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로와 꿈

[12호] 국제 옥수수재단 김순권 박사님

앞서 걷다

국제 옥수수재단 김순권 박사님

 

 인터뷰 권동혁
 배상진
사진 김세현

국제농업연구대상(벨기에 국왕상), 국제기술개발상(이태리), 대통령 해외봉사상, 나이지리아 명예추장, 아프리카 국가연합 연구상, 제6회 농업부문 일가상, 국가과학기술연구회 제1회 과학기술인상, 노벨상 후보 추천까지. 이 분이 받은 상이며 업적만 나열해도 MODU 잡지 한 권은 그냥 나오겠다. 옥수수로 기아 해결, 남북 평화, 에너지문제 해결까지. 못 푸는 문제가 없는 진짜 옥수수 박사님. 눈코 뜰새 없이 바쁜 국제 옥수수재단 김순권 이사장님을 MODU가 만나고 왔다.

▲국재옥수수재단 김순권 박사님

 

 

안녕하세요 박사님. 한 줄 소개 부탁 드립니다.

옥수수 박사 김순권입니다.

옥수수 박사. 이젠 고유명사가 되어버린 별명인데, 스스로도 만족하시나요?

농민들이 처음으로 내게 붙여준 별명이에요. 그래서 더 애착이 가죠. 1974년,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한국에서는 누구도 나를 반기지 않았어요. 5개월을 손발이 부르트도록 일하며 만들어온 신품종 씨앗도 시기하는 사람들이 퍼뜨린 헛소문 때문에 심어보지도 못하고 버릴 뻔도 했죠.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밀어붙인 끝에, 신품종의 우수함을 입증할 수 있었어요. 그러면서 농민들의 인식이 바뀌기 시작했죠. 농가지도를 다녀가면 밭에서 옥수수가 쑥쑥 자라나고 수확량이 느는 게 보이니까, 농민들이 먼저 나더러 옥수수박사라 부르기 시작했어요. 내가 좋든 싫든 나를 그렇게 불러주니 정말 전문가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별명이 진짜 나를 만들어 준 거지요. 해외에서는 나를 Dr. Corn이라고 불러요.

 

Dr. Corn. 정말 멋진 이름이네요. 그런데 어떻게 하필이면 옥수수이셨을까요?

처음부터 뭐 대단한 결심을 하고 옥수수 육종에 뛰어든 건 아니었답니다. 오히려 어떻게 하다 보니 다른 길이 없어서 시작하게 된 것에 가깝지요(웃음). 삶이 바뀔 수도 있었을 중요한 갈림길에서 세 번을 낙방하고 도착한 곳이 옥수수였으니까요.

 

 

세 번씩이나요?

첫 번째는 부산상고에서, 두 번째는 농협입사시험에서, 세 번째는 서울대학교 대학원 시험에서 낙방했어요.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 시절. 정부 관리나 은행원이 되고 싶은 생각에 지원했던 부산상고에서 보기 좋게 낙방을 했지. 어린 날에 꽤 큰 충격이었어요. 아버지께서 내가 엇나가지나 않을까 걱정했을 정도였으니까.

두 번째로 낙방한 농협입사시험은 울산농고를 졸업하고 치른 시험이었는데, 당시 병석에 누워계신 아버지 때문에라도 꼭 합격했어야 하는 시험이었어요. 외아들로 집안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처지였거든. 그런데 난감하게도 낙방을 하고 말았지. 그땐 정말 가족들 앞에서 낯을 들 수가 없었지요.

점점 난감해지는 형국이네요. 그럼 마지막 낙방은 또 어쩌다가?

농협입사시험에서 낙방한 후에 경북대 농대로 진학을 했어요 그리고는 내가 학교를 졸업할 무렵에 경북대 농대에 농경제학과가 생긴다는 소식이 있어 당시 교수님께서 학과가 새로 생기게 되면 교수자리를 마련해주신다고 날 꼬드겼지. 그 말을 믿고 서울대학교 대학원 입학시험에 응시를 했고, 나름대로 공부도 열심히 해서 당연히 합격할 줄 알았는데 결과는 낙방이었어요. 세 번째 마셨던 고배였지.

 

세 번의 낙방이라. 정말 옥수수 외의 다른 길을 누군가 막아버리기라도 한 것 같네요.

그렇죠. 졸업 후 진로로 육종과 농경제학을 놓고 고민하다가 교수님 말을 듣고 농경제학을 선택한 거였는데, 그 길이 막혀버린 거니까. 어쨌든 시험을 낙방하고는 농촌진흥청에 들어가게 됐어요. 또 재미있는 것은 내가 농진청에 들어간 이유가 통일벼를 연구하기 위해서였다는 거지. 당시에는 벼와 보리가 우리의 주요 작물이었거든. 그런데 벼를 연구하는 과에는 자리가 없어서 옥수수과로 발령이 나게 됐지 뭐야.

