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로와 꿈

[17호] 결정짓다 – 아덴 만의 영웅 석해균 선장님

2년 전, 소말리아 해적에게 피랍된 삼호주얼리호에서 단 한 명의 생명도 잃지 않고 무사 귀환하도록 배를 이끈 캡틴, 작전 중 여섯 발의 총상을 입고도 기적적으로 살아 돌아와 불사신이라는 루머까지 퍼졌던 캡틴! 불의와 타협하지 않은 리더십과 도전 정신으로 뭉친 석해균 선장님을 지금 만나러 가보자.
포기를 모르는 캡틴은 어릴 때부터 캡틴?
 
 
포기를 모르는 사람! 어린 시절엔 어떤 학생이었나요?
어릴 때, 또래 친구들과 여기저기 뛰놀면서 장난을 치고, 정말 열심히 놀았지. 서리도 많이 했고요. 요즘엔 그것도 범죄행위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때는 아이들 놀이였거든. 철마다 수박이며 복숭아, 가끔은 닭이나 호박 서리까지 못하는 게 없었습니다. 개구쟁이 골목대장이라고나 할까?
 
 
골목대장이라. 친구들이 많이 따르는 스타일이셨나 봐요.
뭘 하든 주로 앞장서서 하는 건 내가 했었으니까요. 서리를 해도 목표를 정하고, 역할을 나누는 것이라든지. 걸려서 혼이 날 때도 내가 제일 앞장섰지. 집에서도 장남이라 자연스럽게 아이들과 어울릴 때 대장 역할이 익숙했었나 봐요. 또래 중에서는 겁도 별로 없고, 문제가 생겨도 침착하고 하니까. 자연스럽게 많이 따르지 않았을까 해요.
 
 
네, 공부에는 별로 흥미가 없으셨나요?
공부도 열심히 했었지. 노력을 하면 성적이 올라가는 게 재미있기도 했거든. 그런데 가정 형편상 대학에는 진학할 수 없었어요. 멋진 군인이 되는 것이 꿈이라, 사관학교를 목표로 공부하기도 했었지만, 준비하기에 가정 형편상 어려움이 많았어요. 고등학교를 졸업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었으니까. 또 맏이로서 동생들을 먹여 살려야겠다, 집안에 보탬이 되어야겠다는 책임감이 있어서 뭔가를 더 어떻게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지요.
 
 
그래서 졸업 후에 바로 해군 하사관으로 입대하시게 된 거군요.
네, 어차피 가야 하는 군대이기도 했고 하사관으로 복무하게 되면 아무래도 일반 병으로 가는 것보다는 집에 보탬이 될 수 있었으니까. 하사관으로 5년 4개월 정도 복무했어요.
해군으로 시작된 바다와의 인연
바다와의 인연이 시작된 거네요. 그런데 왜 하필 해군이었을까요?
글쎄, 왠지 해군이 가고 싶더라고. 다른 데는 가기가 싫어. 내 이름의 가운데 자가 바다 해(海)자라 그런 거라고 얘기하시는 어른들도 있었는데, 진짜 이상하게도 해군에 가고 싶었어. 또 시골 어른들이다 보니 내 이름, 발음이 어려워서 해군이, 해군이 이렇게 많이들 불렀거든. 그래서 내가 해군 간다니까, 해군이(해균이) 해군 갔다 이렇게 막 동네에 소문이 났었어요.
 
 
포기를 모르는 사람 석해균입니다.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밀어붙인 결과가 오늘의 나를 만들지 않았나 싶어요.
 
 
이름부터 바다와 인연이! 해군에 복무한 후 자연스럽게 배를 타신 건가요?
또, 그런 건 아니었어요. 전역한 후에는 일반 회사로 갔어. 거기서 한 2년 정도를 다니다가 일이 나와는 잘 맞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았지. 그래서 다시 일자리를 알아보던 중에 배를 타게 된 거예요.
 
 
바다와의 재회네요.
그때 외항선을 타면 돈을 많이 준다는 소문이 돌았거든. 실제로도 육지에서 다른 일하는 것보다는 훨씬 돈을 많이 줬어. 그래서 무슨 연고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자격증이나 경력이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일단 화물선을 타기로 했어요. 짐 나르고, 눈칫밥 먹는 말단으로 말이지. 물론 시작할 때는 해군으로 복무하면서 군함을 타봤기 때문에, 못할 게 뭐냐 이런 자신감도 있었어.
 
