요. 이는 자기가 원해서 일수도 있고 자기를 둘러싼 제반적인 환경 때문에 바뀔 수도 있어요. 그래서 저는 꿈을 가지고 반드시 이것만을 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시대적 환경과 제반 환경에 따라 꿈은 계속 바뀔 수 있거든요. 자기 꿈이 뭔가가 중요한 게 아니라, 내가 처해있는 환경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고, 최선을 다하는 자세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남들과는 다른 생각, 혁신적인 시도들을 많이 하셨는데 그 원동력은 무엇이었나요?
제가 남들과 색달랐던 이유는 남들과 다른 경험을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그 다양한 경험들이 다시 저에게 얘기를 해줘요. 이렇게 하는 게 더 낫다, 이렇게 해보면 어떨까 등 경험과의 대화에서 나오는 생각과 아이디어가 바로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아이디어라고 생각해요. 사람은 늘 자기가 경험한 곳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거든요.
2007년 자본이 없는 상황에서 4억 달러에 이르는 돈을 마련해 FILA 브랜드를 인수할 수 있었던 것은 리버스 로열티이라는 혁신적 사고 덕분이었어요. 시작은 어떻게 하면 돈을 빌려준 사람이 손해가 안 나고 돈을 빌린 사람도 그 돈을 이용해서 수익을 낼 수 있을까 등 여러 상황을 모두 만족시킬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보는 것이었어요. 그때 오랫동안 FILA 코리아를 운영하며 겪었던 상대적 약자의 불이익 경험이 떠올랐죠. 왜 반드시 라이센스 받는 사람은 항상 불이익을 받아야 하는가, 잘하면 사용료를 많이 내야하고 못하면 본사에서 재계약을 안 해버려서 항상 불안해야 할까. 만약 그 사람에게 이 불안과 불이익을 해소해주면 비용을 선불로 미리 내려고 할 것이다라는 발상이 떠올랐고 리버스 로열티 전략이 나왔죠.
이러한 창의적 생각과 전략은 책에 나오거나 수업에서 배울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저는 경영학과를 나오지도 않았고 경영학 석사 과정인 MBA를 하지도 않았어요. 그런데 해외 명문대 MBA 생들이 자주 견학을 오고 자문을 구해요. 저는 그때마다 생명력을 가진 경영 전략은 경험에서만 나온다, 직접 사업을 하거나 다양한 경험을 해보라고 말해요. 어떤 기업이 전략을 써서 큰 성공을 거두고 경영학에서 이를 연구하더라도 이후에 같은 전략을 반복해서 사용하면 성공할 수 없거든요.
경영뿐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여러분이 큰 성공을 거두기 위해서는, 써야 하는 전략이 남들이 알려주는 것이 아닌 세상에 없었던 정말 새로운 전략이어야 해요. 그 전략은 경험에서만 나오는 것이고요. 남들이 가지 않는 다양한 길, 경험들을 해보세요. 하나의 경험은 또 다른 경험을 제공해주면서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사람으로 만들어줄 거에요.
다양한 경험을 하기 위해 학생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도전 정신과 기업가정신, 그리고 불안과 위험을 받아들이고 극복할 준비가 되어있어야 해요. 이러한 것들이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부모님을 모두 여의고 가난한 환경 속에서도 글로벌 기업인으로 탈바꿈할 수 있게 만들어준 원초적인 힘이었어요. 학교에서뿐만 아니라 사회에 나가도 윗사람들이 얘기하는 게 잘못되었거나 나에게는 안 맞을 경우가 많아요. 이때 대응하는 방식에 따라 두 부류의 사람으로 나누어져요. 안전을 택하고 윗사람에 순응하여 그 안에서 해답을 찾는 사람이 있고, 반대로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과감히 도전하고 거기에 책임을 지는 사람이 있어요. 후자의 사람이 되세요. 자기가 분명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대로 한번 시도해보세요. 아마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엄청난 시간과 최선의 노력 등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에요. 그렇게 한다면 자기 생각이 옳았을 때 엄청난 결과로서 자신에게 보답이 돌아올 것이고 설혹 틀렸다 하더라도 엄청난 경험을 얻게 될 거에요.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시대의 가장 큰 약점은 ‘가진 사람은 더 많이 가지게 되고, 가지지 못한 사람은 계속 가난해지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사회적 양극화라는 이러한 약점을 해소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바로 도전정신과 기업가정신이에요. 리스크를 크게 져서 그 리스크를 이겨내면 그 리턴이 몇 배의 훨씬 큰 리턴으로 돌아옵니다. 이런 길만이 현재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해결하면서 부의 선순환을 가져올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에요. 리스크를 지지 않으려 도전을 하지 않는다면 절대 자본주의 시대의 양극화 흐름에서 빠져나올 수 없어요.
 
마지막으로 청소년들에게 더 해주고 싶은 조언이 있으시다면 말씀해주세요.
많은 실패를 경험하라고 말씀 드리고 싶어요. 사실 저는 너무 많이 실패를 해서 실패에 신물이 나기는 했어요 (웃음). 하지만 돌이켜 보면 제가 겪었던 수많은 고난과 실패가 큰 재산이었고, 오늘의 저를 만든 원동력이 되었어요. 어려움이나 실패를 겪지 못한 사람은 그만큼의 재산을 갖지 않고 시작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해요. 저는 서울대 의대 입학에 3번 실패했지만 이를 통해 겸손을 배웠고, 어려운 가정환경을 통해 참고 이겨내는 인내심을, 끝을 봐야만 하는 근성을, 모든 일을 열심히 하는 성실함을 배웠습니다. 또한 거듭된 실패 경험 덕분에 미래의 성공에 필요한 혁신적 전략을 배웠어요.
이 세상에서 지녀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 중 하나가 겸손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를 제일 잘 가르쳐주는 게 실패에요. 실패를 해봐야 겸손을 배울 수 있고, 다음에는 실패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더 열심히 준비해서 성공할 수 있게 만들어줘요. 또 하나, 어떤 일을 하든지 간에 정직하고 성실하세요. 이 두 가지가 전제되지 않고서는 앞의 모든 전략과 조언들이 유효하지 않을 거예요. 정직하지 않다면 어느 누가 나를 도와줄 것이며, 성실하지 않은데 어떻게 성공할 수 있겠어요. 2007년 FILA 본사를 인수하고 나서 한 젊은 흑인이 저에게 어떻게 하면 당신과 같은 사업가가 될 수 있는지 물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제가 했던 대답을 마지막으로 소개하고자 합니다.
“첫째는 정직해야 하고 성실해야 하며 그리고 행운이 같이 해야 됩니다. 아무리 정직하고 성실해도 어느 누구도 당신의 성공을 보장하지는 못할 겁니다. 그러나 행운은 정직하지 않고 성실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절대로 오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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