 

옥수수와의 역사적인 조우네요. 옥수수를 선택하기까지는 오래 걸렸지만, 옥수수를 선택하신 후에 가신 미국 유학은 유례없이 단기간에 끝내셨다던데?

미국정부에서 지원하는 장학제도가 있어 미국에 가게 되었지요. 그 때 처음 가서 본 미국의 풍경은 내게 충격이었어요. 당시 우리나라에서 가장 시설이 좋았던 농진청 작물시험장에도 갖춰지지 못했던 스프링클러가 이름 모를 잔디밭에서 돌아가고 있었고 옥수수 대량 재배단지인 콘벨트에는 내 키보다 더 큰 옥수숫대들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지요.

그것을 보면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빨리 이 모든 지식을 흡수해 우리나라 농촌을 살려야겠다는 생각이었답니다. 그러니 저에게는 지체할 시간이 없었어요. 하루라도 빨리 가서 우리 농촌과 농민들에게 새로운 기술과 종자를 전해야 했으니 말이지요. 각고의 노력 끝에 전례 없이 짧은 시간에 저의 박사 논문이 통과되었고, 박사 논문이 통과되자마자 졸업식도 참여하지 않고 귀국했어요. “한국의 옥수수 농가에 교잡종 옥수수를 보급하겠다”는 부푼 꿈을 안고 말이죠.

우리나라 농촌에 미래를 거신 거네요. 그런데 당시 상황만 보더라도 미국에서 농업 기술이 발달한 만큼, 아마 미국에서 일을 하셨으면 훨씬 더 좋은 기회가 많으셨을텐데.

그랬죠. 당시 미국의 임금 수준만 해도 우리나라와는 10배가 넘게 차이가 났으니까요. 미국의 종자회사들은 한국의 농진청에서 받는 월급의 20배가 넘는 월급을 주겠다고 나를 유혹했어요. 그런데 나에게는 한국의 가난한 농민들을 살려야 한다는 꿈이 있었단 말이지. 돈 때문에 그것을 포기한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었지요.

 

하긴 3년 3개월 간 그리 고생하고도 졸업식까지의 열흘을 못 참고 서둘러 오실 정도였으니, 오죽 하셨겠습니까. 그래서 한국에 오셔서는 그 뜻을 이루셨나요?

한국에 돌아온 지 4년. 땀흘려 일한 끝에 강원도의 옥수수 밭에서 신품종들이 확실히 자리잡게 되었어요. 같은 면적에서 거둬들이는 옥수수의 양은 세 배 이상 증가했고, 전체 농가소득도 4백억원 이상이 증가했죠. 그 덕분에 옥수수과의 직원들은 모두가 신바람이 나서 일을 했어요. “밭에서 나는 쌀”이라고 할 만큼 신품종 옥수수가 귀한 대접을 받았고, 그 덕에 우리 농진청 옥수수지도원들도 은인 대접을 받았죠.

 

정말 품으셨던 꿈대로 농촌을 살리셨네요. 그 성공 경험을 가지고 미지의 대륙으로 가셨던 거군요?

네. 우리나라 토양에서 성공을 거두고 나니 이전부터 받았던 요청을 거절하기가 점차 어려워지더군요. 미국에서 박사 논문을 쓸 때부터 귀국해서 농진청에서 일할 때까지 IITA(국제열대농업연구소: CIMMYT, IRRI와 함께 세계적인 권위를 가진 농업관계연구소)측에서 아프리카 농업을 위해 같이 일하자는 제의를 해왔거든요. 그 때마다 우리나라 농민들도 가난을 면하지 못하고 있으니 안 된다고 거절했었죠.

그러다가 1978년. 한국땅에서 새로운 품종 수원 19, 20, 21호가 확실한 성공을 거두고 나서, 비로소 IITA로 가기로 마음을 먹었어요. 더 이상은 거절할 명분도 없었고, 한국에서 이룬 성공을 아프리카 대륙에서도 이뤄서 가난과 기아를 몰아내겠다는 도전의식도 있었죠. 해방 이후에 우리 나라가 다른 나라의 원조를 받아 살 때 자란 저였으니 다른 나라에 진 빚을 갚으러 간다는 생각도 있었어요.

 

 

옥수수로 빚을 갚으러 가신 거네요. 그리고 그 땅에서는 옥수수 추장이 되셨다죠?

네(웃음). 결과적으로 17년의 세월을 보내면서 아프리카에서 교잡종 옥수수 육종에 성공을 했어요. 그로 인해서 1년에 13억 달러 이상의 소득이 늘어나는 효과를 거둘 수가 있었죠. 아마 악마의 풀 스트라이가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들 알고 있을 텐데요. 그 악성잡초 스트라이가 곁에서 죽지 않고 함께 자라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옥수수 품종을 개발한 것이 제 아프리카 17년 연구의 성과였다고 할 수 있어요. 그리고 그를 통해 이루어낸 성공 덕분에 나이지리아의 마을에서 명예추장 마이에군(가난한 자를 배불리 먹인 자), 자군몰루(위대한 승리자)로 추대를 받았어요. 나이지리아 어디를 가도 그 상징인 팔찌만 보여주면 큰 대접을 받는 외국인 최고의 영예죠(웃음).