 
그래도 30년의 세월을 바다에서 보내는 게 결코 쉽지만은 않았을 텐데요?
해군에 근무할 때도 직접 운항과 관련된 일을 한 건 아니었는데, 배에서는 누구 하나 가르쳐 주는 사람도 없었어. 그런 게 제일 힘들었지. 그렇지만 한 2년 정도 배를 타보니 배타는 게 재미도 있었고, 기왕 시작한 거 멋진 캡틴이 되어보자는 꿈도 생겼어요. 그러려면 자격증이 필요했는데, 처음 시도한 게 해기사 시험이었어요. 시험을 보려면 4년의 경력이 필요했고, 13개 과목을 공부해야 했어요. 그래서 그때부터는 화물선, 급유선 가리지 않고 타면서 틈틈이 공부도 했어. 처음부터 하려니 끝이 보이지 않는 것 같았지만, 한 과목을 50번씩만 읽자 라는 생각으로 하나하나 접근하니 마음이 편해졌어요.
 
 
50번이요? 그것도 절대 쉬운 방법은 아니었을 것 같은데요
아무래도 시간이 많이 부족했지. 동료들은 저녁마다 술을 먹자고 유혹하고, 응해주지 않으면 곱지 않게 봤으니까. 그렇게 여러 유혹들이 몰려들 때면 선장이 된 내 모습을 떠올렸어. 물론 내 상상 속의 선원들은 나를 유혹하던 동료들이었지. 그렇게 긴 시간들을 버텨냈어요.
 

 
아덴 만의 여명을 밝히다 
 
 
선장님의 마지막 항해이자 대한민국 해군의 첫 군사작전. 대한민국 해군도 해군이지만 선장님의 공이 컸다고 들었습니다. 
글쎄요. 대응이 조금 달랐던 것이 차이라면 차이였을까. 이전에는 해적이 우리나라 선박을 납치하면 해적이 원하는 대로 돈을 주고 협상하는 게 전부였거든요. 해적들 사이에서는 우리나라가 아주 쉬운 상대로 알려져 있었어요. 구출을 위한 군사작전이 일절 없었거든. 그런 점에서 아덴 만의 여명 작전은 피랍상황에서 대한민국 해군이 나선 첫 군사작전이면서도 매우 성공적인 작전이었다고 할 수 있어요.
 
 
좀 더 생생한 그 때의 이야기가 듣고 싶습니다.
아라비아 해 인근에서 항해하던 중, 해적의 소형 고속정이 우리 배로 접근했어요. 신속히 피난실로 대피해 해군에 구조 요청을 보냈죠. 하지만 순식간에 배에 올라탄 해적들은 피난실 문에 총을 난사했고, 결국에는 피난실로 침입했어요. 얼마간 시간을 버는 동안 저는 해군과 계속 연락을 주고 받았고, 소말리아 영해로 넘어가면 군사작전이 힘드니 최대한 시간을 벌어달라는 답을 받았어요.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배의 운항을 지연시키는 일들을 꾸몄던 거지요.
 
 
하지만 배가 완전히 장악당한 상황에서 방법이 많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할 수 있는 방법은 다 썼지. 엔진이 고장난 체하면서 일부러 배의 속도를 줄이기도 하고, 배의 방향을 몰래 반대 방향으로 바꿔 버리기도 하고. 조타실에 불을 내기도 하고, 무전기를 몰래 켜서 상황을 전달하기도 하고. 연료에 물을 타기도 했어요. 바다에서 있었던 경험들을 살려서 그 때 할 수 있는 모든 걸 했다고 생각하면 돼요. 나중에는 해적들이 눈치 채고 내가 아무런 지시도 할 수 없게 감금해버리더라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 정말 수많은 일을 하셨네요. 당시의 상황에서 선장님을 가장 힘들게 했던 건 무엇이었을까요?
글쎄. 그런 것보다는 오히려 당시 선원들이 내 지시에 온전히 따라주지 않았던 부분이 있어 아쉽지. 그냥 본국에서 돈이나 줘버리면 될 걸 이렇게 목숨을 걸어야 할까 그런 생각을 갖고 있었던 거 같아. 그렇지만 선장으로서 우리가 하는 일의 중요성을 전달할 여건도, 방법도 없었기에 내 명령에 따르게 만들 수가 없었어요. 항해를 위해 처음 만난 선원도 많았고, 다른 나라 선원도 있었으니 극한 상황에서 내 뜻에 따르지 않는 건 어쩔 수 없했지만. 내 지시를 믿고 따라주었다면 더 수월하게, 그 상황을 벗어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은 있어요.
 
 
총칼이 눈앞에 있는 상황에선 목숨을 건 선택이었을 텐데, 어떤 생각으로 그런 결정들을 하신 건가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우리나라는 이전까지 적극적인 군사작전을 하지 않고 해적들이 요구하는 조건대로 돈을 주면서 배와 선원들을 되찾아왔어요. 그런데 그런 대응들이 계속 이어지다 보니, 소말리아 해적들은 그들이 납치한 배가 한국 배라는 것을 아는 순간, “머니, 머니!” 하면서 아주 만세를 부르더라고. 나는 그게 대한민국 사람으로서 너무 자존심이 상했어요. 또 선장으로서도 내 배와 선원들을 그들의 못된 목적에 이용하면서 돈 몇 푼짜리로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에 기분이 나빴고요. 내게 선택권이 있다면 대한민국의 배와 선원들을 이렇게 놓아 두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죠.
 