한국엔 돌아오고 싶으시지 않으셨을 지도 모르겠어요(웃음). 정말 많은 일을 해오셨는데, 지금도 여전히 연구가 지속되고 있으시다고요?

지금은 옥수숫대에서 추출 가능한 바이오 에너지에 관심을 두고 있어요. 기아 문제뿐 아니라 에너지와 지구 온난화 문제도 옥수수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니까요. 옥수숫대에서 에탄올을 추출하는 연구가 진행중인데 이 분야에서도 우리나라가 가장 앞서 있답니다.

그리고 최근에 문제가 되었던 구제역 있죠? 가축의 구제역을 예방할 수 있는 사료용 옥수수 연구도 함께 진행하고 있어요. GMO(유전자 변형 농산물) 방식이 아니니 안심해도 좋아요. 친환경적이고 건강한 옥수수로 구제역이 와도 이 옥수수를 먹고 자란 소, 돼지들은 이겨낼 수 있을 겁니다.

옥수수가 이렇게 많은 문제들을 해결하다니. 옥수수박사가 곧 만물 박사였네요. 정말 많은 것들을  이뤄오셨는데, 혹시 이렇게 많은 성취들에도 비결이 있다면요?

글쎄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나는 낙방하다가 길을 찾은 사람이에요. 부족했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던 거지. 낙방하면서 길을 찾았고, 그 길에서 작은 성공을 거두면서 이거 하나는 확신하게 됐어요. 어려운 환경에 처해본 사람이 성공할 수 있다는 거. 세 번씩이나 중요한 시험에서 낙방하면서도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았으니까 지금의 내가 있는 거 아니겠어요. 사실 환경이 나쁘면 나쁠수록 더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어요. 옥수수도 마찬가지거든. 척박한 환경에서 버틸 수 있는 옥수수가 진짜 좋은 옥수수, 친환경 옥수수지요. 사람도 척박한 환경을 이기고 자란 사람이 진짜 성공할 수 있는 거예요.

사실 요즘 학생들을 보면 오히려 그래서 걱정이 돼요. 나 자랄 때보다 훨씬 잘 먹고 잘 입고, 환경은 좋아졌는데 그 때문에 학생들이 약해진 거 같거든. 어떤 학생은 내가 일하는 옥수수 밭에 와서 자원 봉사를 하는데 몇 날 며칠 화장실을 안 가더라고. 그런 환경에서는 일을 본 적이 없으니까 못하는 거야. 이런 상황에도 처해보고 저런 상황에도 던져져 봐야 능력과 경험이 쌓인다니까. 삶이 너무 편한 친구들은 여기 옥수수 밭으로 와요. 일 잘하면 밥은 사 줄 테니.

박사님 밭에서 다들 일을 한 번씩 해봐야겠네요(웃음). 학생들이 그래도 박사님의 이야기로 많이 도전 받았을 겁니다.

그래요. 나 같은 촌놈도 이렇게 할 수 있는데. 여러분은 더 멋진 사람, 더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어요. 내 아이큐는 124밖에 안 돼. 여러분들은 훨씬 더 머리가 좋잖아. 그런데도 자기를 자꾸 평가절하하고 좌절하는 걸 보면 안타깝지.

역사의 수레바퀴를 굴리는 사람은 몇 명 되지 않아요. 나머지는 따라가는 사람들이야. 기왕이면 수레바퀴를 쫓아가는 99%의 사람이 되기보다는 앞서서 바퀴를 굴리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어요? 정말 자기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을 하세요. 그리고 아무도 하지 않는, 내가 세계 최고가 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하세요. 미소를 하나 짓더라도 세상에서 가장 잘 웃는 사람, 컴퓨터를 해도 세상에서 제일 잘하는 사람이 되겠다는 마음으로 자신감을 갖고 매달리세요.

저희도 학생들을 최고로 행복하게 만드는 잡지가 되어야겠습니다. 정말 좋은 말씀들 많이 해주셨는데, 마지막으로 학생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여러분이 성공을 거둘 수 있는 최고의 비결은 희생입니다. 나를 위해 살아가는 것은 한계가 있어요. 어떻게 보면 하루만 바짝 나를 위해 살아도 더 이상은 할 게 없죠. 허무감이 찾아올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을 위해 살아간다고 생각하면 피곤하지 않아요. 지칠 일도 없죠. 계속해서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해낼 수 있어요. 그러니 언제든지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사세요. 내가 있어서 세상이 좀 더 좋아질 수 있다는 것. 얼마나 쉽게 행복을 찾는 길인가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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