 
최악의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모두가 무사해 다행입니다. 어떻게 그런 대담한 행동들을 하실 수 있으셨을까요?
위기 상황을 맞으면서 “그래, 이 일을 하다가는 죽어도 좋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그러면서 더이상은 두려울 게 없었어요. 내가 만약 “한국은 봉이다”라는 해적들의 생각을 바꿔 놓는다면, 한 목숨 바쳐 대한민국의 위상을 높일 수 있다면 목숨값 치고는 꽤나 비싸겠다 하는 생각도 들더라고.
 
 

“가장 해주고 싶은 말은
절대 포기하지 말라는 거예요.
어떤 상황에서도

절대로.”
 
 
바다에서 육지로. 제 2의 인생의 시작!
 
 
그 과정에서 6발의 총상. 돌아올 때는 의식이 없으셨죠. 정말 국민 모두가 선장님의 쾌유를 기원했던 그 때 분위기가 아직 생생합니다. 아덴 만 전과 후, 어떤 점이 가장 크게 달라지셨나요?
삶이 완전히 바뀌었지요. 바다에서 살던 사람이 이제는 더 이상 배를 타지 않고 육지에서 살고 있으니까. 여섯 군데 총상을 입고, 의식 불명으로 헤매면서, 또 다친 몸을 힘겹게 회복하면서 삶에 대해 정말 많이 생각해 보게 됐어요. 돈을 벌어도 남보다 많이 벌어야 하고, 늘 쫓기듯이 무엇인가 움켜쥐려고 살았던 삶에서 이제는 다른 것들을 돌아볼 수 있게 되었지. 조금 더 여유가 생겼다고 할까?
 
 
지금의 모습이 정말 좋아 보이십니다. 제 2의 인생을 시작하면서 이제 새로운 도전을 하신다고 들었는데요.
이번 학기부터 방통대에 입학해 청소년 교육에 관하여 공부를 시작했어요. 전부터 청소년 문제에 대해 관심이 많았는데 내가 가진 경험과 생각으로, 아이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부분이 없을까 생각하고 있었거든. 안 하던 공부를 하고 리포트를 쓰려니 많이 어렵네(웃음).
 
 
도전의 연속. 이번에도 쉽지 않을 것 같은데, 혹시 본인만의 노하우가 있으실까요?
노하우라고 하긴 그렇고, 하나 하나 접근하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멀리서 봤을 때는 이것도 해야 되고 저것도 해야 되고 할 게 너무 많아 보이는데, 그럴 땐 그냥 남들보다 조금 늦더라도 하나씩 하나씩 해나간다는 생각으로 시작하면 되지. 그러다 하나가 성취되면 그 기쁨이 있어. 그러면 그 성취감으로 다음 일에 또 도전할 수 있는 거예요. 하나의 일을 끝내면서 얻는 기쁨을 다음 일을 시작하는 동기로 사용하는 거지.
 
 
선택과 집중이 필요한 때군요. 아까 전의 질문으로 돌아가서, 혹시 어떤 청소년 문제에 관심이 있으신지요?
학교 폭력이나 왕따 같은 현상으로 아이들이 자살을 하고 다치기도 하잖아. 그렇게 학교에 정 붙이지 못하고 방황하게 되는 부적응자 아이들에게 관심이 있어요. 그렇게 쉽게 뭔가를 포기하면 안 되는데, 아직 꽃도 못 피워본 아이들이 극단적인 선택으로 빠지는 게 정말 안타까워요. 그렇게 자살하는 아이들이나 그것 때문에 무너지는 주변 사람들이나. 얼마나 큰 손해고 얼마나 큰 아픔이겠어.
 
 
이제는 교육자로서 우리 청소년들을 살펴주시길 기대합니다. 마지막으로 학생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으시다면?
가장 해주고 싶은 말은 절대 포기하지 말라는 거예요. 어떤 상황에서도 절대로. 이 말에는 3가지의 의미가 담겨있어요. 일단 첫째는 계속해서 도전하라는 것. 포기하지 않으려면 뭔가 도전한 게 있어야겠지. 계속해서 삶에서 부딪히는 문제들에 대해서 도전하세요. 둘째는 인내심을 가지라는 것. 과정이 길어도 인내심을 갖고 이겨낼 줄 알아야 됩니다. 셋째는 혁신하라. 계속해서 혁신하고 또 혁신하세요. 새로운 것을 찾는 과정이 또 다른 도전이 되니까요. 
 
 
석해균 선장님의 인터뷰를 읽고, 그 소감을 MODU 홈페이지(http://www.modumagazin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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